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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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phne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0년 9월 23일 (수) 14:35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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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호
1) 유형: 물품
2) 시대: 조선
3) 성격: 의복
4) 용도: 덧옷

--Daphne (토론) 2020년 9월 21일 (월) 11:27 (KST) ■문헌을 통해본 답호 ■답호의 형태변화

1. 문헌으로 본 답호 ‘답호는 元의 복식명’(褡護 ,元衣名)으로 남송 鄭思省의 詩의 에 기록되어 있는데 징기스칸 족 역사서인『集史』(1300-1304년 완성)의 미니어쳐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 답호의 最古 기록은 고려시대 말에 들어온 한어 학습서인 『老乞大』(1346)에서 찾을 수 있는데 高麗末부터 朝鮮後期까지 왕의 常服과 관리들의 단령안의 받침옷이나 철릭, 액주름 등의 袍 위에 덧입는 옷 으로 士大夫 이하 庶民에 이르기까지 널리 착용하였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전란을 거치면서 형태상의 변화가 있었다. 朝鮮時代 외국어 학습서에 보면 褡護 명칭으로 ‘大搭胡,褡 護,搭胡,搭忽’ 로 표기되어 있으며,『老朴集覽』(1517)에 ‘比甲’이란 명칭이 나온다. 褡護는 고려 말부터 국말까지 착용되었는데 世宗 26년(1444) 사은사謝恩使 유수강柳守剛에 의해 明帝가 사여한 왕의 常服인 단령, 답호, 철릭 일습으로 계절별로 3습이 들어와 王의 곤룡포의 裏衣로 착용되었는데 또한 출토유물에 서도 단령, 답호, 철릭 일습의 출토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褡護를 착장자에 따라 구분하면 왕王, 조신朝臣, 하급下級 군속群俗으로 구분할 수 있다. 참고문헌: 변지연, 『더그레에 관한 연구』, 서울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7. 참고문헌: 송미경, 『 조선시대 답호(塔胡) 연구 - 17세기 전기까지 - 』, 서울여자대학교, 2009.

2. 출토유물 자료로 본 답호의 시대별 형태 조선시대 17세기 초기까지의 ‘답호’는 반수의(半袖衣)로 포류(袍類)의 일종으 로, 『 조선왕조실록』에는 철릭 위에 입으며, 관복(官服) 으로 답호 위에 단령을 입는다. 전체적인 형태는 깃의 모양만 제외하고 단령과 동일하다. 이 장에서는 조선시대전기 남자묘에서 출토된답호의 형태에따라, 깃, 소매, 무, 고름등과같은 답호형태의 특징과직물을 살펴보려고 한다. 참고문헌: 변지연, 『더그레에 관한 연구』, 서울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7.

3. 조선시대 남자 袍類

(1) 답호 고려 후기부터 조선 후기까지 관리들이 상복안에 입거나 사대부의 겉옷 위에 덧입던 옷이다. 또한 조선 중기까지는 직령과 같되, 소매만 반수의 이지만 17세기를 지나면서 소매가 없어진다. 답호는 중국 원대에 등장한 의복으로 징기스칸(1162~1227) 역사서인 『집사集史』(1300~1304)의 미니어쳐에서 찾을 수 있는데, 우리나라 기록에는 고려시대 『원간노걸대 原刊老乞大』에 ‘대답호 大塔胡, 답호 褡護, 답호 塔胡, 답홀 塔笏’로 표기되어 있으며 더그레로 언해되어 있다. 고려시대 답호 유물로는 문수사의 답호(1346)와 해인사의 답호(1350~1362)가 있다. 곧은 깃에 반소매가 팔꿈치에 이르며, 옷길이는 발목까지 오고 옆선에는 안쪽으로 접혀 들어가 고정된 다중 주름의 무가 달렸으며 옆트임이 있다. 조선시대 답호는 조선 중기까지 왕의 상복과 관리들의 단령 안 받침옷이나 철릭, 직령등 포위에 덧입었다. 형태는 반수의로 곧은 깃 교임형에 옆선에 무가 달렸고 옆 트임이 있다. 기본 형태는 직령과 같되, 소매 길이가 짧은 것이 다르다. 답호에는 광다회 등의 실띠를 둘렀는데, 당상관 이상은 붉은색을 사용하였고 그 이하는 청색 계통의 것을 사용하였다. 직령과 유사한 형태의 답호는 임란 직후부터 서서히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답호’라는 명칭은 조선 후기에도 간편한 덧옷용 포를 지칭하는 데에 사용되어 그대로 유지되면서 옷의 형태상 변화가 나타난다. 즉, 소매와 직사각형 무가 사라지게 된다. 이때의 답호 형태에 대해 『사례편람』에는 ‘무수창의’라고 하였는데, 말 그대로 ‘소매가 없는 창의’ 라는 옷이다. 창의는 뒤트임이 특징인데 소매가 없고 뒤가 트였다.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의 탐릉군묘에서 출토된 답호 유물에서 확인된다. 또한 『영조실록』에 의하면 답호가 영조의 수의로 사용되었으며 이를 ‘소매 없는 반비’라고 하였다. 그러나 후대에 갈수록 답호는 전복, 괘자가 혼동되기도 하였다. 영조 재궁의대에 전복과 답호가 동시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서로 형태가 다른 의복이었으나 순조 재궁의대에는 쾌자만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순조 이후 답호는 괘자와 같은 형태로 괘자로 집약되었다. 고종 25년(1888)직강 김영선이 “답호와 전복은 그 제도가 달랐는데 답호령을 내리고 전복을 입으라고 한 것은 잘못되었다”고 하였다. 전복은 깃 없는 대금형의 긴 옷으로 허리 아래로 뒤트임이 있고 짧은 옆트임이 있는 옷이다. 괘자는 전복 형태에 깃머리가 둥근 방령에 동정이 달린 옷이다. 당시 답호도 뒤트임이 있고 소매가 없는 덧옷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동일한 것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직령과 같은 형태의 답호 유물은 강대호(1541~1642)의 묘에서 출토된 것이 가장 늦은 시기의 유물이며 무수창의 형태의 답호 유물은 탐릉군의 묘에서 출토된 것이 가장 대표적이다. 참고문헌: 『한국복식사전』, 민속원

4. 문헌과 유물을 통한 답호의 형태변화시기와 사라진 원인규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