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2019-F
최부의 표해록
최원재, 교육학 전공
큐레이션 개요
큐레이션의 기획은 조선 성종조 금남 최부가 표류한 사건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가 인솔하는 42명의 조선인들은 제주에서 출발하여 풍랑을 만나 명나라 남동부의 닝보에 표착하였다. 이후 항주에서 경항운하를 타고 북으로 호송되어 베이징에서 황제를 알현한 후 요동을 거쳐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이번 큐레이션은 이 여정에서 나타나는 내용과 관련된 조선의 문화재를 소개한다. 그의 여정과 직접적으로는 관련이 없더라도 지도, 중국, 표류, 선비정신 등의 키워드로 큐레이션을 진행하였다.
최부
관서재
해남의 입장에서 보면 금남 최부의 가치는 그의 문필가로서의 역할보다 더 큰 것이 있다. 즉 사상가이자 교육자로서의 삶이다.
해남정씨[1]는 금강동(현 해리)에서 살았는데 해남정씨와 통혼한 5가문도 모두 금강동에 자리 잡아 이후 금강동은 해남 사족들과 학문의 중심지로 부각된다. 최부는 이곳에 와서 '관서재'를 열어 많은 후학들을 양성하게 되는데 이 때문에 금남을 해남 인물사의 서막을 연 사람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외손자 유희춘에 의하면, "해남은 본디 바닷가에 치우쳐 있어 옛날에는 문학과 예의(禮儀)도 없었고 거칠고 누추한 고을이었는데, 자신의 외할아버지가 처가인 해남에서 노닐면서 우선 세 제자를 길러냈다"고 했다. 첫째는 진사시에 합격한 어초은(漁樵隱) 윤효정(尹孝貞), 둘째는 조선 중기의 대문호이던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의 숙부인 임우리(林遇利), 셋째는 유희춘 자신과 자신의 형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큰 명성을 얻었던 유성춘(柳成春)의 아버지인 성은(城隱) 유계린(柳桂隣)[2]이었다. 호남을 대표하는 세 가문이 바로 금남의 문하에서 나왔음만 보아도 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가 짐작할 수 있다. [3]
해남정씨와 결혼해 해남인이 된 금남 최부는 호남의 4대 학맥 중 한 맥을 형성하며 해남의 학문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그의 학풍은 귤정공 윤구와 석천 임억령, 미암 유희춘에 이르러 화려하게 꽃을 피운다. 변방에 지나지 않던 해남이 조선시대에 이르러 학문과 문예의 고장으로 이름을 떨칠 수 있었던 것도 금남 최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실학사상의 선구자로도 꼽히는 금남은 1454년 나주에서 태어난다. 문장과 경술이 뛰어났던 금남은 김종직 문하에서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과 함께 수학하게 된다. 금남 최부는 나주 출신이지만 해남정씨 무남독녀와 결혼하면서[4] 해남과 인연을 맺게 된다. 결혼 후 해남동문 밖 부촌동(지금의 해리)에 거주하게 된 금남은 이곳에 관서재를 짓고 후학을 양성한다.[5]
최부 학문 계보
금남 최부(錦南 崔溥:1454~1504)의 학문과 사상의 영향은 조선의 땅 끝 벽지인 해남 땅에 유학(儒學)과 절의정신을 꽃피게 했던 결정적 단서를 마련해준다. ‘표해록’의 저자로, 나주 출신이면서 처가 고을인 해남에서 활동하며 살았던 이유로 그곳에서 많은 제자를 양성하여 해남에 어느 곳보다 뛰어난 유교문화를 전파하고 진리와 정의에는 절대로 굽히지 않는 높은 절의정신의 전통을 세워주었다.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서울에서 벼슬하던 최부는 호남 명문 집안인 해남 윤씨 가문에 혁혁한 제자를 두었으니 그가 바로 어초은 윤효정(漁樵隱 尹孝貞)이다. 연동마을에 윤씨들이 들어온 것은 어초은 윤효정(漁樵隱 尹孝貞 1476~1543)대부터이다. 윤효정은 해남의 최부 선생에게 글을 배우기 위해[6][7] 강진과 해남을 오가다 해남의 대부호인 정귀영의 마음에 들어 그의 사위가 됐다. 터가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아야 큰 인물이 나온다는 생각에 명당자리를 찾아다니다가 백련동(연동마을)을 찾아냈다. 전남 강진 일대에서 살던 윤씨들은 연동으로 들어와 마을을 꾸몄다. [8] 갑자사화와 을사사화에 절의와 정도를 지키다 효수 당했던 스승인 금남의 정신을 이은 윤효정은 진사과에 합격한 뒤로 패악한 정치에 발을 끊고 고기 잡고 풀 베는 일에 숨어버리고 세상과 단절하는 의리를 지켰다. 윤효정의 아들 윤구(尹衢)는 호가 귤정(橘亭)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부교리의 당당한 문신이었으나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더 이상 벼슬을 하지 못하고 절의를 지키다가 세상을 떠난다. 윤구의 증손자가 바로 고산 윤선도(1587~1671)다.
