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성보
강화 광성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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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 번호 | 사적 제227호 |
지정일 | 1971년 12월 29일 |
지정 명칭 | 강화 광성보 |
한자 명칭 | 江華 廣城堡 |
영문 명칭 | Gwangseongbo Fort, Ganghwa |
분류 | 유적건조물/정치국방/성/성곽시설 |
건립·제작 | 1658(Hyojong 9) |
주소 |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해안동로 466번길27 (구 덕성리 833) |
위도 | 37.665267 |
경도 | 126.530094 |
웹사이트 |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5_2_1_0&ccbaCpno=1332302270000# |
개관
광성보는 덕진진, 초지진, 용해진, 문수산성 등과 더불어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이다.
고려가 몽고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로 도읍을 옮기면서 1233년부터 1270년까지 강화외성을 쌓았는데, 이 성은 흙과 돌을 섞어서 쌓은 성으로 바다길을 따라 길게 만들어졌다. 광해군 때 다시 고쳐 쌓은 후 효종 9년(1658)에 광성보가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숙종 때 일부를 돌로 고쳐서 쌓았으며, 용두돈대, 오두돈대, 화도돈대, 광성돈대 등 소속 돈대가 만들어 졌다.
영조 21년(1745)에 성을 고쳐 쌓으면서 성문을 만들었는데 ‘안해루’라 하였다. 이곳은 1871년의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열세한 무기로 용감히 싸우다가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순국하였으며 문의 누각과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이 파괴되었다.
1976년 다시 복원하였으며, 광성보 경내에는 신미양요 때 순국한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와 신미순의총 및 전적지를 수리하고 세운 강화전적지, 수리한 것을 기록한 비석 등이 건립되었다.
In 1618 in the 10th year of the Gwanghaegun of the Joseon Dynasty, it was renovated and installed Gwangseongbo in 1656. it’s Dondae was bulit in 1679. Dondae of Odu, Hwado, Gwangseong and Odujeong artillery unit was belonged to it. It was rebuilt as a complete stone fortress in 1745 and the gate was also installed. Gwangseongbo was the fiercest battle of the time. On April 24, 1871, when U.S. Rogers led a fleet of 1,230 troops to invade upon demand for commerce, after the landing force occupied Chojijin and Deokjinjin, they deploy hand-to-hand fight in Gwangseongbo. After this battle, Anhaeru, Gwangseongdon, Son Dolmok, Youngudon, and the tomb of General Eo Jae yeon who died in the war were all repaired and contructed on the site of the site purificatiion. Gwangseongbo is currently designated as Historic Site.
건축 양식
건물 형태는 남북 방향의 5칸 건물에 동쪽으로 2칸을 덧붙여 뒤집힌 ㄱ자 형태를 이룬다. 내부는 통칸이며, 북서쪽 모서리에 있는 약 16.53㎡[약 5평]의 강단을 2단으로 꾸며 결과적으로 3층 구조를 취하고 있는데, 이는 한국 전래의 제단 구조이면서 동시에 ‘뜰, 성소, 지성소’로 이루어지는 성막의 3중 구조를 상징하고 있다. 강단 뒤쪽에는 목사들이 드나들던 조그마한 쪽문이 있다. 이 문을 지나려면 자연스럽게 몸을 숙여야 하는데, 목회자들은 이 문을 드나들면서 겸손을 배웠다고 한다.
신도석은 강단 오른쪽에 남자석, 왼쪽에 여자석으로 분리되어 있다. 이 같은 구조는 한국 초기 교회 건축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형태로 건물을 ㄱ자형으로 설계하여 남녀가 떨어져 앉아 예배를 볼 수 있게 함으로써 남녀가 유별했던 당시의 정서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방안이었다. 처음에는 남녀가 서로 바라보지 못하게 커튼을 드리웠으나 시대의 변천에 따라 1940년대에 거두었다고 한다.
금산교회는 한국 기독교 초창기 ㄱ자형 교회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전통 건축 양식과 서양식 교회의 특징을 조화롭게 결합시켜 초기 교회 건축의 한국적 토착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건물로, 건물 각 구조물의 보존 상태가 좋아 1997년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36호로 지정되었다.[2]
역사
1905년 전주에서 온 선교사 최의덕이 조덕삼·이자익·박희서 등을 전도하여 처음 조덕삼의 집 사랑채에서 예배를 드렸다. 이후 신도가 늘어나면서 1908년 4월 4일, 이씨 문중의 재실을 뜯어 지금의 자리에 옮겨 헌당식을 올렸다. 현재 금산교회 옆에 새로 지은 교회 본당과 사택은 1988년에 들어선 것이다.
2010년 현재 금산교회는 교회의 안쪽에 새로 지은 붉은 벽돌을 이용한 신식 건물에서 예배나 행사 등을 실시하고 있다
금산교회는 보수 기독교의 성장 지상주의와 배타적 신앙 활동에 대한 경계와 함께 반상(班常)과 빈부의 격차를 뛰어넘은 초기 기독교 정신의 산증인으로 현재까지도 한국 교회의 귀감이 되고 있다. [3]
사진[4]
지도
관련 사이트
- 문화재청 (http://www.cha.go.kr/)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http://www.grandculture.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