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기
인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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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명 | 김민기 |
성별 | 남 |
출생일 | 1951년 3월 31일 |
출생지 | 전라북도 이리시(현 익산시) 함열읍 |
사망일 | |
사망지 | |
국적 | 대한민국 |
학력 | 재동초등학교, 경기중학교, 경기고등학교, 서울대학교 회화과 |
직업 | 가수, 작사가, 작곡가, 뮤지컬 기획자, 뮤지컬 연출가, 뮤지컬 제작자 |
활동기간 | 1969년 데뷔 (도비두) |
소속 | |
종교 | |
가족사항 | 배우자, 슬하 2남 |
목차
정의
대한민국의 가수, 작사가, 작곡가, 뮤지컬 기획자, 뮤지컬 연출가, 뮤지컬 제작자.
내용
인물정보
- 재동초등학교 졸업. 양희은과 동문. 양희은의 데뷔곡 '아침이슬'부터 30여개 이상의 곡을 함께 했다.
- 경기중학교 입학. 미술반 활동을 열심히 했다. 이후 대학도 서울대 회화과로 진학하게 되고 이 곳에서 만난 친구와 처음 음악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미술반 활동을 계속했고, 기타를 독학했다. 윤형주와 동문이다.
- 1969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입학하고,당시 대학 동기였던 김영세(디자이너)와 함께'도비두'(도깨비두마리) 라는 포크 팝 보컬 듀오를 결성했다.
- 1971년 김민기 1집을 시작으로 솔로 가수 겸 작곡가의 삶을 시작했다.
- 김민기는 노래를 통해 정권에 대한 반발의식을 드러내는 일에 거리낌이 없었는데, 그러한 그의 태도를 보고 그의 모든 노래를 듣고 부르는 것이 원천 금지되었다.
- 결국 그는 가수에서 손을 떼고 작곡가, 그리고 극작가로 방향을 튼다. 노래극, 연극 등의 각본을 쓰곤 했는데 그 내용은 여전히 정권에 대한 비판의식을 드러내곤 했다.
- 김민기의 음악이 뛰어난 점은 트윈폴리오를 비롯한 다른 통기타 음악인들이 대학생의 사랑과 낭만을 노래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을 때, 민주주의와 사회 정의라는 화두를 개인적 심정으로나마 자신의 음악에 반영했기 때문이다.[1]
음반
- M.net 김민기 음반 검색 결과 중 '정규'앨범 기준
생애 및 활동
- 애초에 김민기는 사람과 삶에 대한 성찰이 깊었던 인물이었다.고2때 작사한 가사 내용이 "비가 내리누나 나 혼자 가고프나 함께 어울려 같이 간들 어떠하리 가세 산 너머로 비 개인 그곳에 저 군중들의 함성소리 들리잖나"였다고.
- 김민기의 곡 중 널리 불리는 친구는 그가 고교 3학년 때 작곡했다. 보이스카우트 대원들과 동해안에 야영 갔다가 한 사람이 익사하는 바람에 즉시 서울로 돌아오던 야간열차에서 참혹한 심정을 가사에 담았다.
- 김민기는김영세와 함께 '도비두'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했는데, 본인이 작곡한 곡은 부르지 않고 미국의 모던포크 중에서도 프로테스트(protest·저항) 포크의 핵심이라 할 음악인들의 곡[2]을 불렀다.[3]
- 김민기와 윤형주의 첫 만남은 명동 YWCA 노래모임인 '청개구리'[4]에서 이루어졌다고한다. 당시 그의 감상은 이렇다.
느낌도 독특했다. 시골에서 농사지을 법한 얼굴인데, 마치 음악을 다 꿰뚫고 노래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곡 자체도 우리가 부르는 노래와 많이 달랐다. 사랑을 노래하는 낭만주의 팝송이 아니라 인생 전반에 대한 내용의 가사였다. 완전히 매료됐다.[5] |
- 김민기는 양희은과 '청개구리'에서 처음 만났다. 초등 동문이긴 하나 몰랐다. 이 만남이 인연이 되어 양희은의 데뷔곡이자 지금까지 사랑받는 아침이슬이라는 곡을 주게 된다.
김민기의 저항, 그리고 금지곡
위 에피소드란에서 언급된 윤형주의 감상에도 나와있듯, 그는 사랑을 노래하는 낭만주의 팝송보다는 인생 전반에 대한 내용의 노래를 부르곤 했다고 한다. 그만큼 인생과 사람에 대해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그의 노래였기에, 고스란히 그런 성향이 묻어 나왔다. 더불어 시인 김지하를 만나며 그의 영향으로 더욱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에 변화가 생기게 된다. 1972년에는 서울대학교 문리대의 신입생 환영회 때 자작곡을 포함한 민중가요를 가르치다가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 때 가르쳤던 꽃 피우는 아이가 금지곡으로 지정되면서, 음반 활동에도 타격을 받기 시작했다.