최부의 외손자에는 미암 유희춘[9]이 있다. 미암도 사화에 연루되어 20년 넘게 귀양살이로 젊음을 바쳤다. 문인·학자에 절의정신이 높던 미암도 해남 출신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성장한 윤선도는 정의감과 절의정신이 몸에 배었고, 나라가 바르게 가지 못하거나 나라의 예(禮)에 어긋남이 있으면 곧바로 상소하고 항의하는 직신(直臣)의 정신을 올곧게 지켰다. 그래서 전후 16년이 넘는 귀양살이의 고초를 겪어야 했다. 윤효정·윤구의 정통을 이은 후손들도 만만찮은 존재가 많다. 윤구의 아들 윤의중(尹毅中)은 좌참찬이라는 고관을 역임하고 그 아들 윤유기(尹惟幾)는 강원도 관찰사이니 바로 고산의 백부이자 양아버지였다. 어머니 순흥 안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윤선도는 자가 약이(約而), 호는 고산, 해옹(海翁)으로 많이 알려졌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명민했던 윤선도는 10여세의 나이에 경사(經史)는 물론 의약·복서·음양·지리 등의 서적을 두루 공부하여 문장과 식견이 남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높은 수준에 올랐다고 한다.
탐진최씨 금남 최부(1454~1504)가 강진과 해남등에 유학의 씨앗을 뿌리며 본격적으로 제자를 양성하고 학파를 형성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최부의 외손자인 대유학자 유희춘은 ‘자신의 외할아버지가 처가인 해남에서 윤효정, 유희춘 자신, 유계린등을 가르치면서 해남이 확 바뀌었다’고 적었다. 최부가 이 지역에 미친 학문적 영향이 대단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10]
지금 해리 금강골 해촌서원에는 해남육현이 모셔져 있는데 그들은 금남 최부 귤정공 윤구 미암 유희춘 석천 임억령 취죽헌 박백응 고산 윤선도다. 최부는 사람파의 영수 김종직의 문인으로 해남정씨와 결혼해 처향인 해남으로 거처를 옮겨 해남의 학문적인 구심이 됐다. 최부는 동국통감 편찬에 참여했고 중국표류기인 표해록을 기록했으며, 무오사화로 참형된 후 중종 때 승정원 도승지로 추증됐다.
최부는 윤효정, 임우리, 유계린을 수제자로 삼았고 이들은 호남학맥 중 한 파를 형성했으며 해남을 문헌지방으로 만들었다. 최부는 선산 유씨 유계린을 사위로 맞아 유성춘과 유희춘을 배출한다. 최부는 해리에 거주했으나 그의 후손들은 마산면 상등리로 거처를 옮긴다. 귤정공 윤구는 어초은 윤효정의 아들이다. 윤효정은 최부에게 수학했으며 최부와는 사촌동서간이다. 윤효정은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출사하지 않고 그의 자식들에게 학문을 물려주었는데 그중 귤정공 윤구는 중종 때 교리에 올랐으나 기묘사화로 화를 입고 삼산면 나범리에 유배됐다. 그는 최산두 유성춘과 함께 호남 3걸로 불리며 뛰어난 문장을 자랑했다.
