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오버워치)
국가 소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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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호 | 아메리카 합중국 United States of America |
수도 | 워싱턴 D.C. |
인구 | 326,474,013명(2017년) |
정치 체제 | 연방국가제, 공화제, 대통령제, 양당제, 양원제. |
면적 | 9,826,675 km2 |
언어 | 영어 |
목차
지도
자연환경과 기후
미국 본토의 육지 면적은 약 7억7천만 헥타르다. 본토와 떨어진 알래스카는 미국에서 가장 넓은 주로, 면적이 1억5천만 헥타르다. 북아메리카 대륙 남서쪽으로 태평양 한 가운데에 자리한 군도인 하와이 주 면적은 1백6십만 헥타르를 겨우 넘는 정도다. 미국은 러시아와 캐나다 (또는 중국)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넓은 나라 3, 4위인데, 중국과 비슷한 수준이다. 미국과 중국의 면적 순위는 중국-인도간의 영토 분쟁 지역 및 미국 총 면적의 계산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미국의 면적을 놓고 CIA 월드 팩트북에서는 9,826,676 km2, 유엔 통계국에서는 9,629,091 km2, 브리태니커 사전에서는 9,522,055 km2으로 쓰고 있다. 육지 면적만 따지자면 미국은 러시아, 중국과 캐나다 다음인 4위이고, 오스트레일리아보다 약간 크다.
대서양의 해안 평원에서 내륙으로 가면 피드먼트의 낙엽수 삼림과 구릉 지대로 이어진다. 애팔래치아 산맥은 동부 연안과 오대호, 중서부를 가른다. 세계에서 네 번째로 긴 수계인 미시시피 강-미주리 강은 국토의 심장부를 남북으로 가로지른다. 평평하고 비옥한 대초원을 이루는 대평원은 남동부의 고원 지역까지 서쪽으로 뻗어있다. 대평원 서쪽 끝에 있는 로키 산맥은 국토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며, 콜로라도에서는 고도가 4,300m까지 높아지기도 한다. 더 서쪽으로 가면 로키 산맥의 대분지(그레이트베이슨)와 모하비 사막 등 사막이 있다. 시에라네바다 산맥과 캐스케이드 산맥은 태평양 연안과 가까이 뻗어있다. 알래스카에 있는 고도 6,194m의 매킨리 산은 미국과 북아메리카 전체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알래스카의 알렉산더 제도나 알류샨 제도, 하와이의 화산 등 활화산도 흔하다. 로키 산맥 옐로스톤 국립 공원 밑에 있는 초화산은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큰 화산체다.
광대한 영토에 다양한 지리 환경을 지닌 미국에서는 거의 모든 기후 형태를 찾아 볼 수 있다. 서경 100도선 동쪽으로는 기후대가 북쪽의 습윤 대륙성 기후에서 남쪽의 온대 습윤 기후에 이른다. 플로리다 남쪽 끝 지역은 하와이처럼 열대 기후이다. 서경 100도선 서쪽의 대평원 지역은 반건조 기후다. 서부 산맥 상당 지역은 고산 기후를 나타낸다. 남서부의 사막과 대분지의 기후는 건조하며, 캘리포니아 해안은 지중해성 기후가 나타나고, 오리건과 워싱턴 주 및 알래스카 남부는 서안 해양성 기후를 보인다. 알래스카 대부분은 아극 기후나 극기후다. 극단적인 기후 현상도 종종 일어나는데, 멕시코 만과 접한 주에는 허리케인이 곧잘 발생하며, 세계 토네이도의 대부분도 미국 내, 특히 중서부 토네이도 길목(Tornado Alley)에서 주로 일어난다.
미국의 생태는 최다 생물다양성 국가(megadiverse countries)로 여겨진다. 미국 본토와 알래스카에는 관다발식물 17,000여 종이 있으며, 하와이에서는 속씨식물 1,800 종 이상이 발견되는데, 이들 가운데 본토에서도 서식하는 종은 적은 수에 불과하다. 미국은 포유류 400종, 조류 750종, 파충류 및 양서류 500종 이상이 서식하는 땅이다. 곤충은 91,000종 이상이 서식한다고 한다. 1973년의 멸종 위기종 법안은 위기종과 취약종 및 이들의 서식지를 보호하는데, 미국 어류 및 야생생물 보호국에서 이들 서식지를 감시한다. 미국에는 58개의 국립 공원이 있으며, 그 밖에도 연방 차원에서 관리하는 공원, 숲, 야생 지역이 수백곳 있다. 미국 정부는 국토 육지 중 총 28.8%를 소유하고 있다. 이 가운데 대부분의 지역은 보호 구역이며, 일부 지역은 원유 및 가스 시추, 광산 채굴, 벌목, 목축을 위해 임차한 곳도 있으며, 군사 목적으로는 2.4%가 이용되고 있다. [1]
역사
고대
원주민들은 그들만의 고대 문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래로 신대륙에 왔던 유럽인들은 마야, 잉카, 모체, 톨텍, 올멕, 카호키아, 아스테카, 이로쿼이 같은 고대 문명에 놀라기도 했다고 한다.