1973년 초에는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의 극음악을 작곡해 무대 공연 경험을 쌓기 시작했고, 1974년 4월에는 소리굿 아구의 대본을 쓴 뒤 작곡가 이종구가 곡을 붙여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공연했다. 이 소리굿은 공연윤리위원회의 제재를 받고 상연 금지 처분을 당했지만,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체포 위협을 무릅쓰고 재공연하는 등 화제를 모았다.
1974년 10월에는 카투사로 입대해 군 복무를 시작했으나 1975년 초 유신 반대 운동에서 김민기의 노래들이 불렸다는 것이 문제가 되어 보안대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고, 아침 이슬이 금지곡으로 지정됨과 동시에 솔로 1집도 판매 금지 조치를 받았다. 이 결정은 1987년 6월 항쟁 이전까지 지속되었고, 이후 전두환 집권기까지 공식적으로 발매된 김민기의 앨범은 전무했다.
보안대 조사가 끝난 뒤에는 영창 살이를 한 뒤 최전방 부대로 재배치되었다. 1977년 5월에 전역한 뒤에도 공연이나 음반 발매 등 공적인 활동에 제재를 받게 되자 당시 서울대학교 미대 학장이었던 조각가 김세중의 도움으로 학사 학위와 중등교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졸업할 수 있었다.[6]
그는 막노동 등으로 생계를 꾸리면서 양희은의 음반 '거치른 들판의 푸르른 솔잎처럼'에 들어갈 노래들을 작곡해 주었다. 하지만 음반 발매 때는 가명을 사용했음에도 수록곡 중 '늙은 군인의 노래'가 장교들의 비위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또 금지곡 판정과 음반 판금 조치를 받았다.
이렇게 되자 다른 민중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제도권 음악계의 도움 없이 비밀리에 작곡과 연주 활동을 진행했는데, 1978년에는 개신교 계열 시민단체인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의 후원을 받아 노래극 공장의 불빛을 제작했다. 이 노래극은 당시 대학 노래패들의 노래와 연주로 송창식의 집에서 몰래 녹음되었고, 녹음 직후 카세트 테이프로 복사되어 보급되었다. 대담하게도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행한 작업이었는데, 당연히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지만 별 처벌 없이 풀려났다.[4]
하지만 '공장의 불빛'을 만든 뒤에는 비공식 활동마저 힘들게 되었고, 결국 음악 활동을 일시적으로 중단한 뒤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하지만 김민기를 받아준 농가에서 정기적으로 김민기의 행적을 경찰서에 보고해야 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민폐를 끼치게 되었고, 멀지 않은 김제로 옮겨가 계속 농사를 지었다.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암살된 뒤인 1979년 12월에는 문화체육관에서 열린 유아원 기금 마련 자선 콘서트를 익명으로 기획하고 직접 출연도 하면서 일시적으로 음악 활동을 재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두환을 비롯한 하나회 세력들이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게 되자 다시 농사를 지으며 대외 활동을 삼갔는데, 1981년 5월에는 국풍81 개최를 앞두고 정부에서 자신을 회유하려고 하자 농사일이 바쁘다면서 끝까지 참가를 거절했다.[5] 대신 틈틈이 찾아와 농사를 도와주던 전라북도 각지의 연극패와 노래패들과 동학농민운동을 다룬 마당극 '1876년에서 1894년까지'를 만들어 전주에서 근대사 세미나와 함께 공연하기도 했다.
같은 해에는 김제에서 경기도 연천군의 전곡으로 옮겨가 참깨 농사를 시작했는데, 이 때 비료 회사에서 사익을 챙기기 위해 규정량보다 많은 양의 비료를 권장량으로 속여 판 것을 알고는 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해 배상금을 받기도 했다. 이후에도 민통선 이북의 논에서 벼농사를 지으며 청년회를 조직해 농산물 직거래에 나서기도 하는 등, 구체적인 사회 운동에도 참가하기 시작했다.
1983년에는 2년 전 비공식 발표했던 마당극 '1876년에서 1894년까지'가 대한민국연극제 참가 작품으로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상연되었는데, 극단 연우무대 대표 오종우를 각본가로 기재하고 자신은 익명으로 연출을 맡았다. 이 때까지도 김민기는 주로 농사일에 전념하고 있었는데, 같은 해 12월에 전곡의 집이 화재로 전소되었다. 때마침 9년 전 소리굿 아구를 같이 공연했던 김석만이 김민기를 찾아와 공연 활동을 다시 재개하자고 설득했고, 결국 농부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돌아와 김석만, 오종우와 함께 어린이 뮤지컬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공연윤리심의위원회에서 김민기가 참가한다는 것을 알아채면서 수포로 돌아갔고, 1984년에는 서울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를 비롯한 대학들에서 활동하던 노래패들의 노래를 모아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라는 음반을 제작했다.[6] 하지만 이 음반도 공윤위에서 김민기의 노래를 모두 삭제하라고 지시했고, 발매 뒤에도 어른의 사정으로 발매는 되었지만 판매가 거의 안되는 안습 신세를 겪었다.
