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K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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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입 : 사건 한글항목명 : 임진왜란 한자항목명 : 壬辰倭亂 편자 : 자운서원팀 김소희
내용
- 요약 :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친 왜군의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
1597년 제2차 침략전쟁을 따로 정유재란이라고도 하며, 일본에서는 분로쿠 게이초[文祿慶長]의 역(役), 중국에서는 만력(萬曆)의 역(役)이라고 한다. 조선 조정에서는 남해안 지방에 왜구들이 자주 침략하자 군국기무(軍國機務)를 장악하는 비변사(備邊司)라는 합좌기관(合坐機關)을 설치하여 이에 대비하였으나, 선조 때에 지배계급은 당파를 중심으로 분열하여 서로 반목질시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파쟁으로 중앙에서는 국방정책조차도 마련하지 않고 변해가는 동양의 국제정세를 명(明)나라와의 친선관계만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또 안일 속에서 고식적인 대책에만 만족해하던 지배층은 인접국가인 일본이나 대륙의 여진족의 정치적 변동이나 사항을 구체적으로 탐지하려 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16세기 말에 일본에 파견한 통신사(通信使)도 당파적인 엇갈림에 치우쳐 상반된 내용을 보고하였다. 한편 이이(李珥)는 10만 양병설(養兵說)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조선사회는 이미 오랜 평화 속에서 지배계층인 사대부의 편당(偏黨)정치, 기강의 해이, 전세제(田稅制)의 문란 등 여러 폐단으로 인심이 동요되었다. 조정에서는 각 도에 왜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성곽을 수축하고 군비를 정비하라는 명령을 내려도 몇 곳을 제외하고는 민폐를 야기시킨다는 원성만 높았으며 이에 동조한 일부 수령들도 전비(戰備)를 중지하라는 장계(狀啓)를 올리기도 하였다. 한편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대륙침공의 의도를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은 1585년경부터였고 1587년에 그는 국내 통일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규슈[九州]정벌을 끝마치고 대마도주(對馬島主) 소 요시시게[宗義調]에게 조선 침공의 뜻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조선 사정에 정통한 쓰시마도주는 이 계획이 무모한 것임을 알고 조선이 통신사를 파견할 것을 건의하였다.
따라서 쓰시마도주는 가신인 다치바나 야스히로[橘康廣]를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로 하여 1587년 조선으로 파견, 일본 국내사정의 변화를 설명하고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 첫번째 일본 사신이 부산에 도착하였을 때 그들의 영접에 대한 가부와 서계(書契)의 서사(書辭)가 종래와 달리 오만하다 해서 문제가 되어 조정에서는 여러 논의가 있었다. 특히 공주교수(公州敎授) 조헌(趙憲)은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시폐(時弊)와 국방을 논하는 등 일본 정벌의 강경론을 주장하자 결국 조정에서는 수로미매(水路迷昧)를 이유로 통신사의 파견을 거절하였다. 도요토미의 첫번째 외교가 실패하자 다시 쓰시마도주의 알선으로 1588년 10월과 89년 6월, 두 차례에 걸쳐 조공과 함께 통신사의 파견을 간청하고 앞서 왜구의 앞잡이가 되어 노략질한 조선인을 잡아 보내왔다. 이에 조선 정부는 1590년 3월 황윤길(黃允吉)을 정사(正使), 김성일(金誠一)을 부사(副使), 허성(許筬)을 종사관(從事官)으로 한 통신사 일행을 파견하였고 이들은 이듬해 정월 일본의 답서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일본의 답서에는 종래의 외교관례에 따르지 않는 무례한 구절과 정명가도(征明假道)를 뜻하는 글이 있어 침략의 의도가 분명하였으나 1591년 3월 이들 사신이 복명하는 자리에서 정사 황윤길(서인)은 왜가 반드시 침략할 것이라고 한 데 반해 부사 김성일(동인)은 왜가 침범할 동정이 없다는 상반된 보고로 당파적인 엇갈림과 함께 조정의 의견도 통일되지 못하였다. 동인세력은 서인들이 전쟁을 빌미로 정치적 위기를 넘기려한다고 의심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어 제3차 일본 사신 일행이 조선 통신사보다 한달 늦게 입경하여 일본이 가도입명(假道入明)하리라는 통고에 조정은 놀라 그 해 5월에 일본의 서계 내용과 함께 왜정(倭情)을 명에 알리는 한편 일본의 침공에 대비하여 김수(金晬) ·이광(李洸) ·윤선각(尹先覺) 등으로하여금 경상 ·전라 연안의 여러 성을 수축하게 하고 각 진영의 무기를 정비하게 하였다. 신립(申砬) ·이일(李鎰)에게는 변비(邊備)를 순시하게 하는 등 요충지인 영남지방의 방비에 힘을 기울였으나 이미 시기가 늦었다. 이 동안 일본의 침략계획은 더욱 성숙하여 내전을 통해 연마한 병법·무예·축성술(築城術)·해운술 등을 정비하고 조총(鳥銃)의 대량생산도 진행되었다. 1592년 4월 13일 경상도 동래부 다대포 응봉봉수대(鷹峰烽燧臺)에서는 왜군의 700여 병선(兵船)이 쓰시마를 출항하여 부산포에 이르고 있다는 상황보고가 곧 경상·전라도의 각 감영(監營)과 중앙에 전달되었다.