북부와 남부 아메리카에서 발견된 문명의 잔재들은 기원전 10,000여 년이 지난 물건들이라고 한다.
15세기 경에는 옥수수가 멕시코에서 전파되어 미시시피 강 근처에서 널리 재배 되고, 감자는 잉카인들에 의해, 그리고 초콜릿은 아스테카인들에 의해 널리 채취되는 둥 여러 특산물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들만의 문화는 유럽인들이 그들의 대륙을 발견하면서부터 파괴되기 시작했으며, 더 이상의 문명 발달은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중세
현재 미국이 있는 대륙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아메리카는 유럽 국가들이 식민지로 삼기 전 오랜 기간 동안 미국 원주민의 땅이었던 곳이다.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학설은 여러 갈래여서 아직까지도 정확한 이동 경로는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약 3,000년 전 베링 육교를 건너 시베리아에서 알래스카를 통해 남북 아메리카 각지로 분산되어 갔고, 이러한 이주는 육교가물에 잠기는 마지막 빙기가 왔던 1만년 전까지 이어졌다고 알려져 있다.[3] 이들 몽고계 종족들은 15,000년 전 빙하기에 수위가 낮아져 다리처럼 연결되었던 베링 육교를 건너 알래스카로 이동한 뒤, 북아메리카 전역에 퍼져 살게 되었다는 설과 역시 몽고계 종족이 태평양을 항해했다는 설, 그리고 남태평양의 아시아계 종족들이 바다를 건너 남아메리카에 도착했다는 설 등이 있다, 바이킹족들도 기원전 1000년경부터 기원후 800년까지 건너가서 포도를 재배했다고 전해지나, 전설로 알려져 있다.또한 10세기 말경 노르만(바이킹)의 항해사 레이프 에릭슨이 이끄는 함대가 북미에 도달하여 아메리카를 '발견'했다고 사가에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현재 캐나다의 배핀 섬에 도달, 그대로 남하하여 뉴잉글랜드에서 뉴욕 주 일대를 신천지로 빈란드로 명명하고 정착을 시도했지만 원주민 스르레링과 타협이 되지 않아 항쟁으로 발전 했으며, 10년 정도 후에 버려진 레이프 에릭슨 일행은 원래 정착촌인 그린랜드로 돌아 왔다고 되어 있다.현재는 캐나다 뉴펀들랜드 섬에 그들의 정착지 흔적인 랑스 오 메도우가 발견되어 세계 유산에 등록되는 등 그들의 존재는 인식되게 되었지만, 당시 그들이 신대륙에 도달했다는 정보는 유럽 국가에서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고, 정착이 좌절되어, 그대로 영유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메리카 ‘백인 최초의 발견’자는 되지 못했고, 1492년에서 1504년까지의 항해를 통해 도래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만큼의 정당한 평가를받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근세까지 북미에는 중남미에 필적하는 인디언 문명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최근 발굴이 진행되어, 8세기에서 16세기 무렵까지 계속되었던 미시시피 문화의 존재가 마운드 군락으로 불리는 분묘 유적에 의해 확인되었다. 그중 가장 큰 것은 일리노이 주 세인트루이스 교외 카호키아라는 대유적에서 전성기에 1만명에 이르렀던 흔적을 발견했다. 이 초거대 유적은 1982년에 ‘카호키아 마운드 주립 사적지’로 세계 유산에 등록되었다.