해남윤씨는 윤효정 이후 5대에 걸쳐 문과 9명 무과 15명의 급제자와 34명의 관직 진출자를 내면서 해남정씨처럼 해남을 기반으로 인근지역 광산이씨, 나주나씨, 반남박씨, 여산송씨 등과 통혼해 호남으로 세력을 넓혀갔다. 또한 윤효정의 손자대에 미암 유희춘과 석천 임억령과도 통혼을 맺어 해남정씨를 통해 맺어진 통혼관계가 3∼4대 후에 해남윤씨를 통해 다시 재결합했다. 해남윤씨는 이후 연동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석천 임억령은 해남정씨와 통혼을 한 임수의 손자다. 임수는 우원 우형 우리 우정 4형제를 두었는데 이들 모두 해리서 태어났다. 그중 우형의 가계가 가장 번성했는데 해남육현인 석천 임억령을 비롯해 천령, 만령, 백령, 구령 등 5형제 중 억령 백령 구령이 관직에 진출했다. 이들은 장흥임씨 임희성, 무안박씨 박안, 담양 김성원, 광산 고맹영, 영암 최경창 등과 통혼을 했다.
석천 임억령은 박정의 문인인데 박정은 김종직의 문하로 임억령 역시 김종직의 학맥을 이어받았으며 문학쪽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담양 성산 식영정과 해남의 마산면 장촌리에 마포별업을 세우고 제자들을 길렀는데 제봉 고경명, 취죽헌 박백응, 정언홍, 예양군 임발영, 윤홍준·의중 형제, 민구, 정운 등이다. 임씨들은 마산면 장촌리, 영암, 경기, 충청으로 이거했다.
미암 유희춘은 최부의 외손자다. 그의 아버지는 순천인 유계린(선산 유씨)으로 최부가 무오사화로 유배되자 순천으로 돌아가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그의 아들인 성춘은 중종 때 개혁정치에 참여했다가 28세에 요절했으며 희춘은 별시문과에 급제해 관직에 진출했으나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돼 19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다가 선조 때 석방됐다. 그후 교리 부제학 전라관찰사 등을 역임했으며 을사명현으로 선조 때 크게 문명을 떨치며 호남지방의 학풍을 주도했다.
성춘의 후손은 장성으로, 희춘의 후손은 담양으로 이거해 해남과 관계가 소원해졌으며 희춘은 해남윤씨를 사위로, 장성의 하서 김인후의 딸은 며느리로 맞았다. 취죽헌 박백응은 선산임씨와 통혼한 무안박씨 박안의 손으로 석천 임억령의 생질이며 그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박백응은 진사로 효성과 학문이 뛰어나 진안 현감을 지냈고 동생 중응은 시에 능했다.
해남정씨 이후 해남을 대표하는 성씨로 해남윤씨와 더불어 여흥민씨가 있다. 해남정씨와 혼인한 여흥민씨 민중건은 오(鰲)와 구(龜) 그리고 열녀를 자녀로 뒀다. 구는 석천임억령에게 수학했으며 1549년 해남향교 대성전 중수시에 실질적인 책임자인 감역을 담당했으며 이후 16∼17세기에 해남 향교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재지사족으로 자리 잡았다.
여흥민씨는 보은이씨, 원주이씨, 해남윤씨, 김해김씨, 언양김씨, 무안박씨, 장흥임씨, 순천김씨 등 해남을 근거로 한 성씨들과 혼인관계를 맺으며 해남지방에서 해남윤씨와 함께 큰 성씨를 이뤘다. 여흥민씨는 마산면 화내리로 거처를 옮겼다.
16세기 이후에는 해남정씨와 통혼관계를 맺은 8개 성씨 이외에 사화를 피해 해남으로 낙남한 보은이씨, 원주이씨, 순천김씨, 김해김씨, 선신김씨, 동복오씨, 연안이씨, 충주한씨 등이 해남의 다수성씨로 자리잡게 된다.
