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산 4보루 ‘後部都○兄’명 토기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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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아차산 4보루 ‘後部都○兄’명 토기편에서 후부(後部)는 당시 5부로 나눈 고구려 수도 행정구역 중 하나로, 이는 고구려한강 이남에서 단순히 치고 빠지기 식의 군사 점령이 아닌 행정 지배를 시도한 사실을 알려준다.

'○兄'에 대해서는 고구려에서‘兄’이 관등을 지칭할 때 사용된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관직명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아차산 4보루에서 함께 발견된 명문 토기편들의 ‘支都兄(지도형)’‘冉牟兄(염모형)’의 관직명은 확인된 바 없으므로, 兄은 현대의 씨(氏)처럼 고구려 특유의 존칭어구로 추정된다. 이는 고구려의 언어 습관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아차산 4보루 ‘後部都○兄’명 토기편평양성 석각

아차산 4보루 보다 다소 늦은 시기의 것이지만 병술년(566)의 평양성 석각에서 이와 같은 용례가 보인다.

丙戌十二月中漢城下後卩小兄文達節自此西北行步之
병술년 12월에 한성 하후부의 소형 문달이 여기서부터 서북방향을 걸쳤다(걸쳐 축성하였다).

두 유물의 시차가 크지 않은 점과 한강유역의 한성이 551년 이후 황해도 신원지방으로 옮겨진 것을 고려한다면 아차산 4보루의 '후부'도 한성의 '후부'로 해석할 수 있다. 이로 보아 당시 한강유역이 도성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몇 개의 구역으로 구분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小兄'은 고구려 관직명으로, 일명 ‘실지(失支)’라고도 한다. 고구려 후기의 14관등 가운데 제 11위의 관등이며, 중국의 정7품직에 비정된다.

지도

클래스

  • 사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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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주석

  1. 아래 사진출처: '아홉달 애태운 접시 반쪽 찾은 날 ‘기쁨의 회식’' 동아닷컴, 2016년 5월 26일 기사
  2. 사진출처: 앞의 기사

참고

  • 최종택, <아차산 보루와 고구려 남진경영>, 서경문화사, 2013년.

기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