근대
식민지 시대 이전
이탈리아 반도를 중심으로 한 유럽에서 르네상스가 꽃을 피웠던 시대에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재빨리 원양 항해 기술을 익혀 대항해 시대가 막을 열었다. 이탈리아(제노바) 사람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스페인 여왕의 승낙을 받아 대서양 주변의 아시아를 발견하러 나섰지만, 1492년에 서인도 제도에 도달했다. 이어서 영국인 존 캐벗이 북미 대륙의 동해안을 탐사하였고, 영국이 이를 영유(뉴잉글랜드 식민지)하였으며, 프랑스인 자크 카르티에가 세인트로렌스 강을 거슬러 이것을 프랑스가 영유(캐나다 식민지)하는 등 서구인에 의한 남북 아메리카의 탐험과 개척, 인디언에 대한 영토 약탈과 학살이 시작되었다. 콜럼버스의 상륙을 기념하는 ‘콜럼버스의 날’은 인디언 학살의 상징일로 매년 미국에서 인디언들이 시위를 결행하는 날이기도 하다.
미국의 식민지로서의 발전은, 1607년에 현재의 버지니아 주에 있는 제임스타운이 영국인에 의해 건설되어, 영속적인 식민을 개시했을 때로부터 시작된다.[4] 현재 미국의 식민지 활동으로 ‘개발’은 처음부터 다민족 국가가 될 운명을 예정하듯이 진행되었다. 버지니아와 캐롤라이나에는 영국인(뉴잉글랜드)이, 루이지애나는 프랑스인(프랑스령 루이지애나)이 식민지를 개척하는 등 ‘개발’은 주로 영국인과 프랑스인 두 민족에 의해 이루어졌다. 하지만 뉴욕과 뉴저지에는 네덜란드(뉴네덜란드)가, 델라웨어에는 스웨덴인(뉴스웨덴)이, 플로리다에는 스페인 사람(누에바 에스파냐)이 각각 나름대로 오늘의 미국 범위의 식민지를 구축했다. 동부는 이미 17세기 중반에 현재의 미국 문화로 이어지는 서양 문화가 이식된 것이다.
종교적으로 볼 때 원래의 이민은 가톨릭이었지만, 16세기에 유럽에서 개신교(프로테스탄트)의 출현과 종교 개혁에 이어 종교 전쟁이 일어나면서 퓨리턴(청교도)이 1620년의 이민(메이플라워 호)을 계기로 신천지를 찾는 신교도들이 잇따라 정착했다. 그들은 진보적인 가톨릭과 인디언과 적대하면서 세력을 늘려나갔고, 1620년의 이민은 현재에도 미국의 신교도 사이에서 위업으로 칭송받고 있다. 그러나 인디언들로부터는 민족 학살의 시작으로 ‘필그림 파더스’의 추수감사절에는 대규모 항의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서구인은 식민지에서 설탕 · 커피 · 면화 · 담배 등의 농작물로 농장을 일구었지만, 이내 노동력 부족에 시달렸다. 서구인은 인디언을 노예화하고 또 이와 같은 시기에 아프리카 대륙의 대서양 연안에 진출하였으며, 현지 아프리카 여러 부족 흑인을 사로잡아 노예 무역을 통해 남북 아메리카 대륙에 수출하였다. 그것과 교환으로 진보된 화기와 당시 진출한 인도산 면직물을 아프리카의 흑인 유력자에게 팔았다. 식민지 시대의 노예 수요는 카리브해 지역 및 중남미가 압도적이었고, 북미에 노예 수출은 많지 않았다. 18세기는 전적으로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를 중심으로 인디언 노예 매매가 성행했다. 노예 제도에 의해 유지되는 미국 남부의 광대한 플랜테이션 농업이 발달된 것은 19세기에 들어서다.
북미 동해안을 장악한 영국은 원주민 인디언을 몰아내고 영토를 서부로 확대했다. 이 단계에서 13개 식민지를 건설하며 주에 따라서는 백인 인구가 인디언을 넘어서는 지역이 등장했다.
18세기에 들어가면, 한랭한 기후로 비교적 농업에 적합하지 않은 동북부에서 양조 · 조선 · 운수 등의 산업이 발달하면서 영국 본국의 경제를 압박하게 되었다. 원래, 신교도가 다수파를 차지하는 식민지에서 영국 성공회를 국교로 하는 본국은 알력이 있었지만, 당시에는 종교적, 정신적으로 본국과 분리되었으며, 경제적으로도 자립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은 일찍부터 〈양모제품법〉이나 〈철법〉으로 식민지에서의 공업 발전을 방해했고, 영국과의 무역 이외의 독자적 무역을 금지해 왔지만, 여기서 더 엄격한 중상주의 정책을 시행하여 식민지를 더욱 압박했다. 또한 프랑스와의 오랜 전쟁 중에서 필요한 자국 군의 주둔비와 전비를 지원하기 위해 식민지 주민에 대해서 세금을 부과하는 〈인지세법〉으로 무역 독점을 꾀했다. 개척민들은 반 과세와 〈인지세법〉 폐지를 주장하였고, 1765년에는 열렬한 반대 운동을 전개했기 때문에 영국은 이듬해 이 세금을 철폐했지만, 이번엔 〈차법〉으로 차의 무역을 독점하려 했다. 이에 격분한 개척민들은 1773년에 보스턴 항구를 습격하여, ‘보스턴 차 사건’을 일으켰다.
