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양양곡(襄陽谷)
120. 양양곡(襄陽谷290)) 姜公舊第地襄陽강공의 옛 집은 양양골에 있는데, 楣上紅旌玉署香문 이마의 붉은 정려 귀한 글씨 향기 나네. 荷國寵光今正尉나라의 은총 입어 지금은 정위 벼슬, 南征西守晩歸鄕남쪽 정벌 서쪽 수비 마치고 늘그막에 고향 왔네.
○ 진사인 진주 강씨 강시(姜偲)291)의 아들 강응생(姜應生)292)은 의금부 도사를 지냈다. 강응생의 아들 강위빙(姜渭聘)293)은 정축년(1637)에 순절하였다. 이 일은 충렬사 주(註)에 보인다. 강위흥(姜渭興)은 진사를 지냈다. 강위흥의 아들 강학(姜翯)294)는 문예로써 진사에 합격하고 과거에도 합격하여 일찍이 영원군수를 지냈다. 인조 병자년(1636) 난리에 이웃 고을과 약속하고는 적을 막고 물리치고자 하였다. 그러나 군대를 소집하기도 전에 적군이 몰려들어 그들에게 잡혀 죽임을 당했다. 강학(姜翯)의 증손 강시겸(姜始謙)은 진사이고 강학의 형 강익(姜翌)은 무과로서 선전관을 지냈다. 강학의 7세손 강대흠(姜大欽)이 아직도 그 집에 살고 있다. 그는 무과에 급제하여 정위를 지냈다. 그는 남쪽으로는 제주목사를 지내고 서쪽으로는 해주 목사를 지냈다. 그는 지금 귀향하여 살고 있다. ○ 강위빙의 아우 강위재(姜渭載)는 임피(臨陂) 현감을 지냈고 그의 아들 강수남(姜壽楠)은 인지(麟趾) 현감을 지냈다. ○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은 정자(正字) 강학(姜翯)에게 벽상시(壁上詩)를 지어주었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진양의 후손이 강화 에 살고 있는데(晉陽才子住江城) 공부하기 위해서 힘든 일도 마다 않네(問字曾勞載酒行) 벼슬을 하기 위해 재물을 아끼지 않으니(本向庭 闈叨地主) 사와 부에 의지한 문생이라 하였네(敢憑詞賦號門生) 을묘 년에 첫 번째로 의발을 전수하니(乙卯第一傳衣鉢) 동갑 모임에 처음 부터 형제를 맺었다네(庚契從初結弟兄) 밥먹다 홀연이 난리일을 생각하니(寄食忽思遭亂日) 두 집안의 지금까지 백년의 정이라네(兩家終始 百年情).” ○ 두 번째 시는 다음과 같다. “과거에 몽진하던 사건을 생각하니 (憶昨鸞輿避虜塵) 외론 신하 이 강가로 걸어서 왔다네.(孤臣徒步此江濱) 파란 파와 흰 밥이 서로 땅을 찾으니(靑蔥白飯相尋地) 자주빛 말 붉은 옷이 다시 몸을 일으키네.(紫馬朱衣再起身) 향촌 노인 함께 살며 오늘을 공경하니(鄕叟共生今日敬) 나그네 길 일찌감치 우리 집에 머무네.(旅程曾被我家嗔) 전후로 그대 대하니 진실로 낯빛이요(對君前後眞顔色) 한 번 저무니 인간 만사 새롭구나.(一暮人間萬事新)” ○ “되박만한 작은 집 무릎은 들어가니(小齋如斗膝湛容) 그윽한 새소리에 깊은 낮잠 드는구나.(幽鳥聲中午睡濃) 달빛에 들판 끊겨 밝은 것은 한 구비요(野斷江光明一曲) 산에는 나무 그늘 지는데 어두움이 천겹이네.(山回樹影暗千重) 이슬 내린 동쪽 계단에 새롭게 대 자르니 (東堦露浥新裁竹) 북쪽 산 오래된 나무에 바람이 부는구나.(北塢風生舊植松) 임금 알현 그만두고 귀향해서 쉬자니(官罷見君歸臥穩) 벼슬하는 생활보다 진실로 낫다네.(眞勝抱笏趨曉鍾)”
290) 월곶리 양골 마을이다. 291) 강시는 1546년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2등 21위로 합격하였다. 292) 강응생(1552년 출생) 자는 시망(時望). 본관은 진주(晉州). 293) 강위빙(1569∼1637) 본관은 진주. 자는 백상(伯尙), 호는 서호(西湖). 294) 강학(1601년 출생) 자는 군백(君白). 본관은 진주(晉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