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의 종교
주제 : 강화도의 불교, 무속신앙, 개신교의 부흥과 전래양상
개요
강화도는 고대부터 한반도의 입구로써 문화나 종교가 최초로 유입되는 곳이였다. 또한 육지와 비교적 가깝지만 지리적으로 섬의 형태를 띄고 있어 종교가 융성한 장소이다. 강화도에서 종교적 색채가 강한 장소는 선사시대의 고인돌, 단군이 쌓고 제사를 지냈다는 마니산 정상의 참성단, 381년(소수림왕 11)에 아도화상(阿道和尙)가 창건한 전등사, 한국 최초의 성공회 성당인 강화성당, 무형문화재이자 대동굿과 배연신굿으로 유명한 김금화의 전수관까지 시기와 각기 다른 종교가 모두 존재한다.
전래양상
-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 아도화상이 세웠다고 전하지만 고려 중기까지의 역사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조선 선조 38년(1605)과 광해군 6년(1614)에 큰 불이 일어나 절이 모두 타버려, 그 이듬해 다시 짓기 시작하여 광해군 13년(1621)에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한다.
- 강화성당은 대한성공회의 초대 주교인 코프(Corfe, C. J.)에 의하여 1900년(광무 4)에 건립되었다. 대한성공회의 역사는 1889년코프가 초대 한국 주교로 영국에서 서품을 받음으로써 시작되는데,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한 사람의 신자도 없었고, 한국인에게 처음 세례를 베푼 것은 주교 축성이 있은 지 7년 뒤인 1896년 6월 13일강화에서였다.
- 금화당은 2005년 주요무형문화재 제82-2호인 김금화가 후진 양성과 무속문화 전수를 위해 건립하였다. 그녀는 1931년 황해도 연백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이후 인천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점차 활동영역을 넓혔다.
부흥시기
각 종교의 가장 왕성했던 부흥시기가 정확히 언제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기록과 유적 등을 참고하고 또 신도를 제외한 일반인들이 인지할만한 연관된 일이 있었는지를 바탕으로 부흥시기를 정해보았다.
먼저 전등사는 소수림왕 때 창건된 이후 고려 몽골침략으로 강화도로 천도한 시기에 가장 부흥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궁을 정족산성 내에 지으면서 전등사와 거리상으로 매우 가까워졌으며, 몽골의 침략을 불교의 힘으로 물리치기 위한 대장경 제작도 해당 사찰에서 진행되었다는 기록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성공회의 부흥시기는 두 번째 성당인 온수리 성당이 지어질 시기라고 생각된다. 성공회온수리성당 강화읍 길상면 온수리 정족산 자락에 위치한다. 이 성당은 강화읍의 강화성당(1900, 사적424호)과 달리 선교본부의 지원이나 선교사들의 주도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신도들 스스로가 땅을 헌납하고, 자금을 마련하고 스스로의 노력봉사로 지은 성당이다. 6년만에 신도들의 수가 늘어나 성당을 재건축하고 또 자신의 재산을 성당 건립을 위해 헌금하는 것을 볼 때 해당시기가 신실함의 깊이나 전도의 속도 등에 있어 부흥의 시기라고 생각될 수 있다.
무속신앙은 딱히 부흥의 시기를 정할 수는 없지만, 만신이라는 영화로 김금화의 이야기가 알려짐으로써 무속과 김금화에 대한 일반대중의 관심도와 인지도가 높아졌기 때문에 부흥시기라고 선정하였다. 해당 영화는 독립영화임에도 불구하고 36,535명의 관객이 관람하였으며 들꽃영화상에서 수상을 한 작품이다. 또한 김금화는 무속인이지만 해당 영화에 주연 직접 출연하였다.
시각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