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의 봉산탈춤
최승희의 봉산탈춤
최승희의 《가면의 춤(假面の舞)》은 1935년 10월부터 1개월간 진행된 일본 전국 순회 신작 무용 발표회 중 22일 도쿄 히비야 공회당의 제2회 신작무용 발표회에서 2부 4번째 순서로 초연되었다.[1]《가면의 춤》은 1936년 9월 22~24일 히비야 공회당의 최승희 제3회 신작 무용 발표회 제2부 6번째의《가면에 의거 한 트리오(假面に依るトリオ)》라는 작품으로 올려졌는데,[2]이때부터 최승희의 가면 춤에 소고(小鼓)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가면의 춤》은 1937년 9월 27~29일 도쿄극장 제4회 도구 고별 신작 무용 발표회에서 《봉산 탈로부터(鳳山タ―ルより)》라는 작품명으로 발표되었다.
최승희의《가면의 춤》은 궁중 무용인 《처용무》와 《무한무(無旱舞)》, 민속의 산대극을 기초로 하여 타악기 반주를 가지고 창작한 것으로 소고를 치면서 추는 춤이다.[3]농민의 거친 가면무용 기법을 기초로 하여 새로 만든 가볍고 유머러스한 《가면의 춤》은[4]‘농민과 노동자들 속으로’라는 프로예술 슬로건을 실행한 무용임을 알 수 있는데, 특히《봉산탈춤》은 나프로부터 성공한 조선무용으로 인정을 받기도 하였다.[5]
《봉산탈춤》에서 최승희가 쓰고 있는 탈은《봉산탈춤》의 ‘목중’이다. 최승희는 《봉산탈춤》에서 소고를 활용하고 있는데, 이는 《봉산탈춤》제2마당 첫째 거리인 8명의 목중이 자신들의 승려 생활을 파계하는 모습과 둘째 거리에 법구를 들고 나와 법구놀이를 하며 희롱하는 장면을 연출한 것으로 추정된다.[6]
최승희는 일본에서 귀국하자마자 전라도로 내려가 본격적으로 전통 무용을 공부하였고, 《봉산탈춤》·《산대도감(山臺都監)》같은 각지 향토무용 등을 애를 쓰고 배워 2회·3회·4회 모두 좋은 평판을 받았다.[7]최승희가 《봉산탈춤》에서 추고 있는 소고춤은 호남지방 농민에게 배운 호남농악으로 보이는데,[8]호남지방 법구놀이 판굿에서는 소고잽이가 매우 빠른 동작으로 소고를 치며 여러 춤을 추면서 노는 특징을 보이기 때문이다.[9]
최승희는 그의 가면 춤이 “늙은이와 어린이가 「여자」를 서로 빼앗는 춤”이라고 밝혔다.[10]이는 《봉산탈춤》제3 사당 춤마당 셋째 거리에서 힘이 센 취발이가 노장으로부터 소무를 빼앗아 살림을 차리는 장면을 가리키는 것으로, 최승희의 《봉산탈춤》에는 가면극의 2~3마당의 내용이 담겨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내용 출처: 김연수, 「일제강점기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1938~1940)과 ‘조선무용’」, 건국대학교 사학과 석사학위 논문, 2022, 72~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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