최부는 윤효정, 유계린, 임우리 등을 가르쳤다. 그의 제자들은 후일에 호남 사림의 주축이 되었다. 윤효정의 아들 윤구는 문과에 급제하여 기묘명현이 되었다. 유계린은 최부의 사위가 되어 김굉필을 사사한 후 아들 유성춘·유희춘을 두었다. 그리고 최부의 외손자 나사침은 정여립 사건 때에 희생되었다. 이발의 아버지 이중호도 최부의 학맥을 이은 사람이다.
사화에 연루되지는 않았지만 호남 사림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으로 송흠이 있다. 그는 연산군 학정에 반발하여 관직을 버리고 영광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는데, 양팽손·나세찬·송순·안처순 등이 배출되었다. 이 외에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이재인이 관직을 그만 두고 장성에 은거했고, 정여해는 화순에 은거했다. 옥과 현감 김개가 지역의 사림과 유배 중인 사람들과 합세하여 군대를 일으켜 반정을 준비하다가 중종 반정이 일어나자 그만 두었다. 이는 이미 전라도 안에 사림파에 의한 정치쇄신의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었음을 알려준다. [11]
16세기 사화기에 호남지방에서는 많은 문인학자들이 배출됐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앞서 언급하였던 해남정씨 정호장 집안을 기반으로 하여 성장하였던 인물이었다는 것은 눈여겨볼 만하다. 해남정씨 그리고 이들 문인들의 혈연관계로 인해 금남 최부, 미암 유희춘, 어초은 윤효정, 석천 임억령 등 당대의 문인학자들이 서로 사림의 한 학파를 이룰 정도로 호남사림의 중요한 인맥을 형성하기도 한다.
해남 윤씨가는 최부를 중심으로 한 학문적 혈연관계를 맺는다. 금남 최부(1454~1504), 미암 유희춘(1513~1577), 석천 임억령(1496~1568) 등은 어초은 윤효정이 최부로부터 수학하였듯이 서로 학문적 혈연관계를 맺게 되는데 이들은 후에 호남사림의 대표인물이 될 뿐만 아니라 해남의 육현(六賢)으로 추앙받게 된다. 해남윤씨는 학문적으로는 김종직의 문인인 최부를 그 연원으로 삼았기 때문에 자연히 사림파적 성향을 띄었다. 이로 인해 여러 인물들이 16세기 이후 당파로 연결되면서 사화로 인한 심한 부침(浮沈)을 겪게 된다.호남의 사림은 낙향한 재지품관과 이주한 사족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김종직과 김굉필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중종반정 이후 중앙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였다. 사림은 여러 계보로 이어져 온 것을 볼 수 있는데 윤구는 최부의 계열로 이 계열은 최부→윤효정, 임우리, 유계린→윤구, 윤행, 윤복, 유성호, 유희춘→이중호로 이어진다. 최부는 1477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신종호, 김굉필 등과 교유하였다. 그는 무오사화 때 스승인 김종직의 문집을 가지고 있는 것이 들통나 단천에 유배되었으며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처형되었다. 최부가 언제 김종직의 문인이 되었는지 명확히 알 수 없으나 그의 처향(妻鄕)인 해남에 거주하면서 사위인 유계린(유희춘의 아버지)을 비롯하여 윤효정, 임우리 등을 가르쳐 김종직의 학문이 정해진 것으로 보고 있다.[12]
필자는 몇해 전에 호남유학의 전개과정을 설명하는‘17~8세기 호남유학의 전통’이라는 논문에서 호남에 최초로 학문과 의리의 씨앗을 뿌린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1384~1455)[13]를 이어 본격적으로 제자를 양성하고 학파를 형성한 학자로는 금남 최부라는 주장을 편 적이 있다. 금남은 나주 태생이지만 해남의 정씨(鄭氏)에게 장가들면서 주로 해남을 근거지로 활동하였다. 해남 출신인 외손자 유희춘에 의하면, 해남은 본디 바닷가에 치우쳐 있어 옛날에는 문학과 예의(禮儀)도 없었고 거칠고 누추한 고을이었는데, 자신의 외할아버지가 처가인 해남에서 노닐면서 우선 세 제자를 길러냈다는 것이다. 첫째는 해남윤씨로 진사시에 합격한 어초은(漁樵隱) 윤효정(尹孝貞), 둘째는 조선 중기의 대문호이던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의 숙부인 임우리(林遇利), 셋째는 유희춘 자신과 자신의 형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큰 명성을 얻었던 유성춘(柳成春)의 아버지인 성은(城隱) 유계린(柳桂隣)을 가르쳐냈다고 하였다. 호남을 대표하는 세 가문이 바로 금남의 문하에서 나왔음만 보아도 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가는 금방 짐작할 수 있다.