그러나 경상좌수영군은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궤멸되었고 14일에는 왜군 선발대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약 1만 8000 병력이 부산성을 공격하여 십수시간의 혈전 끝에 부산성(釜山城)을 사수하던 부산진첨사(釜山鎭僉使) 정발(鄭撥) 등의 전사로 성을 빼앗겼다. 이튿날 동래(東萊)에 진격한 왜군들과 맞선 동래부사(東萊府使) 송상현(宋象賢) 이하 군민(軍民)은 끝까지 항전하다 순국하였다.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킨 왜군의 후속부대는 계속 상륙해 와서 4월 18일에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제2군 2만 2000여 병력이 부산에,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제3군 1만 1000여 병력이 다대포(多大浦)를 거쳐 김해(金海)에 상륙, 침공을 개시하였다. 이와 함께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등의 9,000여 수군(水軍)이 편성되어 바다에서 이들을 응원하였다. 일본 국내의 잔류병력과 쓰시마 등지의 주둔군 등 일본 침략군의 총병력은 약 20만이었는데 이 중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킨 제1군은 중로(中路)로 동래-양산(梁山)-청도(淸道)-대구(大邱)-인동(仁同)-선산(善山)-상주(尙州)-조령(鳥嶺)-충주(忠州)-여주(驪州)-양근(楊根)-용진(龍津)나루-경성동로(京城東路), 제2군 좌로(左路)는 동래-언양(彦陽)-경주(慶州)-영천(永川)-신녕(新寧)-군위(軍威)-용궁(龍宮)-조령-충주-죽산(竹山)-용인(龍仁)-한강, 제3군 우로(右路)는 김해(金海)-성주(星州)-무계(茂溪)-지례(知禮)-등산(登山)-추풍령(秋風嶺)-영동(永同)-청주(淸州)-경기도의 3로로 나뉘어 서울을 향하여 북상하였다.
4월 17일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으로부터 왜군 침공의 급보가 전해지자 조정에서는 신립을 도순변사(都巡邊使), 이일을 순변사, 김여물(金汝岉)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하여 왜군 침공에 대비하는 한편, 김성일을 경상우도초유사(慶尙右道招諭使), 김근(金玏)을 좌도안집사(左道安集使)로 삼아 민심수습과 항전을 독려하도록 하였다. 북상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이일에게는 중로(中路)인 조령 방면을, 유극량(劉克良)과 변기(邊器) 등에게는 각기 죽령과 추풍령을 방비하게 하였고 도순변사 신립과 도체찰사(都體察使) 류성룡(柳成龍)으로 하여금 이일을 응원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일이 4월 24일 상주에서 가토에게 패하여 충주로 물러나자 왜군은 조령과 죽령 등지에서 저항도 받지 않은 채 충주까지 진격하였다.
