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구
한 팀 5명이 공을 바스켓에 던져 넣어 많이 넣은 수로 승패를 겨루는 스포츠 경기이다.
개요
캐나다계 미국인 제임스 네이스미스가 고안하였다. 양팀 각 5명[1]씩의 선수가 한 개의 공을 상대팀의 3 미터 높이의 바스켓에 던져 넣기 위해 공방전을 벌이는 스포츠이다. 공과 바스켓만 갖추어지면 두 명만으로도 작은 공간에서 얼마든지 경기를 할 수 있다. 강인한 체력, 재빠른 몸놀림, 지구력 등이 요구된다. 농구는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 중의 하나이다.
바스켓에 공을 던져 (슈팅) 넣으면 득점을 하는 방식으로, 경기 종료 후에 보다 많은 득점을 얻은 팀이 승리한다. 공은 튀기거나 (드리블) 같은 팀에게 패스를 하여 움직일 수 있다. 의도적인 신체적 접촉은 허락하지 않으며 공을 다루는 데에도 제약이 있다. (바이얼레이션)
농구는 만들어진 이래 슛과 패스, 드리블과 같은 공통 기술이 발전을 거듭해 왔으며, 선수의 포지션이나 공격과 수비 구조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보통 팀에서 가장 키가 큰 선수가 센터나 두 포워드 포지션 중 하나를 맡으며, 키가 작은 선수나 공을 다루는 실력이 뛰어나고 빠른 선수가 가드 포지션을 맡는다. 농구는 다양한 규칙을 가지고 있는 정식 경기와 더불어 편한 경기를 위한 변형이 다양하게 발전해 왔다. 일부 국가에서는 농구가 대중적인 관전 스포츠이기도 하다.
농구는 본래 농구 코트에서 하는 실내 경기로 고안된 것이지만, 오늘날에는 거리에 바스켓을 설치해 놓고 게임을 벌이는 '거리 농구'도 크게 유행하고 있다. 도시와 근교 지역에서 인기가 있는 거리 농구는 몇가지 규칙이 변형된 형태로 3명씩의 선수가 반코트로 경기를 한다.[2]
역사
19세기 후반 미국에서는 비가 내리거나 추운 겨울에도 할 수 있는 구기종목으로 고안된 것이 농구이다. 1891년 매사추세츠 주 스프링필드에 있는 국제 YMCA 체육학교(후에 스프링필드대학교) 캐나다 출신의 교사 제임스 네이스미스(James Naismith)가 창안하였다.
처음에는 두 팀의 경기자 수가 일정하지 않았으나 1895년에 1팀은 5명으로 구성하기로 하고 1897년에 명문화되었고, 1896년 최초의 공식 경기규칙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또, 당초 코트의 형태도 불규칙하였으나 1903년 코트의 라인은 모두 직선이어야 된다고 결정하였다. 1905년 미국 서부 대학 바스켓볼협회가 생겼고, 1915년에는 YMCA·미국체육협회·미국대학연맹이 협동하여 농구의 정상적인 발전을 보게 되었다.
농구의 전파는 YMCA를 통해 캐나다·남아메리카·일본·필리핀·한국·중국 등 아시아 지역을 비롯하여 유럽에서도 독일·불가리아·폴란드·프랑스·이탈리아 등 여러 나라에 보급되었다. 농구의 인기와 붐이 급격하게 고조되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부터이다.
농구 경기는 제11회 베를린 올림픽대회 때부터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 1952년의 제15회 헬싱키 올림픽대회까지는 미국의 규정에 따라 경기를 진행하였으나, 이후에는 국제아마추어농구연맹(Federation International Basketball Amateur:FIBA)의 규정에 따라 치러진다.
세계대회 규모의 국제경기는 각국 대표들로 구성된 FIBA가 주관하고, 올림픽 및 세계선수권대회에는 유럽·아시아·아프리카·남북 아메리카주의 각 지역에서 예선을 거친 대표팀이 출전하여 대전한다.
한편, 프로농구는 1898년 미국 뉴저지 주 트렌튼 팀이 생겼으며, 같은 해에 이미 미국에서는 리그전을 벌일 만큼 몇몇 프로팀이 신설되었다. 이후 프로팀의 경기가 활성화되면서 프로농구는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3]
한국의 농구
한국에 농구가 처음 소개된 것은 1907년 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초대 총무이자 미국인 선교사인 길레트(P.Gillett:한국명 吉禮泰)에 의해서이다. 1916년 3월 25일 미국인 반하트가 기독청년회 간사로 부임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지도 보급이 이루어졌다. 그 후 1920년 3월 12일 중앙YMCA 회관에서 재경(在京) 서양인 팀과 YMCA 회원 팀이 시합을 가졌다. 그 뒤 이 경기는 연례 행사로 발전하였으며, 또한 각급 학교에서 농구부가 창설되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해 3월 30일 YMCA 농구팀은 반하트와 감독 현동완(玄東完)의 인솔로 일본 도쿄로 최초 해외 원정 경기를 떠나 2승 3패의 전적을 남겼다. 한편 1925년에는 서양 여자팀과 이화 학당 여학생들 간에 농구 경기가 개최되어 여학생들에게도 보급되기 시작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중앙 YMCA에서 일본 와세다대학팀을 초청하여 국제 경기의 틀을 마련하였다.
1925년 9월에는 조선바스켓볼협회가 창립되었고 본격적인 농구훈련 및 지도가 시작된 것은 1927년 3월 당시 일본 도쿄 YMCA 체육부 간사인 F.브라운을 초빙하여 농구 강습회를 개최하면서부터였다. 1931년 4월에는 조선농구협회와 조선농구심판협회가 탄생하였다. 처음으로 농구 선수권대회가 개최된 것은 1931년 5월 27일부터 조선체육회와 기독청년회 공동 주최, 동아일보사의 후원으로 종로 YMCA 뒤뜰에서 개최된 제1회 전조선 농구선수권대회이다. 참가팀은 보성전문학교(지금의 고려대학교)와 연희전문학교(지금의 연세대학교)를 비롯한 13개 팀이었으며, 4일간의 열전 끝에 보성전문학교가 우승을 차지하였다.
1945년 12월 19일 조선농구협회가 재창립되었으며, 1948년 KBA(Korea Basketball Association:대한농구협회)로 개칭하였다. 또한 1946년 대한체육회에 가맹하였고, 1947년 FIBA(Fdration Internationale Basketball Association:국제농구연맹)에 가입하였다. 1963년에는 ABF(Asia Basketball Federation:아시아농구연맹)에 가입하였다. 1945년 대한농구협회가 창립되었으며, 1948년 대한농구협회로 개칭하였다.
1984년 제23회 로스앤젤레스올림픽에서는 1960년대의 걸출한 선수, 박신자 이후 출현한 박찬숙 등이 활약하여 아시아의 강호 중국 등을 물리치고 은메달을 차지함으로써 역대 올림픽 참가 이래 처음으로 단체 구기 종목에서 메달을 획득하였다. 1983년부터는 한국 최대 규모의 성인 농구대회인 농구대잔치가 개최되었으며, 1997년에는 프로농구리그가 창설되어 오늘에 이른다. 그 이후에도 각종 국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으며 생활 체육으로서도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인기 스포츠가 되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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