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노동청년회
해설
1958년에 설립된 가톨릭 노동청년단체로 1958년 1월 서울대학교부속병원 간호원 10명이, 1925년 벨기에에서 창립된 ‘가톨릭노동청년회(JOC)’에 관한 책자를 연구하다가 당시 가톨릭신학대학 교수인 박성종(朴成鍾)을 지도신부로 하여 회합을 갖게 된 데서 출발하였다. 그 뒤 가톨릭노동청년회의 창설자인 조셉 카르뎅 주교가 내한하여 그해 11월 17일 명동성당에서 주교 집전 아래 9명의 투사가 선서식과 미사를 봉헌함으로써 정식으로 발족하였다. 이어 그 투사들은 정식으로 팀을 조직하고 각 본당과 직장조직을 확장하기 시작하여 이를 바탕으로 1960년에 서울교구연합회가 결성되었다. 1961년부터는 점차 지방교구로 확산되어 10월 21일 전국평의회가 조직되었다. 같은 해 11월 2일에는 한국천주교 주교회의에서 가톨릭평신도단체로 정식 인준을 받는 한편, 국제가톨릭노동청년회에도 정식으로 가입하였다.
활동
이 청년회의 초기 활동은 빈민촌 무료진료, 윤락여성 선도, 서독파견 간호원과 광부들을 위한 활동, 가정부 생활실태조사 등이 주였다. 그 뒤 1960, 1970년대에 이르러 산업화와 함께 급증한 근로청년들을 활동대상으로 하여 각 산업체의 노동조합 결성, 임금인상 등 처우개선활동, 노동 강좌, 직업여성실태조사 등 노동자들의 인권신장과 복지향상을 위한 활동이 중심이 되었다.전국 조직으로 확산된 가노청 회원들은 교육, 심포지엄, 봉사활동, 노동운동, 현장 실태조사 등 노동권 신장을 위한 전방위적 활동을 펼쳤다. 김 추기경은 강연을 열어 노동문제를 인간의 문제로 바라볼 것을 알리고, 부당한 처우를 받는 노동자들을 적극 보호해줬다.
심도직물 사건
그 와중에서 청년회는 1968년의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 1970년의 전태일 분신사건 등을 겪게 되었고, 그 활동은 경제 투쟁 중심, 인권 운동의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면서 정부의 탄압으로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위기는 1980년대 초까지 계속되었다. 그러자 일부 노동자 회원들은 공단지역으로 들어가 실질적인 프로그램을 실시해 나갔다. 또한 진취적인 회원들은 가톨릭노동사목연구소를 창립하여 노동법 개정, 현장 실태조사, 노동자의 권익문제 등에 뛰어들었다. 이어 1987년에 가톨릭노동사목전국협의회가 결성되고, 청년회의 활동은 대외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단결을 유지하면서 자주·민주·통일 운동까지 지향하게 되었다.
김수환 추기경
김수환 추기경은 가톨릭 노동청년회와 인연이 깊다. 김 추기경은 이듬해 발생한 ‘강화 심도직물 사건’ 현장을 직접 방문했다. 강화도의 방직공장인 심도직물 노동자들이 ‘공장 걸레’로 불리며 착취를 당하다가, 가노청 회원들을 중심으로 조합을 결성해 저항하다 해고당한 터였다. 김 추기경은 곧장 임시 주교회의를 열어 한국 주교단 명의로 공동 성명을 발표했고, 복직을 이끌어냈다. 이는 사회문제를 향한 한국 주교단의 첫 공동성명이었고, 노동권 가치를 알린 첫 성과의 중심에 김 추기경이 있었다. 1968년 가노청 제4대 전국 여성회장을 지낸 윤순녀(수산나)씨는 “추기경님은 가노청 담당 사제들을 중심으로 노동사목 기구를 설치토록 하는 등 노동사목의 초석을 놓고, 노동자들과 함께하셨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