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대지주
1910년대 이후 일본의 부족한 식량을 충당하고자 경기도 일원에서 생산된 쌀의 상당량이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이때 개통된 수인선은 경기도의 쌀을 항구인 인천항으로 옮기기 위한 것이었다.
강화의 논농사도 기본적으로 대일 수출을 위한 것이었다. 이때 강화의 대지주들은 밭을 논으로 개량하는 등 꾸준히 논의 면적을 확대하는 한편 품질 개량을 통해 단위면적당 생산량도 늘려갔다.
하지만 1920-1930년대 일제의 저미가정책, 농업공황으로 인하여 한국인 지주경영의 성장이 막히기 시작한다. 농업공황으로 인한 쌀값 하락은 소작인의 몰락, 농가경제의 파탄으로 이어졌다. 또한 일본의 밭농사 장려, 조선 쌀 반대운동 등으로 일본 식민지 당국은 조선 쌀의 대일 수출을 저지함으로써 국내의 쌀값은 급격히 하락하였다.
이와 같은 생산력의 정체에 부딪힌 강화의 대지주들은 산업자본으로 전환을 꾀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조양방직인 것이다.
그런데 당시 강화의 농업사회는 특이한 점이 있었는데 전국적으로 소작 쟁의가 활발히 일어나지만 강화에서는 그런 사례들이 없었고, 지주들 역시 고율의 소작료를 매긴다든지 하는 폭압적 수탈 사례도 보고된 바 없다.
특히 홍씨 집안은 재해가 날 시에 의연금, 동정금 등을 출연하여 시설을 고치거나, 구휼 사업에 뛰어들었으며, 사회지도층 역할도 일정하게 수행하였다. 홍재용이 제2대 강화군수를 역임하거나 홍재승이 6.25 전쟁 시 강화치안대장을 맡은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해방 이후 대지주 중에는 송정헌(치안대활동)이 눈에 띄고, 기존의 대지주인 김우중(길상면 온수리), 홍재용, 홍재묵 형제, 홍재승. 홍종문 등은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대지주였다.
하지만 군수를 지내던 홍재용은 9월 28일 강화에 재침입한 북한군에 의해 잡혀 납북되고, 10월 2일 조양방직에서 일민주의청년 동지회가 치안대를 구성한다. 일민주의 청년동지회는 다음날 다른 우익 치안 조직과 함께 강화치안대를 구성하는데 홍재승이 치안대장을 맡게 된다.
조양방직은 일제 강점기에도 기업운영에 있어서 지금의 산재보험과 같은 보험에 가입하여 노동자의 산재에 대비한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폐업이후 1960년대 접어들면서 강화를 대표하는 직물업체는 김재소가 설립한 심도직물로 넘어가게 된다.
그 이후 조양방직 터는 다른 형태로 활용되다가 2000년대에 오면서 잡동사니가 쌓인 버려진 공간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2018년에 이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낡았으나 새롭고 옛스러우면서도 감각적인 공간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강화의 농업구조의 변화와 조양방직의 설립, 그리고 강화의 농촌사회의 특징과 6.25 전쟁기를 둘러싼 좌우대립의 문제, 지주-소작관계와 산업화 과정, 강화양명학의 관계 등 연구할 만한 소재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조양방직의 역사는 강화 근현대사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향후 강화의 농업구조 변화 과정, 6.25전쟁을 둘러싼 좌우대립, 그리고 강화양명학과의 관계 등 연구할 만한 소재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출처 : 인터넷 강화뉴스(http://www.ganghw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