해남윤씨 윤효정은 윤행(尹行)·윤구(尹衢)·윤복(尹復) 등 3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문명을 날리던 고관들이었고, 그 후손으로 고산 윤선도, 공재 윤두서로 이어지는 명문의 학문가를 이룩했다. 석천 임억령의 형제들 또한 조선의 명사들이 많았고 호남문단에 석천이 미친 영향 또한 대단했음은 이미 잘 알려진 일이다. 유성춘·유희춘 형제는 금남의 외손자로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 더구나 금남의 사위에는 나주나씨의 나질이 또 있다. 이분의 아들 나사침은 호가 금호(錦湖)로 효행과 학행으로 천거받아 현감을 지냈는데 금남의 외손자다. 금호는 나덕명(羅德明)…나덕헌(羅德憲) 등 여섯 아들을 두었다. 모두 금남의 외증손들이면서 이른바 ‘육룡(六龍)’이라는 별호를 들을 정도로 명망이 큰 문사들이었다. 호남의 웅도인 나주 일대에 그들이 끼친 영향을 생각하면 금남의 학문과 사상의 영향은 바로 호남유학의 ‘개산조(開山祖)’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당시는 영광땅이나 지금은 장성땅에 지지당(知止堂) 송흠(宋欽·1459~1547)이 있었다. 금남보다 5세 연하지만 과거에 합격한 것은 금남보다 9년 뒤여서 송흠은 금남을 대선배로 모시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 같은 시기 같은 조정에서 벼슬하던 두 사람은 같은 호남출신이라는 인연도 있어 자주 내왕하면서 아주 가까이 지낸 것으로 기록에 나온다. 벼슬 초기에 송흠은 휴가를 받아 고향에 왔고, 고향에 체류한다는 금남의 소식을 듣고 금남의 고향집으로 송흠이 인사차 찾아갔다고 한다. 금남이 물었다고 한다. 서울에서 고향까지의 교통편은 무엇이었느냐고. 나라에서 관인에게 내주는 역마를 타고 왔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대 집에서 우리 집까지의 교통편은 무엇이었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마찬가지로 역마를 타고 왔다고 했다. 금남은 벌컥 화를 내며 나라에 고발하겠다고 송흠을 꾸짖었다고 한다.
이유인즉, 서울 집에까지는 휴가니 의당 역마를 사용할 수 있으나, 자기집에 찾아옴은 사사로운 일이니 역마를 타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벼슬아치가 공사를 구별하지 못함은 절대로 안된다고 하면서 가까운 고향 후배를 끝내 나라에 고발하여 문책을 받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바르고 청렴하며 공사에 엄격했던 분이 금남이었고, 이런 경계를 받은 송흠은 그 일을 계기로 세상에 이름난 청백리로 고관대작의 벼슬살이를 했다고 전해진다.
송흠의 제자에는 호남의 대학자가 많다. 하서 김인후, 면앙정 송순, 학포 양팽손 등이 대부분 송흠 문하에서 젊은 시절에 학문을 익힌 분들이었다. 송흠의 학문과 사상 및 청백리 정신이 최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보면 호남의 석학들은 대부분 최부의 영향을 어느 정도는 받았다고 추정하기 어렵지 않다.
‘표해록’은 1769년에 일본에서도 번역되었고 최근에는 영문이나 중국어로도 번역되어 세계적인 여행기록으로 정착한 지 오래다.
