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고려궁지(高麗宮址)
94. 고려궁지(高麗宮址) 麗王何事昔移都고려왕은 무슨 일로 도읍을 옮겨 왔나, 延慶康安摠虛無연경궁과 강안전이 모두 다 허무하네. 埋地洪鍾誰敢發땅에 묻힌 큰 종을 누가 감히 꺼내겠나, 滿天雷雨卽時驅하늘 가득 우레 소리가 곧바로 몰아친다는데. ○ 고려 고종 19년 임진년(1232)에 최우(崔瑀)가 왕을 보좌하여 강화도로 천도하였다가 원종 11년 경오(1270)에 예전의 서울로 돌아 갔다. 충렬왕은 왕 16년 경인년(1290)에 또 강화에 도읍하였고 18년 임진(1292)에 개경으로 돌아갔다. 지금 그 성터와 궁터가 모두 강화 부의 동남쪽 정자산 바깥에 있다. 강안전(康安殿)은 연경궁의 안에 있었는데 세속에 전하기를 “그 터에서 옛날의 종이 묻혀 있다고 하 는데 발굴하려 하니 천둥이 치고 비가 내렸다.”라고 하였다. 궁터 4, 5리 안에는 담장, 산재한 주춧돌, 붕괴된 기와, 깨진 옹기 등이 군데군데 밭 사이에 쌓여 있다. ○ 지금 장령(長嶺)의 성문현(城門峴)과 선원(仙源)의 대문현(大門 峴)과 인정(仁政)의 서문동(西門洞) 그리고 대묘동(大廟洞)·도감동 (都監洞)의 지명은 여전히 남아있다. ○ 가정(稼亭) 이곡(李穀)215)의 시는 다음과 같다. “산해의 깊은 134 譯註 沁都紀行 곳에 작은 배가 떠있고(山海深處一扁舟) 화산을 다니는데 흥이 아직 남았구나.(行到華山興未休) 옛날부터 금성탕지는 덕을 펴기에 해가 되니(自古金湯能害德) 이곳으로 천도한 것은 누구의 계획인가?(移都 此地是誰謀)” ○ 고려의 허금(許錦)216)의 시는 다음과 같다. “어부 초동도 옛 날의 천경을 말하는데(漁樵猶說舊天京) 임금 수레 기구하여 이 성에 행차하였네.(玉輦崎嶇幸此城) 구름이 참담하여 찬 빛인 듯 하는데(洞 雲慘惔疑寒色) 궁의 나무 남아서 옛소리를 울리네.(宮樹潺湲咽舊 聲)” ○ 용헌(容軒) 이원(李原)217)의 시는 다음과 같다. “길을 닦아 바 다 섬에 통하고(修程通海島) 예전의 관은 구름 봉우리에 기댔구나. (古館倚雲峰) 고요히 밤 지내니 시끄러움 없어지고(夜靜坐喧息) 빈처 마에 달빛이 파고 드네.(簷虛月色侵) 침상에는 살랑살랑 맑은 바람 불어오고(床風淸細細) 뜰에 있는 나무에는 녹음이 우거지네.(庭樹綠 陰陰) 살고 있는 백성들이 말하는 걸 듣자니(聽得居民話) 태평한 시 대가 바로 지금이라네.(昇平正値今)” ○ 함부림(咸傅霖)218)의 시는 다음과 같다. “바다는 가까우니 구 름은 물기 머금고(海近雲猶濕) 산으로 둘러싸여 해가 쉽게 지는구 나.(山圍日易陰)” 215) 이곡(1298∼1351) 고려 말엽의 학자.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보(仲父), 호는 가정(稼亭). 216) 허금(1340∼1388) 고려의 문신. 본관은 공암(孔巖 : 陽川). 자는 재중(在 中), 호는 야당(埜堂). 217) 이원(1368∼1430)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차산(次 山), 호는 용헌(容軒). 수문하시중 암(嵒)의 손자이며, 밀직부사 강(岡)의 아들이다. 218) 함부림(1360∼1410)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윤물 (潤物), 호는 난계(蘭溪). 부내면( ○ 안숭선(安崇善)219)의 시는 다음과 같다. “이어진 산에는 비취 빛이 떠서 멀고(連崗浮遠翠) 깍아지른 언덕에는 층층이 구름 이네. (斷壟起層雲)” ○ 권맹손(權孟孫)220)의 시는 다음과 같다. “고국은 푸른 바다에 둘러 있고(故國環滄海) 빈 성은 비취빛 산으로 벌려있네.(空城列翠 岑)”
기행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