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0-901.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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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기 서구식 예복과 연회
Synopsis
Storyline
Episode 1: 일본의 개항과 서구식 예복
19세기 서양은 근대화를 이루고, '유럽공법'이라는 문명국 간의 법에 의거한 국제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1] 이 유럽적인 공법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미국인 선교사 월리엄 마틴(William A. P. Martin, 丁韙良, 1827∼1916)이 1864년 미국의 국제법 저서 『국제법 원리, 국제법학사 개요 첨부』를 한역(漢譯)하여 출판하면서 ‘만국공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고,[2] 그렇게 함으로써 이 공법이 온 세계만국에 적용되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3] 이러한 배경으로 일본은 1854년 미국에 의해 개항하여 불평등조약을 맺었고, 1868년 메이지 유신을 거치면서 근대화를 이룬다. 이들은 대규모 사절단을 서양에 파견하고, 그들의 서구세계 경험에 의거하여 서구식 대례복을 제정하게 된다.[4]
Episode 2: 거부감을 일으키는 예복
조선은 일본과 교린(交隣) 관계를 맺고 있었고, 대마도는 조선이 수여한 인장(印章)을 사용하고 있었다.[5] 그러나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은 일본 스스로를 황실로 칭하고, 대마도 도주의 명칭을 변경하였으며, 조선으로부터 받은 인장을 쓰지 않고 새로운 인장을 사용하게 된다. 이러한 변경된 정책을 조선에 알리고자 새로운 형식의 서계(書契)를 보내오지만, 조선입장에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사안이었고, 서계 접수를 거부하며[6] 갈등을 빚게 된다.
이 갈등은 고종의 친정 시작과 함께 우호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면서[7][8] 덮어지는 듯 하다가 바다를 건너온 일본측의 수고를 위로하기 위한 연향[9] 준비 과정에서 복식으로 인해 새로운 문제가 생긴다.[10] 일본은 새로 제정한 서구식 대례복을 입고 참석하고자 하였으나, 조선에서는 이전의 규례와 어긋나는 것이라며 계속해 거부하면서 결국 정상적인 교섭은 중단되고 만다.[11] 이후 일본측이 결렬된 협상 결과를 가지고 부산을 떠나 귀국하는 당일 강화도에서 운요호 사건이 일어나고,[12] 1876년 조일수호조규를 맺게 된다.[13]
사실 교린상의 연향의례에서 일본의 복색에 대해서는 특별히 규정한 바가 없었다.[14] 그런데 개항 직전 시기의 조선은 일본측이 착용하겠다고 하는 서구식 예복에 대해서 유독 강하게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병인양요(1866)[15]와 신미양요(1871)[16], 그리고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 도굴[17] 시도라는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 전국에 척화비를 세울 정도로 서양문물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형성된 것에서 기인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이에 서양복을 입고 새로운 관계를 요구하는 일본을 쉽게 인정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18]
Episode 3: 새로운 문물을 향한 탐방
1876년 조일수호조규 당시 회담모습을 스케치한 것으로 알려진 일러스트를 보면 전통복식을 입고 있는 조선 측과 서양복식을 입고 있는 일본 측으로 양자가 구별되고 있다. 이는 1856년 미국과 일본 간에 맺어졌던 조약 상황과도 같은 모습이다.[19]
조선은 개항 이후 1876년 4월에서 5월(음력)에 걸쳐 김기수를 수신사[20]로 하여 일본에 사절을 파견하였고, 이어서 1880년 6월부터 8월(음력)에 걸쳐 김홍집을 수신사로 하여 일본으로 파견한다. 그리고 1881년 4월초부터 윤 7월까지 일본의 문물제도를 시찰하고자 조사시찰단[21](소위 ‘신사유람단’)을 파견한다. 이 때까지 이들은 공무를 볼 때는 전통식 관복인 사모와 흉배가 달린 단령을 입고, 그 외의 상황에서는 전통식 편복을 입고 지냈다.[22]
1882년 8월 9일(음력)에 제물포를 출발하여 일본에 도착한 후 11월 27일(음력) 돌아오는 일정으로 박영효를 특명전권대사 겸 수신사로 파견한다. 박영효는 10월 26일(음력 9월 15일)에 동경 구단자카의 스즈키 신이치가 운영하는 스즈키 사진관에서 사진을 촬영한 바 있다. 이 사진에는 상투를 자른 짧은 머리에 양복차림을 하고 있다. 이는 이전의 수신사들과는 다른 행동이라 볼 수 있다.[23]
1883년 조미수호조약[24]의 비준을 위해 민영익을 전권대신으로, 홍영식을 부대신으로 하여 미국으로 견미사절단(보빙사)[25]을 파견하였다.[26] 9월 2일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시카고, 워싱턴을 거쳐 9월 18일 뉴욕에 머무르고 있던 미국 대통령을 예방하고 국서를 봉정하였다.[27] 대통령과의 만남은 『뉴욕 타임즈』에 자세하게 묘사되었으며,[28][29] 일러스트로도 묘사되어 『Frank Leslie의 그림 신문』 9월 29일자에 실렸다.[30] 여러 기록을 통해 보빙사 일행도 앞선 수신사 일행들과 마찬가지로 전통식 복장으로 공무를 행하고 평상시에도 전통식 편복으로 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이들은 조선 역사상 최초로 서양 현지에서 서구 복식 체계를 경험하였다는 것에서 특별한 점이 있다.[31]
Episode 4: 조선왕조의 복식 제도 개혁
조선은 서구식 예복을 받아들이기 전에 전통복식에 대한 간소화를 실시하였다.
