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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16일 (일) 15:03 판







개요

강릉시 저동, 운정동, 초당동의 경포호수 북쪽에 위치한 누각으로, 경포대해수욕장과 가까운 곳에 있다. 아름드리 소나무 숲과 어우러진 경포호수를 내려다보는 위치인데, 경포대해수욕장을 찾는 사람은 많아도 경포대를 찾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경포대는 1326년(충숙왕 13) 강원도안렴사였던 박숙이 신라의 사선(四仙)이 놀았다던 방해정 뒷산 인월사 터에 세웠다가 그 뒤 1508년(중종 3)에 강릉부사 한급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전해진다. [1] 이 건물은 익공계양식에 팔작지붕으로 건축된 누대이다. 이곳에서 볼 수 있는 경포8경(녹두일출, 죽도명월, 강문어화, 초당취연, 홍장야우, 증봉낙조, 환선취적, 한송모종) 및 경포월삼(월주, 월탑, 월파)은 천하의 장관이다. 인용 오류: <ref> 태그를 닫는 </ref> 태그가 없습니다


자장의 영향으로 인해 오대산은 문수보살을 모시는 문수신앙의 성지로 시작했다. 하지만 이후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면 오대산은 문수보살 뿐만아니라 다양한 불보살이 상주한다는 5만보살신앙으로 발전한다. 오대산의 다섯 봉우리는 중앙의 문수보살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는 각각 관음보살(동), 지장보살(서), 대세지보살(남), 미륵보살(북) 1만 분씩 상주하는 성지로 거듭난 것이다. [2] 하지만 이때까지도 움막으로 기록되고 있던 월정사가 어엿한 사찰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신의가 이곳에 법당을 세우면서부터다. 이 시기를 전후로 월정사는 오대산 신앙의 새로운 중심지로 떠오르게 된다.

고려시대

고려전기, 월정사는 창건 이래 최대 흥성기를 맞이했다. 사실 그 이전까지도 사찰로서 월정사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고려 초, 선종의 아홉 갈래 승려집단을 일컫는 구산선문 중 강릉의 사굴산문이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월정사 또한 그 세력권에 포함되어 함께 발전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흥한 것도 잠시, 몽고의 침입 이후 다시 사세가 심하게 기울었다.[3] 이후 1377년(충렬왕 33)에는 절이 화재로 전소되었고, 다시 이일 스님이 중창하여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정책 때문에 불교가 전반적으로 쇠퇴했지만, 오대산 불교는 몇 가지 계기를 통해 어려움을 극복해나갔다. 첫번째는 조선 초기에 활약한 나옹의 문도들이 대거 오대산에 머무르면서 상원사와 월정사를 비롯한 오대산 불교권 전체가 주목을 받았던 것이다. 두번째는 조선의 6대왕 세조가 이곳에서 기도하던 중 불치의 병을 고치고, 이후 상원사를 중창하는데 적극적인 후원을 했기 때문이다.[4] 세번째는 16세기 말 쇠락했던 사찰을 사명대사가 중창하고,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왕실의 외사고(外史庫)가 이곳에 건립된 것이다. 이러한 여러 사건들은 억불정책 속에서도 월정사가 오히려 사세를 더욱 키워나갈 수 있도록 했다.

해방이후

해방 전후로는 당시 조계종의 최고 지도자를 4번이나 역임했던 한암이 오대산에 머무르면서, 상원사와 월정사는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사찰로서 위상을 확립하게 된다. [5] 하지만 곧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1951년 1.4후퇴 때 사찰 대부분이 불타버렸지만, 이후에 탄허, 만화, 현해 등에 의해 다시 중건되어 월정사의 명맥은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2017년 현재 월정사의 주지는 정념스님이다.

지리

평창 월정사가 위치한 오대산은 태백산맥의 한줄기로서 비로봉, 호령봉, 상왕봉, 두로봉, 동대산 등 다섯 봉우리가 오목하게 원을 그리며 누대를 이루고 있는 까닭에 붙여진 명칭이다. 즉, 오대산은 어느 하나의 봉우리를 지칭한다기보다는 다섯 봉우리를 아우르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이 봉우리에는 각각 중대(적멸보궁), 북대(미륵암), 서대(수정암), 동대(관음암), 남대(지장암)의 다섯 암자가 있다. [6] 오대산은 자장이 월정사를 개창한 이래 불교신앙의 성산으로 추앙되어 왔다. 일찍이 고려시대부터 오대산은 "나라 안의 명산 중에서도 이곳이 가장 좋은 곳이니 불법이 길이 번창할 곳이다."(《삼국유사》「대산월정사 오류성중」) 라는 말이 있었다.[7] 또한 옛 사람들은 오대산을 '삼재가 들지 않는 명당 터'라 여기기도 했고 '어떤 재앙이 닥쳐도 안전한 땅'이라고 믿었다. [8]

그런데 사실 오대산은 중국 산서성 북동부에 있는 청량산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청량산 또한 동서남북중의 다섯 봉우리가 누대를 이루고 있어 오대산이라고 부르며, 예로부터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불교 성지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이곳은 문수보살이 머무는 곳으로 알려져있고, 월정사를 최초 창건한 자장이 신라로 돌아오기 이전에 문수보살을 만난 곳도 바로 이곳이다. 중국의 오대산인 청량산에서 문수보살을 만나고 다시 신라의 오대산으로 돌아와 문수보살을 친견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월정사가 세워졌으니 이는 매우 의미있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9]

오대산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산림지대로 동식물상이 다양하고 풍부하며, 1975년에는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월정사로부터 상원사로 이어지는 10km의 계곡은 5백년 된 전나무들과 고산식물, 잡목들로 우거진 숲으로 수려하고 웅장한 경관을 자랑한다.


관련 인물

경내 문화재

가상현실

참고문헌

이도흠, 『오대산 월정사 이야기』, 민족사, 2013

주석

  1. "[1]" 관동제일루 경포대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8 : 강원도, 2012. 10. 5., 다음생각),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인용.
  2. "월정사소개" 『오대산 월정사 홈페이지』
  3. "월정사 역사와문화-5" 『원행스님』,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 문수성지 오대산 월정사, 작성일: 2014년 2월 5일
  4. "오대산의 월정사" 신정일,『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9: 우리산하』, 다음생각, 2012, 온라인참조: 네이버 지식백과
  5. "월정사소개" 『오대산 월정사 홈페이지』
  6. "오대산의 다섯 봉우리와 암자" 한국문화유산답사회,『답사여행의 길잡이3 - 동해,설악』, 2011, 온라인참조: 네이버 지식백과
  7. "월정사 역사와문화-1" 『원행스님』,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 문수성지 오대산 월정사, 2014년 2월 3일 작성
  8. "오대산의 월정사"신정일,『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9: 우리산하』, 다음생각, 2012, 온라인참조: 네이버 지식백과
  9. "월정사 역사와문화-1" 『원행스님』,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 문수성지 오대산 월정사, 작성일: 2014년 2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