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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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가을 답사

김열(金說)
대표명칭 김열
한자표기 金說
출생일 1506년
본관 강릉(江陵)
임경당(臨鏡堂)
열지(說之)
시대 조선
국적 조선
김광헌(金光軒)
강릉최씨 현감 세번(世蕃)의 딸



김열(金說, 1506년 ~ ?)은 강릉 십이향현 중 일인인 조선의 문신이다.

생애

김열은 주원(周元)의 25세손이고 부정공파의 파조 경생(慶生)의 7세손이다. 자는 열지(說之)이고, 호는 임경당(臨鏡堂)이다. 부친은 진사 김광헌(金光軒)이고, 모친은 강릉최씨로 현감을 지낸 세번(世蕃)의 딸이다.

김열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재예(才藝)가 뛰어났다. 널리 배우고 독실하게 실천으로 유학을 흥기(興起)하는 것을 자기의 소임으로 삼았다. 과거의 뜻을 두지 않고 아우들과 더불어 경서(經書)를 강론하였고, 아무리 춥고 덥더라도 반드시 의관을 가지런히 했다. 부모의 뜻을 받들어 정성껏 봉양하고, 혹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반드시 부모에게 먼저 드린 후에 아우와 조카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중종조에 효렴과(孝廉科)에 천거되어 특별히 평강훈도(平康訓導)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김열과 임경당

김열의 집 앞에는 선친께서 손수 심은 소나무 수백 그루가 있었는데, 아우들과 함께 선친의 뜻을 받들어 이 소나무를 보호하고 기르는데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이에 김열은 도의지우(道義之友)로 사귀던 율곡에게 소나무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나의 선친께서 손수 심으신 것인데 우리 형제 모두가 이 집에서 저 소나무를 울타리로 삼고 지내고 있네. 그래서 이 소나무들을 볼 때마다 선친을 생각하곤 한다네. 이러한 소나무를 내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지키기 어려울 것 같아 도끼나 낫으로 베고 잘라 후손들에게까지 온전하게 전하지 못하고 없어질까 늘 두려운 마음뿐이라네. 그대가 이를 보호할 수 있는 교훈될 만한 말을 몇 마디 써주면 집안 사당 벽에 걸어 놓고 자손들로 하여금 늘 이를 보게 하여 가슴 깊이 새기게끔 하겠네.” 하니, 그때 홍문관교리였던 율곡이 「호송설(愁松說)」을 지어주었다.

지금도 금산리 종가에서는 그의 호에서 연유한 임경당이라 쓴 별당이 있고 율곡의 호송설 제판(題板)이 걸려있다. 이 임경당은 그 연대가 오래되고, 또한 조선 후기 개인 건축물로써 그 가치가 인정되어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후 추모사업

김열은 순조 8년(1808)에 김윤신과 함께 강릉 향현사에 배향되었다. 김열의 묘는 강릉부 서쪽 10리의 성산면 구산리 임좌(壬坐) 언덕에 있다. 묘소 인근에는 강릉김씨 부정공파 생원 김반석(金盤石), 진사 김광헌(金光軒), 임경당 김열(金說)의 전사 준비와 묘제를 위한 영모재(永慕齋)가 있으며, 매년 음력 9월 15일과 9월 25일 2차에 걸쳐 시제를 봉행한다.

공의 후손은 정산(鼎山) 상하리(上下里)의 임경당에 계속하여 기거하며 제현(諸賢)들의 시문을 함께 걸어놓고 임경당의 면모를 빛나게 하였다. 강릉 가까운 쪽에 있는 것을 ‘하임경당’이라 하고, 마을 위쪽에 있는 것을 ‘상임경당’이라 한다. 하임경당을 대개 ‘임경당’이라 부르고, 상임경당은 ‘진사댁’이라고도 부른다. 상임경당 내에는 율곡의 「호송설(愁松說)」을 새긴 현판과 추사의 아버지인 김노경이 쓴 ‘임경당(臨鏡堂)’ 현판이 걸려있다.


참고

도서

  • 박도식, 『강릉의 12향현 자료집』, 강릉문화원,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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