1985년에 뮤지컬 사무실 직원으로 일하던 이미영과 결혼했고, 1987년에는 6월 항쟁으로 본격적인 민주화 열풍이 불자 6년 전 충청남도 보령시의 탄광에서 잠시 광부 생활을 했을 때의 경험을 살려 탄광촌 아이들을 다룬 노래극 '아빠 얼굴 예쁘네요'를 만들었다. 하지만 아직 건재하던 공윤위의 꼬장 때문에 여러 대목의 가사를 고쳐서 출반해야 했다. 공윤위와의 마찰은 같은 해 12월에 노래일기 '엄마, 우리 엄마'와 훗날 록 오페라로 리메이크하게 되는 노래극 '개똥이'의 노래를 모은 음반을 낼 때도 똑같이 벌어졌다.
1989년에는 농촌 운동 경험을 살려 장일순, 박재일, 김지하, 최해성 등과 함께 생태운동 단체인 '한살림 모임'이라는 NGO를 만들어 초대 사무국장을 역임했다.[7] 이듬해에는 한겨레에서 발족시킨 '겨레의 노래 사업단'에서 그 동안 군사정권의 탄압 등으로 가창이 금지되어 있던 대한민국과 해외 동포들의 노래를 엮은 음반 '겨레의 노래'를 제작했고, 음반 발매 기념으로 순회 공연을 하면서 오랜만에 아침 이슬을 공개적으로 불러 화제가 되었다.
방향의 전환, 학전 소극장
음악활동에 대한 국가적 탄압이 극심해져 더이상 관련 활동을 이어나갈 수 없었던 김민기는, 줄곧 시인 김지하를 도와 해왔던 '극' 분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그럼에도 그 내용은 여전히 정권과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다루었고, 그가 극본을 쓴 소리굿 아구는 상연 금지 처분까지 받기도 했다. 써 1983년 - 연극 《멈춰 선 저 상여는 상주도 없다더냐》의 극본, 연출을 맡았다. 1991년 - ‘겨레의 노래’를 총감독했다. 극단 학전 개관. 1994년 - 국내 최장수 기록 가진 뮤지컬 <지하철1호선> 공연 시작. 현재 소극장 학전과 극단 학전의 대표로 있으며, 1994년 록뮤지컬 《지하철 1호선》 연출과 기획을 했다. 이것으로 2007년 독일 바이마르 괴테 메달을 받았다. 록뮤지컬 지하철 1호선은 4000회를 마지막으로 공연을 중단한 상태이다. 그러나 추후 시대배경을 2000년대에 맞추는 등의 보완작업 후 새롭게 무대에 올릴 예정이다. 한국 대표 뮤지컬이라 할 수 있는 ‘지하철 1호선’을 직접 번안, 각색해서 20년가까이 수천번에 달하는 공연을 성사해왔다. 현재 내로라하는 배우들 중에서도 극단 학전출신이 셀 수 없이 많다. 대표적으로 황정민, 설경구, 조승우 등. 시대적인 탄압으로 인해 틀게된 방향이었으나, 그 물꼬가 가지고 온 문화적 영향력은 어마어마 했다. 노래에서 그치지 않고, 뮤지컬, 연기계에서 권위있는 극단을 만드는 일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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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기여
주석
- ↑ [국제일보, 김형찬의 대중음악 이야기 (45) 김민기, 한국 통기타 음악의 자아를 만들다 (하)]
- ↑ 밥 딜런의 'Blowin' in the Wind' '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 피터 폴 앤 메리의 'Weep for Jamie' 'Three Wavens' 'Old Coat' 'It's Raining', 존 바에즈의 'Portland Town'.
- ↑ [국제일보, 김형찬의 대중음악 이야기 (43) 김민기, 한국 통기타 음악의 자아를 만들다 (상)]
- ↑ 1969년 세시봉이 문을 닫고 나서 1970년 6월 서울 YWCA에 '청개구리'라는 요일별 프로그램이 개설됐다. 김민기,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서유석, 투코리언스 등이 때때로 여기에 들러 청중과 호흡했다. 이제까지 외국 팝송을 그대로 부르던 단계에서 벗어나 가사를 한국어로 번안해 부르거나 스스로 노래를 창작하는 단계로 나아갔다.
- ↑ 윤형주 칼럼, 세시봉, 우리들의 이야기 #7 익사한 후배에 바친 '친구'
- ↑ 김민기 나무위키 2.2 가수가 되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