보스턴 차 사건에 충격을 받은 영국은 보스턴 항구를 폐쇄하고, 주민들에게 강경한 조치를 취하였다. 여기에서 아메리카 13개 식민지 대표들이 필라델피아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대륙 회의를 열고, 식민지의 자치권을 요구하면서 영국에 대하여 저항할 것을 결의한다.
1775년 4월 영국의 주둔 병사와 주민들이 운영하는 민병대 사이에 충돌(렉싱턴 콩코드 전투)이 발생하면서 미국 독립 전쟁으로 이어졌다. 개척민 대표들은 제2차 대륙 회의를 개최하여, 조지 워싱턴을 전쟁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대륙군을 결성하고, 1776년 7월 4일 대륙 회의에서 토머스 제퍼슨이 초안한 개신교적 사상을 드러낸 현대 민주주의의 원점이 된 미국 독립 선언을 발표했다. 또한 영국은 1660년대부터 죄수 유배 장소로 미국을 이용하고 있었지만 독립 전쟁이 시작되면서, 거대한 유배지를 잃었고, 형 집행이 곤란하게 되자 새로운 유배 식민지로서의 오스트레일리아를 개척하여 호주의 역사로도 이어져 갔다.
토마스 제퍼슨이 1778년 델라웨어에서 델라웨어 족과 ‘인디언 조약’을 처음 체결한 이후 미국은 인디언들에게 무력을 배경으로 영토를 구입하고, 그들을 보호구역(Reservation)으로 몰아넣는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인디언은 땅을 사고 파는 문화는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계약을 이해하지 못했고, 수많은 인디언 전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인디언의 영토는 더욱 축소되었다.
내전의 시대
미합중국이 서부로 영토를 확장하는 단계에서 북부는 산업 혁명을 맞이하게 되었고, 공업화가 진행되었다. 반면, 남부는 면화 생산을 주요 산업으로 하고 있었다. 북부 공업 지대는 유럽과 공업 제품 수출 경쟁의 균형에서 자국 산업 보호를 호소했고, 관세를 부과하는 등 보호 무역을 요구했다. 한편, 남부 농업 지역은 자유롭게 면화를 수출하고 싶었기 때문에, 자유 무역과 관세 철폐를 요구했다. 이렇게 남북의 대립이 매우 깊어졌다.
또한 중공업화가 진행되고 있는 북부에서는 노동자 부족 사태에 직면하고 있었기 때문에, 19세기 초반에 속속 흑인 노예를 해방하고 노동자로 이용했다. 이 해방 노예의 일부는 아프리카 대륙으로 귀환을 원했으며, 아프리카 서해안에 라이베리아가 세워졌다. 한편, 남부에서는 19세기 중반에도 흑인을 노예로 사용했고, 광대한 플랜테이션 농업을 하고 있었지만, 북부 공장을 경영하는 자본가는 풍부한 흑인 노동력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에서의 면화 수요가 확대되면서, 남부에서는 점점 흑인 노예의 노동력에 의존하는 산업 구조가 되었다.
영토가 서부로 확장되면서, 식민지의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이러한 식민지를 주로 승격하게 되었을 때, 이러한 새로운 주에 노예제를 적용할 지에 대해 남북이 대립하였다. 1854년, 북부를 중심으로 노예제 반대를 호소하는 공화당이 창당되었고, 남부 농민의 지지를 받았던 민주당과 대립했다.
서부 개척 시대
1865년부터 1918년까지의 미국의 역사는 남북 전쟁 후에 미국 재건(Reconstruction)이 시작되어, 산업화가 진전된 시대였다. 사회와 노동력의 급격한 변화가 많은 노동조합을 낳았고 파업이 이어졌다. 남북 전쟁이 끝났을 때, 미합중국은 분열된 상태였다. 미국 재건과 그 실패로 인해 남부의 백인은 흑인들에 대한 지배 관계를 지속할 수 있게 되었고, 흑인의 인권은 부정당하고 경제, 사회 및 정치 분야에서는 제2계급에 두었다.
