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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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민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6월 17일 (월) 21:5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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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이미 강화도에는 강화직물조합이 설치되고 공동작업장까지 건설됐다. 강화도에는 심도직물 외에도 큰 섬유회사가 많았는데, 1975년 기준으로 회사는 15곳이었고, 전체 종업원수는 1천308명, 기계는 864대에 달했다고 '강화사'는 기록하고 있다


개항 이후 강화의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ㅣ독교의 수용. 상당 부분의 서양문물이 기독교를 통하여 전래되었던 것ㅇ. 특히 강화에는 1890년대 초부터 성공회와 감리교를 통한 선교가 이루어졌으며 신도들에 의한 자립교회로 발전하여 오늘날까지 그 전통이 계속되고 있다. 감리교는 1887년부터 인천에 선교를 시작하였는데 선교사와 한국인 교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큰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1892년 존스(G.H.Jones) 목사가 인천에 정착하여 조력자들의 협조로 점차 교세를 확장할 수 있었고 인천은 감리교 서부선교기지로 자리 잡았다. 1893년 성공회와 마찬가지로 감리교의 강화 선교가 시작되었다. 인천 내리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이승환이 존스 목사를 고향인 강화 서사면 시루미에 초비앟여 그 모친과 지역 양반 유지인 김상임에게 전도한 결과 교산교회가 태동활 수있었다. 1900년대에는 각 면마다 교회가 설립되었고 전체 강화주민의 약 10%가 감리교 신자가 되는 급속한 성장을 보였다. 더욱이 강화의 기독교인들은 선교 초기부터 신앙교육과 계몽교육을 이한 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1900년대를 전후로 서구 문물의 수용이 지역적으로 부분적이지만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일제의 국권침탈과 관련하여 일본인들의 국내 이주가 증가하면서 생활에 관련된 문물의 수용이 증가되고 있었기 대문이다. 의료 도로 운송 우편 통신 전기 등의 근대 문물의 수용이 그것이다. 그러나 1900년대 이후 강화는 서해안의 중ㅇ요 군사 요충지로서의 그 중요성이 점차 떨어지게 되었고, 섬이라는 환경적 요인으로 인하여 그 위상을 회복시키지 못하였다. 따라서 근대화라는 측면에서는 오히ㅕ 타지역보다 서구 문물의 정착에는 뒤떨어져 잇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