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극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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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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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극로 |
출생 | 1893~1978 |
성별 | 남성 |
직업 | 국어학자, 정치인 |
경력 | 조선어사전 편찬 집행위원, 한글맞춤법 제정위원,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 조선어사전 편찬 전임위원, 조선어학회 간사장, 건민회 위원장, 무임소상,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과학원 후보원사, 과학원 조선어 및 조선문학 연구소장, 조국전선 중앙위 의장,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1] |
목차
정의
조선의 국어학자이자 북한의 정치인
내용
인물정보
- 이극로는 어문학자로서 일제 치하에서 민족 어문운동을 주도하여 한글 보급과 민족 정신 고취를 위해 일생을 바쳤다.
- 이극로는 경상남도 의령군 지정면 두곡리 출신으로 글을 배울 가정형편이 못되어 어릴적에 주경야독으로 공부하다가 한말 국가 위기 상황에서 국권회복과 실력양성을 위해 신문물 수용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고향을 떠나 마산의 창신학교에 입학했다.
- 1912년 4월 고국을 떠나 서[1]로 망명길에 올랐다. 1912년 중국 동북지방 내도산의 독립군 부대 훈련도감, 무송의 백산 학교와 환인현의 동창 학교에서 교육하였다. 이 여정에서 한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값진 경험을 하게 되었다.
- 이극로는 1922년 4월 베를린 대학 철학부에 입학하여 5년간 정치학과 경제학을 주과로 삼고, 철학과 인류학을 부과로 하여 폭넓은 영역의 학문을 두루 섭렵하였다.
- 이극로는 대한민국의 안과의사인 공병우의 세벌식과도 약간 관련이 있는데, 이극로가 눈병으로 공병우가 운영하는 병원에 찾아왔었다고 한다. 여기서 공병우는 한글학자 이극로에 대한 열정에 자극을 받아 공병우는 본격적으로 한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3]
- 사후에 조국통일상과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다. 한국에서는 그가 '월북자'였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학계 관심이 멀어졌었다. 그러나, 최근 이극로가 1920년대 독일에서 유학했을 시절 한글을 보급했다는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다시 재조명을 받아 주목받고 있다. [4]
한글연구활동
- 이극로는 독일 유학시절 베를린대학에 조선어 강좌를 개설하여 강사로 재직하면서 한글 사전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 빈곤한 생활을 했음에도 유학생활로 배움을 거듭하여 조선어학회에서 큰 일을 해낼 수 있었던 뒤엔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선생(1885-1943)의 도움이 있었다.
- 이극로는 귀국하여 한글 연구와 보급을 통한 민족의식의 고취를 추구하는 조선어 연구회에 가입하였다.조선어학회는 어문 운동의 첫 결실로서 1933년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제정 발표하고 1936년에는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완성하였다.
- 이극로는 해방 뒤 출옥 후 조선어학회를 재건, 조선말 교과서 편찬, 국어 강습회 조직 등의 사업을 적극 추진하였다.
조선어학회사건
- 1942년 10월에 일제는 이극로를 비롯한 최현배, 이윤재, 장지영, 권덕규, 김윤경, 이병기, 이만규 등 조선어학회 주요인사들을 대거 체포하였다. 이극로는 6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해방을 맞아 함흥 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7]
정치인 이극로
- 1948년 4월 남한만의 단독선거 실시에 반대하여 이극로는 김구, 김규식, 김원봉 등과 통일 민족국가 건설을 위한 남북 제(諸)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 [남북 협상]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 협상이 실패하자 홍명희 등과 함께 북한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극로는 1974년까지 조선 통일 민주주의 민족전선 의장단으로 활동하였다. [8]
- 이극로는 '좌익'계열 인물이 아닌 중도우파 성향의 노선을 견지했던 한글학자였다.'는 시각도 있다.[9]
어록
"이리 뛰고 저리 뛰나 단돈 몇 푼 주는 이 없다.
나의 집에도 재산이라고는 무엇이 있겠는가. 생각하던 끝에 모스크바에서 리동휘가 기념으로 준 망원경과 사진기가 있었는데 그것을 한 벌의 양복과 함께 안국동 환정 왜놈 전당포에 가져다 잡히고 10원의 돈을 구하여 그 달은 기근을 면하게 되었다.
또 새날이 온다.
몇 벌 안 되는 옷들이 전당포에 들어갔다왔다 하기를 몇 차례 거듭하였더니 나중에는 옷 찾을 돈마저 없어 전당포에 아주 들어가고 말았다. 또 그 밖의 재산으로는 내가 결혼 당시에 형님들이 해주신 금반지, 비녀, 금귀이개가 있었다. 나는 차마 입 밖에 내기 어려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안 되게 되었다. 하루는 안해(아내)에게 '사업에서 대단히 재정 곤란을 가져와 회원들이 굶고 있으니 그 물건을 팔면 1백∼2백 원은 될 것이다, 일시적이나마 이 위국을 면케 해주어야지 어떻게 하겠는가, 내가 지금하는 사업이 성공만 하면 당신 열손가락에 금반지, 보석반지를 다 끼워주겠다'고 우스운 말을 하면서 면구스러운 마음을 감추려고 하기까지 하였다. 안해는 서슴없이 그의 언니에게 부탁하여 팔게 되니 돈 250원이 되었다. 그럭저럭 그 해도 지나갔다."
- 이극로 자서전 中 조선어편찬회 재정악화 당시의 기록 -[10] |
멀티미디어
이미지
▲이극로 선생 가족사진(부인 김공순 여사와 자녀들,1939년) [11]
▲국립한글박물관, 이극로 관련 영상 [12]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