유럽을 중심으로 다른 대륙에서 1865년부터 1918년까지 2,750만 명이라는 전례 없는 이민자의 물결이 몰려들어 저렴한 공장 노동력을 제공했고[1], 캘리포니아 주와 같은 아직 개발이 진행되지 않았던 지역에 다양한 지역 사회를 형성했다. 산업의 발전과 인구의 확대는 적지 않은 사회 문제를 발생시켰다. 대부분의 인디언 부족은 작은 거류지에 이주 당했고, 백인 농장주와 목장주가 그 땅을 손에 넣었다. 공장 노동자는 학대와 폭력에 시달렸고, 그것에 수반하여 노동 운동을 낳게 되었다. 산업계의 관행적인 학대로 노동 운동은 폭력적인 양상을 드러내었다.
이 기간 국내에서는 인구 증가와 산업 성장, 해외에서는 많은 제국주의적인 산업으로, 미국은 국제 사회에서의 힘을 증가시키기 시작했다. 19세기가 끝날 무렵까지 미국은 새로운 기술(전신 및 제철 베서머 법 등)에 따라 세계 선진 공업국이 되었고, 철도망을 갖추고 풍부한 천연 자원을 사용하여 제2차 산업 혁명의 선구자가 되었다.
19세기 말, 미국은 쿠바를 정복하고 스페인의 지배에서 사실상 미국의 지배 하에 두고 하와이와 푸에르토리코를 합병했다. 미국 스페인 전쟁으로 필리핀을 획득하게 되었으며, 수십만 명을 살해하고 그들의 독립 운동을 억압하면서 필리핀의 근대화를 추진하고, 특히 수십만 명을 죽인 전염병의 유행을 억제하기 위하여 공중위생을 개선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미국은 꽤 늦은 1917년에 연합국 측에 참전하여, 전쟁의 교착 상태를 타개함으로써 미국은 군사 대국과 경제 대국의 길을 걷게 되었다.
제국주의 시대
서부 개척 시대가 끝나자, 미합중국은 국경을 더욱 해외로 넓히자는 “밖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는 의식이 일어났다. 1889년에 ‘전미 회의’(Pan-American Conference)가 개최되었으며, 이 힘이 미국의 라틴 아메리카 진출을 촉구했다. 하지만 먼로주의에 기초한 미국의 전통적인 외교 정책은 계속 중시되고 있었기 때문에 식민지 획득에 대해서는 소극적이고, 유일하게 곤봉 외교 및 달러 외교에 기초한 경제적 진출을 겨냥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다양한 국가에서 온 사람들로 이루어진 나라이기 때문에 외국 간의 전쟁에 참여하면 국내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면서 먼로 독트린 이래 고립정책을 고수하던 미국은, 미국 선박들이 독일의 U보트에 의해 계속 파괴되자 이에 분개하기 시작한다. 또한, 치머만 전보에 의해 멕시코 전쟁으로 얻었던 땅을 뺏길 위험에 처하자, 그동안 평화를 주장하며 전쟁 참가를 꺼려왔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1917년 4월 6일,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선전 포고를 하였고,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미국은 승전국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미국은 헌법을 개정해 징병제를 부활하였으나, 미국 최초의 헌법과 같이 독신 남성만 징집시켰다.
1910년부터 1930년 사이에 200만명이나 되는 남부의 흑인들이 인종 차별을 피하며 뉴욕, 시카고, 디트로이트, 클리블랜드 등의 북부 도시들로 이주하였다.
