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보
인물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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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
출생 | |
국적 | |
직업 | 시인 |
데뷔 |
목차
요약
분류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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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712년 |
출생지 | 당나라 허난성 |
사망 | 770년(58세) |
직업 | 시인 |
활동기간 | 731년 ~ 770년 |
장르 | 시문학 |
두보 소개
두보(중국어 정체자: 杜甫, 병음: Dù Fǔ 두푸[*], 712년 ~ 770년)는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이다.
자는 자미(子美) 호는 소릉야로(少陵野老). 중국 고대 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시성(詩聖)이라 부르며, 그의 작품은 시사(詩史)라 부른다.
이백과 함께 이두(李杜)라고도 일컬으며, 그 당시 정의가 없는 경제구조로 고통받는 민중들의 고단한 삶을 시로 묘사한 민중시인이다.
두보의 생애
두보의 집안
두보는 경조(京兆) 두씨라는 북방의 큰 집안 출신이며, 두예의 13대손이다. 자는 자미(子美)이고, 호는 소릉야노(少陵野老)이다.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난 두보의 본적은 후베이성 샹양(襄陽)이며, 증조부 때 허난성 궁(鞏)현 동북으로 이주했다.
당나라 때의 같은 성을 가진 두목과 함께 진(晉)나라 때 유명한 학자 두예의 후손이지만 후에 집안의 촌수는 멀어졌다.
두보는 두예의 둘째아들 두탐(杜耽)의 후손이고 두목은 두예의 막내아들 두윤(杜尹) 쪽이기 때문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초당 시기의 시인 두심언이다.
두보의 청소년기 여행 & 과거 낙제
두보의 청소년 시기는 좋은 집안 환경 때문에 풍족하고 안정되어 있었다. 일곱 살 때 벌써 시를 지을 정도로 재능도 뛰어났고 자신감도 대단했다.
19세부터는 약 4년에 걸쳐 각지를 여행했다. 당시 두보의 부친이 산둥성 옌저우(兗州)에서 사마 직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두보는 부친을 방문하는 것을 기회로 제나라 · 조(趙)나라 지역을 여행할 수 있었다.
여행에서 돌아와 23세 때 고향에서 향공2)에 응시했고, 24세 때는 허난성 뤄양으로 가서 진사에 응시했으나 모두 낙방했다.
이백 과 두보의 첫 만남
그가 33세 되던 해에(744년) 두보는 뤄양에서 당나라 때 저명한 현실주의 시인 이백을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바로 의기투합하여 함께 양 · 송 일대(현 허난성 카이펑, 상추 일대)를 여행한다.
이후 두보는 다시 제주(齊州, 지금의 산둥성 지난)로 건너갔다가 4년 뒤 옌저우로 가서 이백과 다시 만나 함께 술을 마시고, 신선을 찾아다니고 시와 문장에 관해 대화를 나누게 된다.
그렇게 이백과 둘도 없는 친구가 된 두보는 이백과 아쉽게 헤어진 뒤에도 몇 년에 걸친 방랑생활을 마치고 장안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두보는 이백과 더불어 ‘이두(李杜)’로 불려지며, 이상은과 두목을 ‘소이두(小李杜)’라고 하고, 두보와 이백을 ‘대이두(大李杜)’라고 구별한다. 두보는 ‘노두(老杜)’라고도 불린다.
두보의 벼슬길
명문가 출신에 남다른 재능의 소유자였던 두보는 젊은 날 자신의 인생에 대한 강렬한 자부심이 있었고 포부가 남달랐다.
또 힘들게 사는 백성들의 모습을 보면서 요 · 순 시대를 갈망하는 정치적 이상도 품었다. 현실 정치의 문제와 추악한 면도 실감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자신의 뜻을 펼쳐 보고도 싶었다. 그러나 현종의 통치는 후반기로 갈수록 부패에 찌들었고 두보의 생활도 실망과 빈곤으로 치달았다.
현종의 조서에 따라 그도 장안(현, 시안(西安))에서 과거에 응시했으나 당시의 권신 이임보의 농간으로 시험에 참가한 응시자 모두가 낙방했고, 과거길이 막힌 두보는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하는 수 없이 권문세족의 집안을 전전하며 글을 써주곤 했으나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그의 장안 생활은 곤궁하기 짝이 없었다.
그 뒤 현종에게 올린 <대례부(大禮賦)>란 글이 현종의 눈에 들어 조정에 나갈 기회를 잡았으나 역시 이임보 때문에 관직을 얻지 못했다.