최부는 직계 후손들의 수도 적고 세력도 미약하다. 금남 최부의 고향 마을에서 생가 터를 확정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나 그는 ‘표해록’을 통해 일찍이 세계화정신을 이 땅에 뿌렸고, 연산군의 패정과 고관대작들의 비리를 폭로하다 갑자사화로 처형당했다. 그런 만큼 최부의 고향 나주는 그 외로운 의리정신은 묻혀버릴 수 없는 이 땅의 사상적 유산으로 현양하기에 충분한 곳이다. 의리 높고 박학한 학자 금남 최부의 혼과 사상을 충분히 이해하고 활용하는 일만 우리들의 몫으로 영원히 남아있다. [14]
김종직의 직계 제자가 나주가 고향인 탐진최씨 최부(1454~1504)였다. 최부의 처가가 해남의 해남윤씨 집안이다. 최부가 언제 김종직의 문인이 되었는지 명확히 알 수 없으나 그의 처가인 해남에 거주하면서 사위인 유계린(유희춘의 아버지)을 비롯하여 윤효정등을 가르쳐 김종직의 학문을 전한 것으로 기록이 돼 있다. 여기서부터 행당 윤복선생의 집안이 등장한다. 윤효정은 행당 윤복선생의 어버지이다. 그는 윤구, 윤행, 윤복등 세아들을 두었다. 윤효정은 원래 도암면 강정리 덕정동(德井洞)에서 살다가 해남의 향족인 정호장의 사위가 되어 해남으로 이주했다. 해남 녹우당을 지은 사람이라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윤효정은 훗날 해남윤씨를 명문가의 반석위에 올린 주인공이 된다. 세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해서 벼슬길에 올랐고, 다시 김종직으로 가면 윤효정의 스승이 최부이고, 최부의 스승이 김종직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윤효정은 정몽주에서 김종직, 김굉필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유학사의 정통을 계승한 사람이었다. 윤효정의 후손들도 당연히 최부의 학문을 계승하게 된다. 역사학계는 최부에서부터 윤효정, 윤구로 이어지는 학맥을 최부의 계열이라고 분류한다. 이 계열은 최부→윤효정, 임우리, 유계린→윤구, 윤행, 윤복, 유성호, 유희춘으로 구도가 그려진다. 그럼 이 계열이 어떻게 영남의 퇴계학문과 연결됐는지 알아보자.[17]
호남의 사족들을 학맥이나 당파로 구분지어보면, 우선 동인계는 최부, 이중호, 정개청을 연원으로 하는 세력이 있다. 이들은 인조반정 이후 허목⋅윤선도 등의 남인계 인사들과 연결이 된다. 반면 서인계는 김인후, 기대승, 이항과 교류했던 이들이 한 축을 차지하고, 이이와 성혼의 문인들이 다른 한 축을 차지한다. 이들은 나중에 노론과 연결된다. 정치적 성향에 따라 나주 사족들을 나누어 보면 동인계(토착세력)와 서인계(이거세력)로 구분할 수 있다. 우선 동인계는 최부를 시작으로 나질과 그의 아들 나사침으로 이어진다. 또한 최부의 제자가 해남의 윤효정이었는데, 그의 아들 윤구는 남평의 광산이씨 이중호를 사위로 맞이하였다. 이중호는 이발의 아버지이자 나사침의 스승이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이발은 선조대에 있어서 동인⋅북인계 사림의 영수로서 반대편에 있었던 서인계 정철과 경쟁관계에 있었다. 그로인해 기축옥사 때 이발의 집안은 큰 피해를 입게 된다.
또 다른 동인계 인물로는 나주 출신의 정개청이 있다. 그는 고위관직을 역임하지는 않았지만 호남 내에서의 입지는 컸다. 화순, 함평, 보성 등의 유력한 사족들이 그의 제자였기 때문이다. 나주에서는 나사침의 아들이었던 나덕준⋅덕윤⋅덕현 등이 정개청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나덕준 형제들은 나중에 정개청을 경현서원의 초대 원장으로 모신다.