이일의 뒤를 이은 신립은 충주 탄금대(彈琴臺)에서 방어작전을 폈으나 패하였다. 이일 등이 죽령·조령·추풍령 등의 요새를 방어하기 위해 출발한 후 조정은 적군의 수도 공격에 대비하여 우의정 이양원(李陽元)을 수성대장(守城大將)으로 삼아 도성의 성곽을 축성하게 하는 한편 전 북병사(北兵使)였던 김명원(金命元)을 도원수(都元帥)를 삼아 한강을 수비하게 하였다. 신립의 패전보고가 있자 4월 30일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개성을 향하여 피란길에 올랐다. 서울이 함락되자 선조는 다시 평양으로 달아났다. 파천에 대한 민심이 거제지자 파천을 주동한 사람은 영의정 이산해로 내몰고, 류성룡은 파천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는 거짓 죄목으로 귀양을 보냈다. 그리고 임해군(臨海君)은 함경도로, 순화군(順和君)은 강원도로 보내어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였지만 백성들은 오히려 두 왕자를 붙잡아 왜군에게 인도하였다. 한편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여 수복을 꾀하고자 하였다. 왕이 달아나자 백성들의 사기는 더욱 떨어졌고 특히 하삼도(下三道)는 무정부적 혼란상태가 더했다. 왕이 피난해 있는 사이 민란이 일어나 공사노비의 문적이 있는 장례원(掌隷院)과 형조의 건물을 불태우고 경복궁·창덕궁 등 궁궐과 관청에 들어가 약탈을 하였다. 상륙 20일만에 서울은 왜군에게 점령되었으며 서울에 입성한 왜군은 대오를 정비하여 고니시의 부대는 평안도, 가토의 부대는 함경도, 구로다의 부대는 황해도로 진로를 정하는 한편 서울을 지키는 부대를 두고 경상·강원·전라도 방면으로 진출하여 후방지역을 담당하였다. 강원도·황해도 방면으로 모병하러 간 두 왕자도 왜병의 포로가 되고 파죽지세로 밀려드는 왜군에 의해 개성·평양은 부산 상륙 이후 60일도 못 되어 함락, 거의 무방비상태인 전국토는 함경도까지 진출한 왜군에게 짓밟히게 되었다.
서울이 함락되고 함경도 지역까지 왜군의 침략을 당하고 있을 때 해상의 싸움은 전라도 해안으로 진출하는 왜병을 막아내고 있었다. 조선 수군의 편제와 전술은 고려 이래로 왜구 방어 위주였으므로 잘 정비되어 있었다. 따라서 각도에는 수영(水營)이 있어 이를 수군의 근간으로 하였다. 1592년 4월 14일 부산으로 침입한 왜선단(倭船團)에 경상좌수영과 우수영은 해상에서 제대로 싸움조차 하지 못한 채 대패하였다. 전라좌수영의 수군절도사로 있던 이순신은 경상우수영으로부터 왜군의 침입보고를 받자 출동하여, 옥포(玉浦)의 첫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후 당포(唐浦)·당항포(唐項浦)·한산도(閑山島)·부산 등지에서 계속 전과를 거두었다. 특히 한산도 앞바다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역전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진주성(晉州城)싸움·행주산성(幸州山城)싸움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으로 꼽는다.
이순신의 활약으로 해상권을 장악한 조선군으로 인해, 전라도 해안으로 진출하려던 왜군의 작전은 분쇄되었다. 해상에서의 승리와 함께 육지에서는 부산진·동래의 수성전(守城戰)과 김해성(金海城)의 저항, 경상우방어사(慶尙右防禦使) 조경(趙儆) 휘하의 돌격대장 정기룡(鄭起龍)의 추풍령전투, 밀양 작원(鵲院)에서의 밀양부사 박진(朴晉)의 선전, 유도대장(留都大將) 이양원(李陽元)의 해유령(蟹踰嶺) 승전 등 치열한 접전이 있었다. 한편 혼란과 민심의 이산 속에서도 근왕(勤王)을 부르짖는 의병이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였다. 영남에서는 유림 곽재우(郭再祐)·김면(金沔)·정인홍(鄭仁弘) 등이, 호남지방에서는 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 호서에서는 조헌(趙憲) 등이, 함경도에서는 정문부(鄭文孚)가 거병하였다. 또한 조선 사대부들에게 천대만 받았던 승려들이 봉기하여 가세하였다.
조헌은 충청도 옥천(沃川)에서 일어나 청주의 왜병을 축출하고 금산(錦山)의 왜병을 공격하다 전사하였고 곽재우는 경상도 의령(宜寧)에서 거병하여 의령·창령 등지에서 적을 물리치고 진주에서 김시민(金時敏)과 함께 적병을 격퇴하였다. 고경명은 전라도 장흥(長興)에서 거병하여 금산을 공격하다가 전사하였으며 김천일은 수원에서 거병하여 제2차 진주싸움에 참가하였다.
