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 글씐바위
글씐바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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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 번호 | |
지정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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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명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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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
건립·제작 | |
주소 | |
위도 | 34° 15′ 71″ |
경도 | 126° 62′ 42″ |
웹사이트 |
개요
글씐바위는
위치
Virtual Pavilion
이번 답사의 촬영 결과물로 제작해서 넣을 예정.
글씐바위에 새겨진 오언율시
- 이미지
- 이미지출처:날로 새로워라 블로그 '[1]'
- 원문
八十三歲翁, 蒼波萬里中
一言胡大罪, 三黜亦云窮
北極空瞻日, 南溟但信風
貂裘舊恩在, 感激泣孤衷
- 번역문
여든 셋 늙은이가, 멀고 먼 푸른 바다 가운데 있구나
한 마디 말이 무슨 큰 죄이기로서니, 여러 번 쫓겨남에 또한 궁한 내 신세여
북녘 하늘 공연히 해를 바라보면서, 남쪽 바다 순풍이 올 것임을 다만 믿노라
담비갖옷 내려주셨던 옛 은혜가 있어, 북받치는 감정에 고독한 충정으로 슬피 우노라
- 해설
이 시를 지을 무렵, 송시열의 나이는 83세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시의 내용을 통해 연로한 인간의 쓸쓸함이 묻어나옴을 느낄 수 있다.
이 시가 지어진 맥락을 잠깐 살펴보자면,
1989년 1월, 숙의 장씨가 아들(훗날의 경종)을 낳았다.
원자(元子:세자 예정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인해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재집권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 사건이 곧 기사환국이다.
당시 송시열은 왕세자가 책봉되자, 시기적으로 너무 이르다는 것을 이유로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소를 올린다.
결과적으로 송시열의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오히려 송시열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제주도에 있던 송시열은 그 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올라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일생을 마감한다.
이 시는 서울에서 제주도로 압송되어 가던 중에 보길도에 잠시 내릴 일이 있었을 것이고, 그 때 바위에 새긴 것으로 짐작된다.
시기를 고려하였을 때 계절을 유추해본다면, 아마도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길목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햇살에 반짝거리는 푸른 바다를 바라보면서도, 그러한 바다가 아름다워 보였을리 만무하다.
어쩌면 스스로의 정치적 역정이 결말지점에 와있을 것이라는 슬픈 예감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멀고 먼 푸른 바다 가운데 있구나(蒼波萬里中)"라는 표현은 바로 그러한 심정에서 자연스레 표출된 구절일 것이다.
"한 마디 말이 무슨 큰 죄이기로서니(一言胡大罪)"는 아마도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소를 올린 일을 가리키는 것이라 짐작된다. 옳지 않다 판단되는 일에 대해 군주를 향해 상소하는 것은 신하된 자의 당연한 책분이다. 스스로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그러한 언행이 올바로 전달되지 않는 당시 조정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일지도 모른다.
"여러 번 쫓겨남(三黜)"과 관련하여 三을 '세 번'이 아니라 '여러 번'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송시열은 그의 인생에서 스스로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은거한 적은 많지만 외부의 압력으로 인해 삭탈관직을 당한 것은 두 번밖에 없기 때문이다. 첫 번째 유배는 2차 예송논쟁 때 남인들의 공격에 의한 것이었으며, 두 번째 유배가 곧 희빈 장씨의 아들을 왕세자로 책봉하는 것에 반대함으로써 발생한 것이다.
"북녘 하늘 공연히 해를 바라봄(北極空瞻日)"은 북쪽에 계신 임금(숙종)을 줄곧 그리워한다는 표현이다.
"남쪽 바다 순풍이 올 것임을 다만 믿노라(南溟但信風)"는 곧, 제주도에 있으면서도 임금이 자신을 다시 정계로 불러줄 것임을 굳게 믿는다는 이야기에 다름아니다. 그리고 이 구절은 이 시가 언제 지어졌는지와 관련하여 큰 힌트를 던져준다. 제주도로 압송되어 가던 중에 지은 것일 수도 있고 제주도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에 지은 것일 수도 있다. 두 가지 가능성 가운데, 이 구절의 내용을 고려하였을 때 아마도 제주도로 압송되어 가던 중에 지었을 것이라 판단된다.
"담비갖옷 내려주셨던 옛 은혜가 있어(貂裘舊恩在)"는 곧 효종과의 인연을 가리킨다. 송시열에게 있어서 효종은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효종은 1658년 12월에 송시열에게 담비로 만든 털옷(貂裘)을 하사한다. 효종에게 있어 송시열은 스승이기도 하였지만, 함께 북벌을 도모하였던 동반자이기도 하였다. 그런 그에게 담비로 만든 털옷을 하사한 것은 곧, 효종이 송시열을 얼마나 존경하고 신임하였는지 확인할 수 있는 일화이기도 하다.
그리고 "북받치는 감정에 고독한 충정으로 슬피 우노라(感激泣孤衷)"라는 표현은 곧 그러한 효종에 대한 송시열의 마음이 자연스레 우러나온 것이라 판단된다. 효종에게 송시열이 뜻깊었던 만큼 송시열에게 있어서도 효종은 매우 소중한 인연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효종이 급사함으로써 그들 사이의 인연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와 같이 이 시에는 멀고 먼 제주도로 귀양가던 한 늙은이의 안타깝고 외로운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1689년 송시열 관련 승정원 일기
국사편찬위원회 승정원일기 "1689년 2월 1일 儲嗣 문제에 대해 宋時烈이 불만의 뜻을 나타냈으니 承政院은 알고 있으라는 비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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