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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seung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2년 4월 26일 (화) 23:08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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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기 서양식 연회와 예복

Synopsis

개요 조선이 개항 이후 국제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궁중잔치는 전통식 연향과 근대식 연회라는 두 가지 스타일로 나뉘게 된다.[1]

Storyline

Episode 1: 일본의 개항과 서구식 예복

19세기 서양은 근대화를 이루고, '유럽공법'이라는 문명국 간의 법에 의거한 국제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2] 이 유럽적인 공법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미국인 선교사 월리엄 마틴(William A. P. Martin, 丁韙良, 1827∼1916)이 1864년 미국의 국제법 저서 『국제법 원리, 국제법학사 개요 첨부』를 한역(漢譯)하여 출판하면서 ‘만국공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고,[3] 그렇게 함으로써 이 공법이 온 세계만국에 적용되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4] 이러한 배경으로 일본은 1854년 미국에 의해 개항하여 불평등조약을 맺었고, 1868년 메이지 유신을 거치면서 근대화를 이룬다. 이들은 대규모 사절단을 서양에 파견하고, 그들의 서구세계 경험에 의거하여 서구식 대례복을 제정하게 된다.[5]

Episode 2: 거부감을 일으키는 예복

조선은 일본과 교린(交隣) 관계를 맺고 있었고, 대마도는 조선이 수여한 인장(印章)을 사용하고 있었다.[6] 그러나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은 일본 스스로를 황실로 칭하고, 대마도 도주의 명칭을 변경하였으며, 조선으로부터 받은 인장을 쓰지 않고 새로운 인장을 사용하게 된다. 이러한 변경된 정책을 조선에 알리고자 새로운 형식의 서계(書契)를 보내오지만, 조선입장에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사안이었고, 서계 접수를 거부하며[7] 갈등을 빚게 된다.

이 갈등은 고종의 친정 시작과 함께 우호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면서[8][9] 덮어지는 듯 하다가 바다를 건너온 일본측의 수고를 위로하기 위한 연향[10] 준비 과정에서 복식으로 인해 새로운 문제가 생긴다.[11] 일본은 새로 제정한 서구식 대례복을 입고 참석하고자 하였으나, 조선에서는 이전의 규례와 어긋나는 것이라며 계속해 거부하면서 결국 정상적인 교섭은 중단되고 만다.[12] 이후 일본측이 결렬된 협상 결과를 가지고 부산을 떠나 귀국하는 당일 강화도에서 운요호 사건이 일어나고,[13] 1876년 조일수호조규를 맺게 된다.[14]

사실 교린상의 연향의례에서 일본의 복색에 대해서는 특별히 규정한 바가 없었다.[15] 그런데 개항 직전 시기의 조선은 일본측이 착용하겠다고 하는 서구식 예복에 대해서 유독 강하게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병인양요(1866)[16]와 신미양요(1871)[17], 그리고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 도굴[18] 시도라는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 전국에 척화비를 세울 정도로 서양문물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형성된 것에서 기인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이에 서양복을 입고 새로운 관계를 요구하는 일본을 쉽게 인정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19]

Episode 3: 새로운 문물을 향한 탐방과 개혁

Episode 4: 대한제국 황실 연향

신축년 연향(진찬, 진연), 임진년 연향(4월 진연, 11월 진연)

Episode 5: 서구식 연회와 예복

고종황제 어극 40년 칭경예식, 청일전쟁, 러일전쟁, 원유회 무궁화와 오얏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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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1. 이정희, 『근대식 연회의 탄생』, 민속원, 2014, 15쪽.
  2. 김용구, 『세계관 충돌의 국제정치학―동양 禮와 서양 公法』, 나남출판, 1997, 49쪽.
  3. 조성윤, ‘만국공법(萬國公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09.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66389
  4. 이경미, 『제복의 탄생』, 민속원, 2012, 37쪽.
  5. 이경미, 『제복의 탄생』, 민속원, 2012, 44쪽.
  6. 김용구, 『세계관 충돌과 한말 외교사, 1866~1882』, 문학과 지성사, 2001, 149쪽.
  7. "議政府啓, 卽見東萊府使鄭顯德狀啓, …以爲, 對馬島主平義達書啓中, 以「左近衛少將」書來者. …大違格例. 令任譯等, 嚴加責諭, 使改修正呈納, 爲辭矣. …允之." 『高宗實錄』 6년(1869) 12월 13일 庚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0612013_002
  8. "右議政朴珪壽曰, …而謂以違式, 遽却其書, 至今多年, 仍無究竟。 海外異俗, 安得不致生嫌隙乎? 雖尋常朋友之間, 人遣書札, 拒之不納, 必當含慍, 而況交隣講好之地乎?" 『高宗實錄』 11년(1874) 6월 29일 庚子;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1106029_001
  9. "領議政李裕元曰, …聘使入送, 雖非靳施之事, 旣云書契, 更修以來, 則其相和之意, 於此可見矣。 …又曰, …而今若改修以來, 則從此可復講舊, 好矣." 『高宗實錄』 11년(1874) 8월 9일 己卯;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1108009_001
  10. "議政府啓, …而第其積年相阻之餘, 彼旣爲此幹事, 遠勞涉海, 交修隣誼, 則在我誠信之道, 合施拔例之擧. 令府使出往館所, 別設宴餉, 以示朝家慰恤之厚意." 『高宗實錄』 12년(1875) 2월 5일 癸酉;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1202005_002
  11. "議政府啓, …卽見東萊府使黃正淵狀啓, …則彼人之宴饗日諸條儀例, 預先講定云者, 俱違舊例, 亦涉叵測. …後弊所關, 有難遽行設宴" 『高宗實錄』 12년(1875) 3월 4일 辛丑;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1203004_002
  12. "議政府啓, …取見東萊府使黃正淵狀啓, …故該譯官以爲「禮服不可許接, 書契無以取見」云矣." 『高宗實錄』 12년(1875) 7월 9일 癸卯;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1207009_001
  13. 김원모, “운요호사건(─號事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6.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0358
  14. 이원순,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5.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1508
  15. 이경미, 『제복의 탄생』, 민속원, 2012, 99쪽.
  16. 김원모, “병인양요(丙寅洋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5.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3142
  17. 김원모, “신미양요(辛未洋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5.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2961
  18. 김원모,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사건(─南延君墓盜掘事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5.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8589
  19. 이경미, 『제복의 탄생』, 민속원, 2012, 99~10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