서인계의 경우, 이항의 문인으로는 의병장 언양김씨 김천일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그는 정개청을 이어 경현서원 원장에 임명되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양산숙⋅양산룡 등에 의해 의병장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기대승의 문인이자 임진왜란 때 김천일과 함께 활동했던 홍천경도 있다. 그는 정개청 등에 대항하면서 기축옥사를 전후로 한 때에 나주 지역의 사론(士論)을 주도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홍천경, 김천일 외에도 박순의 영향력도 컸다. 나주의 서인계 사림들은 월정서원을 건립하여 스승이었던 박순을 모셨다.[18] 최부계열[19] 영호남사림과 최부[20]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content_id=cp080600090001&print=Y
탐라시
허벅으로 물 긷는 기록은 최부(崔溥, 1454~1504)의 <탐라시 삼십오절(耽羅詩 三十五絶)>의 '허벅진 촌 아낙네 물 길러 샘으로 가고(負甁村婦汲泉去)'라는 구절은 15세기에 허벅을 지고 물을 긷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허벅은 물 긷는 용구로서 비교적 먼 거리를 왕래해야 하기 때문에 목이 좁다. 대구덕 안에 허벅을 앉히고, 물이 든 허벅의 입구를 새(茅)로 틀어서 막는다. 돌길이기 때문에 찰랑대는 물이 밖으로 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허벅의 구멍을 막는 것이다. 또 허벅은 다른 용도로도 쓰인다. 만일 사돈집에 상(喪)이 났을 때 상가에서 수고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팥죽을 쑤어갈 때도 허벅은 한몫을 한다. [24]
제주도 연등절에 관한 기록으로 현재 가장 오래된 것은 1487년 최부의 「탐라시 삼십오절」이다. 제주도의 연등하는 풍습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인 최부의 「탐라시 삼십오절(耽羅詩三十五絶)」에서는 15세기 후반 사찰에서 연등이 이루어졌음이 나타난다. 「탐라시 삼십오절」은 1653년의 이원진의 **탐라록**에 삽입되어 전해지며, 또 1681년에는 이증도 **남사일록**에 옮겨 놓고 있다. 「탐라시 삼십오절」은 최부가 제주도 활동 중인 1487년에 쓴 글이다.
嫌將歲月虛抛擲 세월은 헛되이 버려지기 싫어 照里鞦韆傳自昔 줄다리기와 그네뛰기는 예부터 전해오고 僧刹了無香火時 절에는 향화가 끊이지 않고 피어오르고 騈闐簫鼓燃燈夕 연등 저녁이면 퉁소와 북 소리도 패를 지어 가득하네.김찬흡 외 옮김, **역주탐라지**(푸른역사, 2002), p.24-25.
최부는 연등날 밤 사찰에서 행해지는 제주도의 연등 풍속을 묘사하였다. 줄다리기와 그네뛰기가 예로부터 전해져 지금도 시행되는 모습에서 세월은 헛되이 버려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듯이, 연등회의 풍속도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말하려 한다. 연등날 저녁이면 절을 찾는 사람들로 향불이 끊이지 않고 피어오르고 퉁소와 북을 동원하여 잔치를 즐기는 사람들이 가득하다고 하였다. 절에 모여 향을 공양하고 악기를 동원하여 왁자지껄한 연등날 저녁을 즐기는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다. 이는 백희가무로 온 나라가 잔치 분위기였던 고려시기 연등회의 풍속이 아직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음을 표현해주고 있다. 국가적으로는 상원연등회가 금지된 시기였으나 민간에서는 고려시기의 연등 풍속의 특징을 잃지 않고 북과 퉁소로 흥을 돋우며 사찰에서 놀이가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
줄다리기와 그네뛰기는 풍작을 기원하는 놀이였다. 그네뛰기는 봄이 되면 여자들이 생산의 의미나 풍작의 주술적 의미를 담고 하던 놀이였다. 고려시대에는 궁중과 상류사회에서 성행하였고 백희가무에서 그네뛰기를 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양반층에서 체통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멀리하였으나 민간에서는 평상시에도 즐겼다. 줄다리기는 정월 대보름을 전후하여 풍작을 기원하는 농경의식이다. 제주도 연등 풍습을 표현한 최부의 시각에서도 연등회가 제천기농(祭天祈農)의 성격을 이어가고 있음이 나타나고 있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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