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힐
창힐의 원래 성은 후강(侯冈),이름은 힐(颉),호는 사황씨(史皇氏)이다. 그는 눈이 네 개에 눈동자가 두 개씩이었으며 아주 총명했다고 한다. 전설 속 황제의 사관으로 한자를 창조 발명하여 ‘조자성인(造字聖人)’으로 추앙받고 있다.
창힐(蒼頡) · 사황(史皇)이라고도 부른다. 그는 고대 문자를 정리한 이름난 존재로 평가되며, 훗날 ‘서성(書聖)’ · ‘사문비조(斯文鼻祖, 인문시조)’ 등으로 추앙되었다.
업적
고문서에 문자 발명의 주인공이 창힐로 나온다. 그의 이름은 전국시대에 와서 『순자』「해폐(解蔽)」, 『한비자』「오두(五蠹)」, 『여씨춘추』「군수(君守)」 등에서 보이는데, 모두 글을 좋아하여 문자를 발명 내지 창조했다고 나온다. 한자를 창조했다는 창힐에 관한 기록을 먼저 살펴본다. 『순자』의 여러 편들 중에서 ‘가려진 마음을 열어야 한다’는 뜻의 「해폐」편에는 “본래 글을 좋아했던 사람은 많은데 창힐의 이름만이 전해지고 있는 것은 그가 글씨에 한결같았기 때문이다”라는 대목이 보인다.
『여씨춘추』에 그가 글자를 만들었다고 나오고, 『설문해자』에는 황제의 사관으로서 글자를 발명했다고 되어 있다. 또 새의 발자국을 보고 서계1)를 만들었다고도 하는데 초기 문자가 상형문자일 가능성을 의미한다.
오늘날 역사학자들도 문자의 출현을 창힐과 연계시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당시 역법 제정 등에는 문자 기록이 필요했고, 신탁 따위도 문자를 필요로 했다. 어떤 학자는 창힐이 처했던 시기가 대략 기원전 26세기 무렵이고 전욱 부락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노신(魯迅)은 문자를 만든 사람이 창힐 한 사람만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여러 사람이 만든 것을 사관이 채집하고 덧붙여 사건을 기록했을 것이라고 했다(「문외문담(門外文談)」).
다시 말해 한자는 창힐 한 사람의 창조가 아니라 창힐 같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차츰 풍부해졌다는 것이다. 다만 창힐은 그런 사람들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중요하고 큰 작용을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창힐이 문자를 창조했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글자를 만들었다는 이 사건 자체가 갖는 의의다. 한자의 출현은 중국 역사가 문자기록의 시대로 들어섰음을 의미하는 중대한 사건이자 후대에 크고 중요한 영향을 준 사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