"강화감리교"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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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일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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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양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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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중앙교회는 교육선교를 위해 1901년 4월에 신교육 기관인 교회부설로 “잠두의숙(蠶頭義塾)”을 설립하였으며, 1902년에 또 여학교인 “합일여학교”를 설립하여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둔 민중교육을 시작하였다. 이후 두 학교는 하나의 학교로 통합되었는데, 오늘의 합일초등학교로 발전되었다. 이 학교는 일제치하에 저항하는 민족운동과 한국 개화의 산실이 되어 왔다. 강화중앙교회는 복음, 민족, 교회가 함께 어우러지며 발전하는 민족과 지역을 구원한 구심점이다. 강화진위대장 출신 이동휘(李東輝)권사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의 보창학교, 유경근 속장(독립운동가)의 교회지도자와 강화중앙교회가 함께 추진한 민족교육운동은 민중계몽과 독립사상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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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일(합일)이라는 단어에서 개신교와 양명학의 접합을 떠올릴 수 있다.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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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22일 (월) 08:49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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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강화도 지역의 기독교는 감리교에 의해 시작되었다. 179개 교회 중에 120개가 감리교회다. 강화지역 기독교인 중에 감리교 소속이 77.6%나 된다.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언더우드와 함께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한 아펜젤러는 한국 감리교회 선교를 개척한 미감리회 소속 선교사였다. 1893년 존스 선교사가 인천 책임자로 와서 독립계삭회가 구성되면서 선교확장의 열망이 강화지역으로 이어졌다. 당시 강화지역에 대한 감리교의 선교는 제물포교회(현 내리교회)를 중심으로 시작됐다. 존스 목사와 인천의 노병일, 김기범, 이명숙, 백헬렌 등 한국인 전도자들이 강화선교에 열성을 쏟았다. 강화도는 우리나라 수도로 가는 관문이며, 북쪽으로는 황해도 해주 방면, 남으로는 덕적도를 경유해 충청도 당진까지 이어지는 해상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이었다. 강화의 복음화는 황해도 전도를 위한 전진기지 확보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했다. 당시 한국 선교를 관리하고 있던 스크랜턴은 1892년 12월 21일에 본국으로 보낸 편지에서 존스가 이미 1892년 말에 강화전도여행을 시도한 것과 더불어 강화지역 선교의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제물포와) 이웃해 있는 섬인 강화에는 7만 명 주민이 있는데 우리에게 들어오라고 충동하고 있습니다. 강화를 얻게만 된다면 우리에겐 값진 보화가 될 것입니다. 사실 발판은 이미 얻어 놓았습니다.”

교산교회

강화 최초의 개신교 교회. 감리교. 1893년 세워진 교항교회(현 강화교산교회)다. 양사면 시루미 마을 출신으로 제물포에서 주막을 운영하던 이승환이 존스 목사를 만나면서 복음이 들어오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존스는 이승환의 모친에게 선상에서 세례를 주고 인천에서 활동하던 전도인 이명숙과 전도부인 백헬렌을 시루미로 파송해 이승환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강화지역의 첫 신앙공동체가 탄생했다. 4~5명으로 시작한 예배는 불과 1년 만에 80명으로 부흥했다. 천민출신이 많은 시루미 마을에서 좀 떨어진 다리목에 살던 양반 김상임이 존스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으면서 마을 전체가 개종했다. 김상임이 1894년 자기 집 앞마당에 예배당을 마련하자 시루미 마을교인들이 옮겨왔고 다리목(교항, 橋項)과 시루미(증산, 甑山)의 한자를 따서 교산교회라 이름 지었다.

인물

존스(한국명 조원시), 김상임, 이승훈

홍의교회

강화 두번째 개신교 교회. 감리교. 교산교회 설립 3년 후인 1896년에 설립되었다. 이 마을 서당훈장이던 박능일이 교산교회의 김상임을 만나고 돌아와 자기 집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시작되었다. 서당학생 20여 명, 종순일, 권신일과 함께 자기 집에서 홍의교회를 설립했다.

인물

박능일


강화중앙교회

강화 세번째 개신교 교회. 감리교. 홍의교회에 출석하던 주선일, 박성일, 허진일, 김봉일 등 몇몇 교인이 강화읍 천교하(현 강화읍 신문리. 신문리 144번지, 초가 6칸 반)에 초가집을 마련하고 첫 예배를 드림으로써 오늘날 강화중앙교회의 모체(잠두교회)가 되었다.1900년 9월 1일의 일이었다. 강화지역 복음 전파 8년 만인 1900년에 수도 강화읍에 드디어 교회가 세워졌다. 교회명은 1914년‘잠두교회’에서‘강화읍교회’로 변경. 1975년 11월 ‘강화읍교회’에서 ‘강화중앙교회’로 변경되었다. 1904년 '월곶교회' 개척을 시작으로 26개 교회를 직접 개척하거나 설립에 도움을 주었다.

인물

존스(한국명 조원시, 초대 담임) 김우제, 권신일, 김경일, 주선일, 허진일, 최족일, 김봉일. 이살로메 등이 있다. 김우제 목사는 김상임의 둘째 아들로 하와이와 상해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펼쳤고, 독립운동가 김동수 선생의 부친이다. 강화진위대장 출신으로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기독교 사회주의자 이동휘가 김우제 목사를 만나 기독교에 입문하게 되어 이 교회의 권사를 지냈다. 김동수, 김남수, 김영구 형제가 이동휘와 관련되어 순교하였다. 유경근도 이 교회와 함께 독립운동을 펼쳤다. 4대 담임이었던 홍승하는 후에 신민회를 조직한다. *케이블(E. M. Cable), 손승용(제5대 담임), 이용주

합일초등학교

강화중앙교회는 교육선교를 위해 1901년 4월에 신교육 기관인 교회부설로 “잠두의숙(蠶頭義塾)”을 설립하였으며, 1902년에 또 여학교인 “합일여학교”를 설립하여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둔 민중교육을 시작하였다. 이후 두 학교는 하나의 학교로 통합되었는데, 오늘의 합일초등학교로 발전되었다. 이 학교는 일제치하에 저항하는 민족운동과 한국 개화의 산실이 되어 왔다. 강화중앙교회는 복음, 민족, 교회가 함께 어우러지며 발전하는 민족과 지역을 구원한 구심점이다. 강화진위대장 출신 이동휘(李東輝)권사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의 보창학교, 유경근 속장(독립운동가)의 교회지도자와 강화중앙교회가 함께 추진한 민족교육운동은 민중계몽과 독립사상으로 이어졌다.

합일(합일)이라는 단어에서 개신교와 양명학의 접합을 떠올릴 수 있다.

특징

일(一)자, 신(信)자돌림

검은 옷

하와이 이민

존스 김우제 홍승하 해외 농업이민 해외 독립 자금

독립운동가

성재 이동휘 조봉암 홍승하 김우제


관련 사이트

참고문헌

『강화중앙교회100년사』이은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