두보가 44세 되던 무렵에 겨우 말단 관리직을 받았으나 그때 어린 아들이 굶어 죽는 참극이 일어나 두보의 일생에 큰 상처를 남겼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터진 안사의 난은 두보를 더욱 더 곤경에 몰아넣었다.
안사의 난 과 두보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자 현종은 장안을 버리고 황급히 도망쳤다.
태자 이형이 간신히 상황을 수습하고 현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니 이가 숙종이다.
이때 두보는 집을 옮겨 난을 피했다가 숙종의 즉위 소식을 듣고 혼자 숙종이 거처하고 있는 영무(靈武, 지금의 닝샤후이족 자치구 링우시)로 가다가 반란군에게 포로로 잡혀 장안으로 압송되었다.
당시 함께 포로로 잡힌 왕유와 달리 말단 관리에 불과했던 두보는 감옥에 갇히지는 않았지만, 여러 고난을 겪으며 나라와 백성에 대한 근심을 시로 표출했다.
그가 46세 되던 해인 757년, 정부군을 이끄는 곽자의가 장안 북쪽으로 진격하자 두보는 장안을 빠져나가 마침내 숙종에게 몸을 맡길 수 있었다.
숙종은 두보에게 좌습유(左拾遺)라는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재상 방관의 석방을 건의했다가 숙종의 심기를 건드린 탓에 화주로 쫓겨나 허드렛일을 맡았다.
화주에 온 두보는 고뇌에 시달렸다. 이 무렵 지은 시는 실의에 빠진 자신의 처지, 싸늘한 세대, 간신배들에 대한 울분 등으로 가득 차 있다.
방관은 재상 장호(張鎬)가 힘을 써서 구하기는 했지만 한번 돌아선 숙종의 마음은 돌이킬 수 없었다. 숙종은 그 뒤 다시는 두보를 찾지 않았다.
=두보의 유랑생활 & 일시 정착
47세 되던 해인 758년, 두보가 화주를 떠나 뤄양과 허난성 등지를 떠돌던 중 업성에서 당나라 군대가 반란군에 대패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두보는 뤄양에서 화주로 돌아오던 중 전란의 고통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삼리(三吏)>와 <삼별(三別)>로 불리는 유명한 역사시 세 편을 남긴다.
바로 ‘신안리(新安吏)’, ‘석호리(石壕吏)’, ‘동관리(潼關吏)’의 ‘삼리’와 ‘신혼별(新婚别)’, ‘수노별(垂老别)’, ‘무가별(舞家别)’의 ‘삼별’이 그것이다.
759년에는 화주와 관중 지역에 큰 가뭄이 들었다. 가뜩이나 힘든 백성들의 삶이 더욱 고통스러워졌다.
두보는 가망이 보이지 않는 벼슬을 내던지고 서쪽 간쑤성 일대로 갔다가 각지를 전전한 끝에 마침내 청두(成都)에 이르렀다.
여기서 두보는 당시 청두 절도사로 있던 엄무 등의 도움을 받아 성 서쪽 완화계 옆에 초당을 짓고 생활하게 되었다. 이곳이 바로 훗날 ‘두보초당’ 또는 ‘완화초당’으로 불린 곳이다.
두보는 엄무의 추천으로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이란 벼슬을 받고 엄무의 참모가 되었다.
하지만 두보는 이 벼슬을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사직했다. 이 기간 동안 두보의 생활이 보기에는 나아진 것 같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비바람에 초당이 쓰러지고 가족이 굶주리는 등 힘든 생활은 여전했다.
두보의 죽음
엄무가 죽자 두보는 청두를 떠나 각지를 전전했다. 기주(夔州, 지금의 쓰촨성 펑제(奉節)현) 도독 백무림(柏茂林)의 보살핌으로 잠시 농사를 지으며 안정된 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 무렵 두보의 일생에서 가장 많은 작품이 창작되었는데 2년 안에 430여 수의 시를 지었다.
57세 때인 768년, 두보는 향수 때문에 배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여정을 시작했다.
후난성 웨양(岳陽)을 거쳐 담주(潭州, 지금의 후난성 상탄(湘潭)시)에서 다시 형주(衡州, 지금의 후난성 형양(衡陽)시 일대)로 갔다가 다시 담주로 돌아왔다.
59세 때인 770년, 담주에 난이 일어나자 두보는 다시 형주로 가서 외삼촌에게 몸을 맡기려 했으나 강물이 불어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굶주렸다.
두보는 생각을 바꾸어 다시 담주로 돌아오려다가 담주에서 웨양으로 가는 작은 쪽배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두보의 죽음에 관해서는 역대로 많은 설들이 있었다. 병사를 비롯하여 처형, 투신자살, 식중독사 등이 있으나 병사로 보는 설이 우세한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