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정수사(淨水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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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숙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5월 31일 (금) 07:3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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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淨水幽深地不凡 () 정수사 그윽하고 그 터도 비범하니, 法華金字匣中緘 () 법화경 금자 사경 서갑 속에 봉해 있네. 浮屠前殿涵虛蹟 () 부도 앞쪽 전각은 함허대사 유적인데, 今日猶傳閣氏巖 () 각시바위 전설이 오늘까지 전해오네.

○ 정수사(淨水寺)는 마니산 동남쪽 계곡 가운데에 있다. 절 아래에 부도전(浮屠殿)이 있었는데 명나라 영락 년간(1403~1424)에 이름이 득통(得通)이고 호가 함허자(涵虛子)인 스님이 중국에서 배를 타고 동쪽으로 와서469) 이곳에 절을 짓고 살았다. 이곳에 각씨암(閣氏巖 또는 角氏巖)이라고 불리는 바위가 있다. 전하기를 함허자가 이 암자에 머물면서 오래도록 돌아가지 않자 그 아내가 찾아와서 돌아가자고 했지만 거절당하자 죽어서 바위가 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되었다고도 한다.

○ ≪법화경(法華經)≫의 십여구를 금으로 쓴 것이 있는데, 어떤 이는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쓴 것이라고 한다. ○ 동악(東岳) 이안눌의 시는 다음과 같다. “천년의 세월에 부도전은(千古浮屠殿) 마니산 기슭의 동쪽이라네.(摩尼嶽麓東) 인적 드문 휘감는 산속에(山回人境隔) 하늘 넓어 해문으로 통하네.(天闊海門通) 지는 달에 소쩍새는 지저귀고(蜀魄啼斜月) 밤바람에 배꽃이 떨어지네.(梨花墮暗風) 범의 대에 누가될까 두려워(慚爲虎竹累) 하루 자고 신선과 이별하였네.(一宿別仙翁)” ○ 병술년 유수 이은(李溵)470)이 동생 이미(李瀰)471)와 함께 이 절에 와서 시를 짓고 선조 동악 이안눌의 시판(詩板)를 우러러 보았다. 시는 다음과 같다. “도읍에 머물다 한가한 날에(留都能暇日) 밤새도록 산 속을 헤맸다네.(冥搜岳東西) 국화길은 가을의 늦은 때이고(菊磴三秋晩) 절에 있으니 사방이 통하네.(禪棲四望通) 모여서 훌륭한 일 전하자니(聯裾傳勝事) 벽에 붙여 유풍을 이어가네.(題壁挹遺風) 참성단을 향해서 떠나니(更向星壇去) 단목옹의 발자취를 묻는구나.(問踵檀木翁)”

○ 동생 참의 이미의 시는 다음과 같다. “푸른 바다 저 먼 곳을 건널 때(涉遠滄溟際) 읊조리며 산 동쪽을 오르네.(吟蹤上峀東) 단풍나무 삼나무 가을 해가 비추고(楓杉秋日暎) 누각에선 저녁 조수와 통하네.(樓殿夕潮通) 옛날의 정숙하고 고운 시는(古貞娃跡詩) 우리 조 상의 유풍을 전하네.(傳我祖風迎) 앞의 서너 납……(前三四衲□472)) 옛날의 영옹(玲翁)을 알 수 있다네.(能識舊玲翁)”

○ 절 앞에 정녀석(貞女石)이 있다. 선집(先集)에도 정수사의 영상인(玲上人) 준 시(詩)가 있어서 아울러 스스로 주를 낸 것이다.


인물

  • 함허기화(1376∼1433) 조선 초기의 유불조화론을 주장한 고승. 성은 유(劉)씨이고 본관은 충주(忠州)이다. 호는 득통 (得通), 당호는 함허(涵虛).

21세에 관악산 의상암에서 승려가 되었고, 회암사·대승사·현등사 등에서 수행하였고, 봉암사에서 열반하였다. 그가 중국에서 왔다는 전설을 입증할 만한 자료는 찾을 수 없다.

  • 이은(1722∼1781)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치호(稚浩), 호는 첨재(瞻齋). 1766년 강화유수를 지냈으며, 그 후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하였다.
  • 이미(1725년 출생) 본관 덕수(德水), 자는 중호(仲浩)


참고

  • 정수사(淨水寺): 화도면 사기리 마니산 남쪽에 있으며, 정수사법당은 보물 제161호로 지정되어 있다.
  • 472) 원문에 빠진 글자가 있어 해석이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