1884년 윤 5월 24일 '관복(官服)은 흑단령(黑團領)으로 통일하되 착수(窄袖)로 만들도록 하라'[32]는 고종의 명이 있었고, 윤 5월 25일 '사복(私服) 중에서 도포, 직령, 창의, 중의와 같이 겹겹으로 입고 소매가 넓은 옷은 일하는데 불편하므로 약간 변통시켜서 오직 착수의(窄袖衣)와 전복(戰服)을 입고 사대(絲帶)를 대어 간편하게 하는 방향으로 규정을 세우라'[33]는 고종의 명에 따라 예조에서 6월 3일에 '사복 변제 절목(私服變制節目)'을 정하여 올린다.[34] 그러나 이 갑신년의 의제개혁은 많은 관료들과 유생들의 반발을 샀고, 고종은 일관된 입장으로 반대의견을 고수해 가면서 수개월간 의견대립이 지속된다.[35] 그러다가 10월에 갑신정변[36]이 일어났다가 실패하면서 선비 및 서민들은 다시 옛날 의복을 입는 것으로 돌아간다.[37]
의제개혁은 이로부터 10년 뒤 1894년에 다시 논의된다. 이 때는 갑오개혁(소위 '갑오경장')[38]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갑오개혁은 청일전쟁을 일으키고 승리한 일본에 의해 집권하게 된 정권에 의해 진행되었다. 초정부적인 기관인 군국기무처에서 안건을 올리면 고종이 윤허하는 형식으로 개혁이 진행되었다. 갑오의제개혁은 사회 전반적인 개혁과 함께 이루어졌으므로 좀 더 강한 추진력을 가질 수 있었다.[39] 그 내용은 갑신의제개혁에서 정하였던 것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흑단령 복장을 '대례복(大禮服)'이라 하고, 공무복을 '통상예복(通常禮服)'이라 한 것에서 차이가 있다. 통상예복으로는 주의(周衣), 답호, 사모, 화(靴)를 착용하게 하였다.[40]
다음해인 1895년에도 의제개혁 내용은 계속해서 다듬어지는 과정을 겪는다. 먼저 3월 29일 '공사예복(公私禮服)'에서 답호를 제외하고, 궁에 들어갈 때만 사모, 화(靴), 사대(絲帶)를 사용하도록 하고, 주의(周衣)는 모두 검은색으로 할 것을 명했다.[41] 그 다음, 8월 10일 '조신 이하 복장식(朝臣以下服章式)'이라는 규정을 발표하여 조복(朝服), 제복(祭服) 제도는 모두 그대로 유지하고, 갑오년 의제개혁에서 대례복만 정했던 복식제도의 형식을 대례복(大禮服), 소례복(小禮服), 통상복색(通常服色)으로 하여 근대적 개념에 대응시켰다.[42] 대례복은 소매가 넓은 흑단령, 사모, 품대(品帶), 화(靴)를 착용하고, 소례복은 소매가 좁은 흑단령(黑盤領窄袖袍), 사모, 속대, 화를 착용하고, 통상복은 주의(周衣), 답호, 사대(絲帶) 차림으로 하도록 했다.[43]
갑오의제개혁[44]과 을미의제개혁[45]이 일본의 간섭하에 진행된 개혁이라 하더라도 고종이 주도적으로 추진하던 갑신의재게혁의 내용을 이어받고 있으며, 전통식 복식제도의 바탕 위에 서양식 형식을 가미하는 것으로 진행된 것을 볼 수 있다.[46]
이러한 의제개혁이 어느 정도 성공을 이루고 있을 때 명성황후 시해사건[47]이 발생하였고, 갑신정변 때 부터 문제로 떠오르던 단발문제가 대두되면서 복식제도 개혁은 다시 한 번 백성들의 반발에 부딪히게 된다.
일본의 기록 중 '경성의 사정'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신문기사 내용을 보면, 1월 1일 단발령을 내려 국왕, 대원군, 관리, 병사가 단발하고 인민은 자유롭게 하는 것으로 내정한다고 기록하고 있다.[48] 그러나 본래 계획하던 것보다 이른 12월 30일, 유길준, 조희연 등과 일본인의 협박으로 고종부터 강제로 단발을 당한 것을 시작으로, 백성들도 체두관에 의해 마구 머리를 깎였다. 갑자기 강제적으로 시행된 단발령[49]에 거리에는 행인들의 발걸음이 거의 끊겼고, 결국 나라 전체가 마비되는 상황이 초래되었다.[50] 그리하여 결국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에 격분한 백성들이 전국각지에서 을미의병으로 일어났다.[51]
단발령 직후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하여 단발령 철회 조치를 내린다. 당시에 촬영된 것으로 알려진 고종의 상복 차림 사진에서 백립에 흰색 두루마기를 착용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 때는 이미 단발을 한 상태지만 백립을 쓰고 있는 모습으로 보아 망건을 사용하여 머리를 정리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고종이 단발에 동의하지 않았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옷차림이라고 볼 수 있다.[52]
단발령은 고종의 철회 조치로 인해 일시적으로 복구되지만, 점차 단발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조선인들에게는 단발이 개화의 상징 보다는 친일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아져서 의제개혁과 단발이 모두 시행되기까지는 시간이 더 소요되었다.[53]
Episode 5: 대한제국의 서구식 예복
Episode 6: 대한제국 황실 연향과 근대식 연회
Storytelling Network
Metaverse 구현 예시
Virtual Classroom: 대한제국기 서구식 예복과 연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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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議政府啓, …卽見東萊府使黃正淵狀啓, …則彼人之宴饗日諸條儀例, 預先講定云者, 俱違舊例, 亦涉叵測. …後弊所關, 有難遽行設宴" 『高宗實錄』 12년(1875) 3월 4일 辛丑;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1203004_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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