정문부는 함경도에서 활약하여 경성(鏡城)·길주(吉州) 등을 회복하고 관동지방의 적을 축출하였다. 이 외에도 대소의 허다한 의병이 봉기했으며 휴정(休靜)·유정(惟政) 같은 승려들이 승병을 거느리고 싸움에 참가하기도 하여 이러한 의병의 활동은 왜군의 군사행동에 심한 타격을 주었다. 왕이 파천하는 도중 사신을 명에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자 명에서는 조선 땅에서 왜군을 격퇴해야 한다는 판단 아래 파병을 결정하여, 선봉장으로 낙상지(駱尙志)와 사대수(査大受) 등이 먼저 건너오고 이어서 송응창(宋應昌)·이여송(李如松)이 4만 5000의 동정군(東征軍)을 이끌고 조선의 김응서(金應瑞) 등과 함께 평양성을 공격, 이를 탈환하였다.
계속 서울을 향하여 진격하던 명군은 벽제관(碧蹄館)에서 왜군과 일대 접전이 벌어져 개성으로 퇴각하고 왜군은 서울에 집결하여 함경도에서 철수하는 가토의 군대와 연합, 행주산성을 공격하였다. 행주산성에는 전 전라도순찰사 권율(權慄)이 이치(梨峙)싸움에서 승리한 후 명의 원군과 호응하여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웅거하였으나 벽제관싸움에서 명군이 패퇴하자 고립되었다. 권율은 조방장(助防將) 조경, 승장(僧將) 처영(處英)과 함께 약 2,300의 정병으로 행주산성에서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몇 차례의 격전 끝에 왜군을 물리치자 왜군은 다시 서울 이북에 출병하지 않고 서울 철수를 서두르게 되었다. 임진강을 끼고 조선·명의 연합군과 왜군이 대치하고 있을 때, 일본측 고니시의 강화회담 제의로 이덕형(李德馨)과 일본의 야나가와 초신[柳川調信]·겐소[玄蘇] 사이에 강화회담이 시작되어 강화는 교섭단계에 들어갔다. 그 즈음 왜군은 앞서 김시민에게 패퇴한 진주성을 재차 공격해왔는데 김천일·황진(黃進)·최경회(崔慶會) 등이 역전했으나 함락되었다.
두 차례에 걸친 진주싸움은 행주싸움에 못지않은 격전이었고 특히 제1차 진주성싸움은 임진왜란 3대첩에 든다. 조선측의 강화반대에도 불구하고 명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회담은 진척되어 심유경(沈惟敬) 등이 일본에 파견되었고 우리측에서도 황진을 통신사로 보내게 되었다. 강화회담이 계속되는 동안 전쟁은 소강상태로 들어갔고 명은 왜군의 재공격이 없을 것이라 판단하여 주력부대를 철수시켰다. 그러나 5년간 계속된 명·일간의 강화회의는 1596년 9월 일본 오사카성[大阪城] 회담에서 결렬되었다. 회담이 결렬된 이유는 명에서는 도요토미를 일본의 왕으로 삼고 그 입공(入貢)을 허락한다는 봉공안(封貢案)으로써 국면을 해결지으려 했으나 도요토미는 ① 명의 황녀로써 일본의 후비(后妃)로 삼게 할 것, ② 조선의 8도 중 4도를 할양할 것, ③ 감합인(勘合印:貿易證印)을 복구할 것, ④ 조선의 왕자 및 대신 12명을 인질로 삼을 것 등을 요구하였다.
