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정의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은 6.25 전쟁 당시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학살 과정과 결과
1950년 7월 23일 정오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 마을에 소개명령이 떨어졌다. 이에 주곡리 마을 주민들은 영동읍 임계리로 피난하게 되고 25일 저녁 주곡리, 임계리 주민, 타지역 주민 500~600명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게 된다.
26일 4번 국도를 통해 황간면 서송원리 부근에 도착한 피난민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국도에서 경부선 철로로 행로 변경, 피난을 계속하던 중 미 공군의 폭격과 기관총 사격에 의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된다. 미군의 공격을 피해 피난민은 노근리에 있는 개근철교(쌍굴) 밑으로 피신하였고, 미 육군은 쌍굴 밑으로 피신한 피난민들에 대해 26일 오후부터 29일 오전까지 기관총 및 박격포 사격을 전개하였다.[1]
미 육군은 민간인 피난민 속에 북괴군들이 잠입했다고 오인하여 폭격과 기관총 발사로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고 밝혔다. 1994년에 구성된 '노근리 사건 대책위원회'에서는 사망자 135명,부상자 47명 총 182명의 희생자를 확인했으며, 400여명의 희생자가 대부분 무고한 민간인들이었다. 현재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20여명이다.
사건 경과
군인신분이라 진급실패를 우려한 가해자들의 은폐로 오랫동안 덮여 있었지만, 1960년도에 노근리사건 피해자인 정은용씨가 미국정부가 서울에 운영하던 주한미군소청사무소에 손해배상과 공개사과를 요청하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1994년도에 노근리 미군 민간인 학살 대책위원회를 설립했고, 20 여 차례 이상 미국 정부와 미국 상하의원,그리고 한국정부와 국회에도 진정서를 제출했다. 1994년4월에 노근리학살로 가족을 잃은 정은용 노근리사건 대책위원장이 노근리사건을 고발하는 책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를 출판하였다. 이 소설 출판을 노근리 미군 민간인 학살대책위원회 대변인이자 기획위원인 정구도씨가 내외신언론기관을 대상으로 노근리사건 홍보를 적극 전개했다. 연합뉴스, 한겨레, AFP, 시사저널 등에서도 취재보도하면서 노근리학살의 진상이 점점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울러 정구도 대변인은 진실규명을 피해자 증언채록, 노근리 학살이 있었던 기간의 조선인민보 신문기사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소장하고 있는 미군작전기록을 수집하여 노근리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1기병사단이 노근리학살을 일으켰던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객관적인 증거들을 확보하고 노근리사건에 대한 역사학 논문과 국제법 논문도 발표하였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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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미디어
학살 당시 사진
매체 속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 작은연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