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
인물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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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본명 박경련 가명 란(蘭) |
출생 | 1917년 |
사망 | ?? |
성별 | 여자 |
국적 | 대한민국 |
직업 | |
경력 | 이화여고보 졸업 |
목차
정의
란(박경련)은 백석이 사모하던 여인이다. 본명은 박경련이지만 백석이 불렀던 이름인 란(蘭)으로 더 알려져 있다.
내용
생애
백석과 란
백석은 이 아리따운 처녀 박경련을 마나고 나서 몇 개월 후 <조선일보> 1936년 2월 21일자에 산문 <편지>를 발표했다.[1]
신현중
- 생애
통영 출신인 신현중은 박경련 집안과도 잘 아는 처지였다. 1910년 경남 하동군 적량에서 아버지 신상재의 1남3녀 가운데 둘째로 태어난 그는 아버지가 진주 군청을 거쳐 통영 군청으로 이직한 보통학교 3학년 무렵, 통영으로 건너가 자랐다. 경성제대에 입학한 1931년 일제의 만주침략이 일어나자 격문을 시내 곳곳에 뿌린 혐의로 체포된 그는 3년형을 마치고 출소한 1935년 봄, 조선일보사에 입사해 사회부 기자로 이름을 날린다.[3]
- 백석의 친구 '신현중'
- 박경련의 남편 '신현중'
박경련과 혼인한 그는 1940년 모든 걸 접고 통영으로 귀향한다. 통영에서 그는 요시찰 인물로 늘 감시를 받으며 살았다고 한다. 해방 직후 다시 상경해 조선통신사에 들어가 언론인으로 재기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진주로 내려와 진주여중교장을 시작으로 교직 생활을 시작한다. 1950년 통영여중학교 교장, 1952년 통영중학교 교장, 1956년 부산남중학교 교장, 1962년 부산여중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경남·부산의 교직을 두루 거치면서 청마 유치환, 초정 김상옥과도 자주 어울렸다고 한다. 1980년에 영면했다. 고인의 뜻에 따라 통영 미륵산 아래 묻혔다. 1982년 ‘대한민국건국훈장 애족장’을 서훈 받고, 1993년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제2묘역으로 옮겨졌다.[4]
신현중의 배신과 둘의 결혼
불쑥 펼쳐진 1937년 봄은 잔혹했다. 백석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통영의 박경련과 그의 절친했던 친구 신현중이 결혼했다는 소식이 함흥으로 날아들었다. 신현중은 4월 7일에 서둘러 결혼식을 올렸다. 그는 약혼녀였던 김준연의 딸 자옥과 파혼을 하고 통영의 경련을 아내로 맞아들인 것이었다. 백석이 그녀를 난으로 부르며 그토록 마음을 두고 있었다는 것을 잘 아는 신현중이었다.[5]
통영시에서 발간한 《예향 통영(2010)》에는 당시의 전후 사정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1937년 난의 어머니 서씨는 서울에 사는 오빠 서상호를 만나 난의 혼사문제를 상의하고 백석에 대해 알아봐 줄 것을 청한다. 서상호는 통영 출신의 독립운동가였고 해방 후 2대 국회의원을 지낸 통영의 유력자였다. 난은 외삼촌 서상호의 집에서 돌봄을 받으며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서상호는 아끼는 고향 후배 신현중에게 백석에 대해 묻는다. 그때 신현중은 숨겨주어야 할 친구 백석의 비밀을 발설하고 만다. 그것은 백석의 어머니가 기생 출신이라는 소문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때문에 백석과 난의 혼사는 깨져버린다.[6] 낯선 평북 태생의 백석보다는 동향 출신에 집안 사정도 익히 알고 있는 신현중에게 딸을 맡기고 싶었을 것이다. 정작 통영 명정골 396번지 대문을 열고 들어간 이는 백석이 아니라 신현중이었다.[7]
멀티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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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
참고문헌
기여
주석
프로필 사진[8]
- ↑ 안도현 「백석평전」 74p
- ↑ 박경련의 아버지 박성숙은 폐결핵으로 일찍 죽었는데, 박경련도 이때 몸이 허약하고 폐가 좋지 않아 이화여고보를 한 해 휴학한 적도 있었다.(안도현 「백석평전」 74p)
- ↑ 국민일보 [정철훈의 백석을 찾아서] 명정골 비화… ‘고백’ 한번 못한채 절친한 신현중에게 ‘사랑’ 빼앗겨
- ↑ 국민일보 [정철훈의 백석을 찾아서] 명정골 비화… ‘고백’ 한번 못한채 절친한 신현중에게 ‘사랑’ 빼앗겨
- ↑ 안도현 「백석평전」 155p
- ↑ 안도현 「백석평전」 153p
- ↑ 국민일보 [정철훈의 백석을 찾아서] 명정골 비화… ‘고백’ 한번 못한채 절친한 신현중에게 ‘사랑’ 빼앗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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