심유경은 이 요구를 명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알고 거짓으로 본국에 보고하여 명은 봉공안에 의해 1596년 도요토미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칙서와 금인(金印)을 보냈는데, 화의는 결렬되고 이듬해 왜군은 재차 침입하게 되었다. 이 때에는 조선도 왜군의 재침에 대비하여 경상도의 금오(金烏)·공산(公山)·화왕산성(火旺山城)을 비롯하여 각도의 산성을 수축하는 등 군비를 갖추었고 양호(楊鎬)를 경리, 마귀(麻貴)를 제독(提督)으로 한 명의 원군 5만 5000도 즉시 출동했기 때문에 일본군은 경상도를 중심으로 맴도는 데 그쳤다. 1596년 12월에 고니시군이 부산에 상륙하고 이듬해 1월에는 가토군이 다대포(多大浦)에 상륙하여 양산(梁山)을 함락하고 서생포(西生浦)에 진을 쳤다. 정유재란 때의 왜군 총병력은 14만 1500으로, 수군도 강화되었다. 왜군은 임진년 당시와는 달리 경상·충청·전라도의 완전 점령을 전략으로 하여 전주를 점령한 후 북진할 계획을 세워, 7월 말부터 좌군은 남해(南海)·사천(泗川)·고성(固城)·하동(河東) 방면에서, 우군은 광양(光陽)·순천(順天)·김해(金海)·창원(昌原) 방면에서, 가토는 밀양(密陽)·초계(草溪)·거창(居昌) 등을 거쳐 각기 전주로 향하였다. 왜군은 황석산성(黃石山城)의 싸움에서 고전 끝에 승리를 거두었으나 고령(高靈)에서 상주목사 정기룡(鄭起龍)군에 패한 데 이어 직산(稷山) 싸움에서도 패하여 더 이상 북진하지 못하고 남하하여 순천·울산 등지의 연해안에 진주하게 되었다. 해전에서는 1597년 1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왜군의 본거지를 공격하지 않고 소극적이라는 죄명으로 하옥되고 원균(元均)이 그 후임이 되었으나 7월의 칠천량(漆川梁) 해전에서 왜군의 기습을 받아 원균과 전라수사 이억기(李億祺), 충청수사 최호(崔湖)의 수군이 전멸하였다. 이에 다시 이순신이 수군통제사에 임명되어 남은 12척의 병선으로 전선을 수습하고 전열을 재정비하여 명량(鳴梁)대첩에서 적함 133척을 맞아 격전 끝에 대승을 거두고 다시 제해권을 회복하였다.
8월 도요토미가 죽자 이를 계기로 왜군은 총퇴각하였다. 왜군의 가토가 울산의 도산성(島山城)에서 퇴각하고 순천의 고니시도 퇴각하려 했으나 이순신의 수군이 이를 차단하자 왜의 수군 300여 척이 이를 후원하려 노량(露梁)에 이르러 최후의 해전이 벌어졌다. 이순신은 명의 수사제독(水師提督) 진린(陳璘)과 합세하여 왜선 200여 척을 격파하여 임진왜란 최후의 이 해전에서 승리하고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이로써 전후 7년간에 걸쳤던 왜란은 조선·명·일본 3국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특히 싸움터였던 조선은 국토가 황폐화되고 백성은 도탄에 빠졌으며 정치·경제·문화·사회·사상 등 각 방면에 걸쳐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따라서 위정자들의 급선무는 전란으로 인한 문물의 파괴, 재력의 탕진을 복구하는 것이었다. 정치·군사적인 면에 있어서는 비변사(備邊司)의 강화와 훈련도감을 비롯한 군사기구의 개편이 시작되었다.
또한 난중에는 각종 무기가 제작되어 이장손(李長孫)은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변이중(邊以中)은 화차(火車)를 각기 발명하였고 왜의 조총과 명군이 사용한 서양식 대포인 불랑기포(佛郞機砲)도 모조하여 사용하였다. 전화로 인한 농촌의 황폐, 은결(隱結)의 증가, 국가질서의 문란 등으로 대동법(大同法)의 실시, 면세전(免稅田) 확대의 방지, 균역법(均役法)의 시행, 기민(饑民)을 위한 환곡(還穀)·모곡(耗穀)의 회수책 등이 제도화되었다. 한편 혼란한 사회와 민심의 흉흉함을 틈타 이몽학(李夢學)의 난 등 사방에서 일어나는 민란과 함께 시행된 속오군(束伍軍)제도, 공명첩(空名帖)의 발행 등은 조선의 신분제도 붕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하였다. 문화적 손실로는 왜병의 방화로 불국사·경복궁 등의 건물과 사고(史庫)에 보관 중이던 역대 왕조의 실록·서적 등이 소실되고 많은 문화재를 약탈당하였다. 한편 전쟁으로 인한 질병의 만연으로 질병퇴치를 위한 의학서인 《동의보감(東醫寶鑑)》이 편찬되었고 사상적인 측면으로는 의병·승병을 통한 애국심의 발로와 자아반성과 함께 명의 내원(來援)에 대한 사대사상이 고조되는 반면에 왜에 대한 재인식과 적개사상이 더욱 강해졌다.
전란 중에 대두하기 시작한 여진의 청(淸)나라에 의해 명나라가 망하고 일본에서도 도요토미 대신 도쿠가와[德川]의 막부(幕府)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일본은 조선침략의 결과로 조선으로부터 금속활자에 의한 인쇄술을 처음으로 도입하게 되었고 포로로 잡아간 도자기 기술자에 의해 획기적으로 요업(窯業)을 일으키게 되었으며, 약탈하여 간 많은 서적은 성리학(性理學) 등 그들의 학문에 크게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