세계 경제 대공황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전쟁 물자를 팔아 수익을 올렸던 미국 공장들은 전쟁이 끝나면서 수요가 사라지자 부도를 내며 문을 닫았고, 이에 따라 많은 실업자가 생겨났다. 실업자들은 수익이 없었기 때문에 물품을 살 수 없었고, 이에 따라 다른 공장들도 문을 닫기에 이른다. 또한, 연방준비은행이 통화량을 늘렸기 때문에 1921년 6월 317억 달러였던 통화량이 1929년 6월에는 457억 달러가 되어 44%나 늘어났다. 통화 가치가 떨어지고 돈이 넘쳐나자 돈 벌기가 쉬워졌고, 많은 사람들이 수익을 노리고 주식에 투자했다. 뉴욕의 큰 은행들이 산하 모든 브로커 기관들에게 ‘24시간 이내 지불조항’을 적용하여 융자해준 모든 콜 대출을 24시간 내에 전부 거둬들이라고 지시하자, 주식 브로커나 주식을 산 모든 사람들이 빚을 갚기 위해 금액에 관계없이 소유한 주식을 전부 급히 팔아야 했고, 그 결과 주식시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검은 목요일(Black Thursday)에 일어난 악명 높은 1929년의 대공황(The Great Crash 1929)이며, 그 여파로 전 세계가 공황에 휩싸이게 되었다. 대공황이 일어나자 많은 사람들이 거래 은행으로 달려가, 있는 대로 돈을 찾아 증권 회사에 대출금을 갚으려 했기 때문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과도한 전쟁 배상금을 떠맡았던 독일은 나치즘을 기반으로 독일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 휘하에서 1939년 9월 1일 선전포고도 없이 폴란드에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이미 내부적으로 경제 대공황이라는 문제점을 떠안고 있던 미국인들은 전쟁에 참가하는 것을 반대했으나 1941년 12월 7일, 일본 제국이 진주만을 공습하자 미국은 그 복수로 연합국에 참가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을 승리로 끝낸 미국은 크게 부상하게 되는데, 그것은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유럽 각국에서 돈과 장비에 대한 수요가 늘어난 호기를 잘 이용한 덕분이다.
현대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지자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은 강대국임을 내세워 세계 평화를 책임지겠다고 표방하고, 이에 거슬리는 여러 나라에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켰으며, 동시에 내부적으로도 경제적, 정치적 정책을 통해 성장을 거듭한 시대이다.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등으로 세계 평화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걸프 전쟁, 이라크 전쟁 등을 일으켰고, 이에 반발하는 세력들에 의해 많은 테러의 위험에 노출되었다. 그러나,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이유인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보유는 사실이 아님이 밝혀져 이라크 전쟁은 명분없는 전쟁이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18]2001년 9월 11일에는 오사마 빈 라덴이 이끄는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세계 무역 센터가 테러 당했으며, 이에 대한 보복으로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하고 오사마 빈 라덴을 비호한다는 이유로 탈리반 정권을 붕괴시켰다. 그 이후 부시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으며 이라크를 공격하고 사담 후세인을 체포하기도 하였다. 이라크 전쟁은 프랑스, 독일 등 많은 국가가 반대하였으나 미국은 이를 강행하였다. 2008년 제44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버락 오바마가 당선되었고, 그는 미국 역사상 최초로 탄생한 혼혈 출신 대통령이다.
오버워치 속 미국
캐릭터
미국 국적을 가진 캐릭터로는 공격형 영웅인 솔저:76이 있다.
미국 국적을 가진 캐릭터로는 공격형 영웅인 리퍼가 있다.
미국 국적을 가진 캐릭터로는 공격형 영웅인 맥크리가 있다.
맵
문화
기여
각주
<refereneces/>
국가별로 바라본 오버워치
Class
클래스 | 노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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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미국, 멕시코, 브라질, 네팔, 인도, 일본, 중국, 한국, 나이지리아, 이집트, 호주, 독일, 러시아, 스웨덴, 스위스, 영국, 프랑스 |
맵 | 네팔, 하나무라, 도라도, 눔바니, 일리오스, 아누비스 신전, 볼스카야 인더스트리, 리장타워, 왕의 길, 할리우드, 감시기지 지브롤터, 66번 국도, 아이헨발데 |
캐릭터 | 겐지, 맥크리, 파라, 리퍼 , 솔저:76, 솜브라, 트레이서, 바스티온, 한조, 정크랫, 메이, 토르비욘, 위도우메이커, D.Va, 오리사, 라인하르트, 로드호그, 윈스턴, 자리야, 아나, 루시우, 메르시, 시메트라, 젠야타 |
문화 | 한국의 프로게이머, 일본의 닌자, 아시아의 용, 일본의 궁도, 중국의 하얼빈 빙등제, 중국의 야시장, 중국의 정원, 영국의 음식, 영국의 셜록홈즈, 러시아의 우주여행, 러시아의 로봇산업, 게르만족 혈통, 삼바축구, 독일연방군, 네팔의 수도사들, 호주의 쓰레기들, 브라질의 빈민가, 해킹, 프랑스 속 암살, 서부의 총잡이들, 스위스의 의료산업, 미국의 전쟁영웅, 전쟁 고아, UN세계평화기구, 스웨덴의 제조기술, 옴닉사태, 오리사 전승, 우제트, 인도의 전통춤, 젬베 |
Relation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존재하지만, <references/>
태그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