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고려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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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고려가 몽골군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고종 19년(1232)에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1234년(고종19)에 세운 궁궐과 관아건물이다.

정궁 이외에도 행궁·이궁·가궐을 비롯하여 많은 궁궐이 있었다. 정문은 승평문이었고 양쪽에 삼층루의 문이 두 개가 있었으며 동쪽에 광화문이 있었다. 39년동안 사용되었고 1270년 강화조약이 맺어져 다시 수도를 옮기면서 허물어졌다. 조선시대에도 전쟁이 일어나면 강화도를 피난지로 정했다. 조선 인조 9년에 옛 고려 궁터에 행궁을 지었으나 병자호란 때 청군에게 함락되었다. 그후 다시 강화유수부의 건물을 지었으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거의 불타 없어져 지금은 동헌과 이방청만이 남아있다.

이 곳은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에 저항한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과 국난 극복의 역사적 교훈을 안겨주는 곳이다. [1]

Goryeo Palace Site, Ganghwa

Goryeo Palace Site, Ganghwa is a palace and a building site built by Goryeo in 1234, after moving the capital to Ganghwa Island in the 19th year of King Gojong's reign (1232).

Besides the palace, there were many other palaces, including Haenggung, Yigung, and Gagung. The main gate was Seungpyeongmun, with two doors on each side of the third floor and Gwanghwamun Gate on the east. It was used for 39 years and was torn down in 1270, when a peace treaty was signed and the capital was relocated again. During the Joseon Dynasty, Ganghwa Island was designated as a refuge in the event of war. In the ninth year of King Injo's reign, Haenggung was built in the old Goryeo court, but it was taken over by the Qing army during the war. After that, the building of Ganghwa Yudubu Department was built again, but only Dong-heon and Yi Bang-cheong were burned down by the French military during the Byung-in Yang-yo period.

It is a place that offers historical lessons for the Korean people's self-reliance spirit and overcoming national difficulties, which have resisted constant foreign invasion.


구조

고려 궁정의 건물로는 본궁인 연경궁(延慶宮), 그 북동쪽 언덕에 강안전(康安殿), 소동문을 들어가 성마루터 북쪽에 경령궁(景靈宮), 옥림리 자문고개 서쪽에 건덕전(乾德殿), 그 동쪽에 장녕전(長寧殿), 뒤쪽에 만녕전(萬寧殿), 그리고 북창문 밖의 대묘동에 태묘전각(太廟殿閣)으로 대관전(大觀殿)과 신격전(神格殿)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모두 없어졌고, 이 밖에 이궁(離宮)과 가궐(假闕)도 곳곳에 세웠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그 규모가 방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2]

현재 강화 고려궁지라고 부르는 곳이 정궁(正宮)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되며 비록 규모는 작았으나 궁궐을 송도의 궁궐과 비슷하게 만들고 궁궐의 뒷산 이름도 송악(松岳)이라 하였다. 궁의 정문 이름은 승평문(昇平門)이었고, 양측에 삼층루의 문이 두개가 있었으며 동쪽에 광화문(廣化門)이 있었다. 강화 고려궁은 1270년(원종 11)에 고려가 개경으로 환도할 때 모두 허물어졌다.

조선시대에 들어 1631년(인조 9)에 고려궁지에 행궁을 건립하여 국난시 이용하고자 하였다. 또한 강화유수부, 외규장각, 장녕전(萬寧殿), 만녕전(萬寧殿) 등을 세웠으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하여 거의 소실되었다. 현재 조선시대 관아 건물인 명위헌(明威軒), 이방청(吏房廳) 등과 복원된 외규장각이 남아 있다. [3]


특징 및 의의

현재 강화 고려궁지라는 이름으로 문화재 지정이 되어 있으나, 실제 고려 궁궐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고 조선시대 관아 건물 몇 채만이 잔존해 있으며 복원된 외규장각이 있을 뿐이다.

비록 국난을 피하여 천도를 한 시기이기는 하지만 고려시대 정궁이 있던 자리로 의미가 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관아 건물 등으로 사용되며 지방 통치에 이용된 장소이고 정조가 추진했던 개혁의 일환이었던 외규장각이 건립된 곳이기도 하다.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치며 외침으로 인한 국난을 극복하고자 했던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한편 강화 고려궁지의 위치와 범위에 대하여 많은 논의가 있었고, 현재도 논의가 진행 중이다. [4]


사진


위치


참고영상

조선최초 여성명창 진채선

전주 MBC (2014.10.26)

도리화가

신재효와 진채선을 모델로 한 조선 최초의 여성명창의 이야기

관련 사이트

출처

  1.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5_2_1_0&ccbaCpno=1332301330000
  2.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057436&cid=40942&categoryId=33537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고려궁지&ridx=0&tot=3300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고려궁지&ridx=0&tot=3300

기여

일자 역할 이름 전공
2019.4. 정리 손형남 인문정보학
2019.4. 편집 손형남 인문정보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