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직물 노조사건
사건 | |
---|---|
사건명 | 강화직물_노조사건 |
유형 | 노동운동 |
국가 | 대한민국 |
시대 | 1960년대 |
성격 | |
발생일시 | 1965년 |
종결일시 | 1967년 |
개요
1967년 강화도의 대형 방직공장인 심도직물 노동자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공장 걸레’라고 불릴 정도로 갖은 노동 착취와 탄압을 겪으며 일하다 이를 견디지 못하고 노동조합을 결성해 회사에 저항한 일이다. 사측은 노조 결성에 주된 역할을 했던 사내 가톨릭노동청년회(JOC) 회원을 비롯해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감시하며 회사 밖으로 내몰았다. 이 과정에 JOC 총재 주교였던 김수환(당시 마산교구장) 추기경이 노동자들을 방문하고, 한국 주교단은 성명서를 통해 노동자 권익을 대변하는 등 큰 역할을 했다. 이 사건의 전개에 대해 발제한 한상욱(인천교구 노동사목위) 부위원장은 “강화 심도직물 노조 사건은 196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노동 문제에 대해 교회가 겪었던 첫 관문이었다”면서 “한국교회는 당시 노동권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며 산업화 단계에 있던 한국 노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 덧붙여 “연대의 수준과 지속성 면에선 한계가 있었지만, 교회는 이 사건을 통해 ‘시대 정신’을 실현했으며, 이러한 연대 정신은 시대를 살아온 노동자들의 삶에 여전히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18살 가장 어린 나이에 심도직물 노동자로 노조사건 현장에 있었던 김명순(일루미나, 65)씨는 이날 증언 발표를 통해 “당시 우리는 천주님 앞에 한마음 한뜻이었다”고 회고했다.
강화도에서 종업원이 1200명이나 되는 큰 공장이던 심도직물에 노동조합을 설립, 힘겨운 노동현실 개선에 나선 것이다. 그해 2월부터 노조 설립에 들어간 지 3개월 만의 난산이었다. JOC 정신에 기반해 이뤄진 심도직물 노조 설립은 곧 큰 난관에 부닥친다. 이에 한국천주교회는 교구를 넘어 국내 가톨릭 사상 최초로 사회정의를 위해 함께 연대한다.
노동자들의 대부분이었던 강화대교가 준공(1997년)되기 이전이어서 '섬'이라는 격리된 공간인데도 21개나 되는 직물회사들이 들어차 있었고, 노동자들은 하루 12시간(공휴일 전날 야간조는 24시간) 노동에 열악한 환경에서 격무에 시달렸다. 5~6년차 숙련공이 5000~6000원밖에 월급을 받지 못하는 데다 제때 식사를 하지 못해 노동자의 60%가 위장병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고, 대부분 무좀에 걸려 있었으며, 위생시설도 엉망이었다. 당시 메리놀수녀회에서 운영하는 병원(그리스도왕 의원)에 드나드는 직물공장 노동자 결핵환자 중 20%는 2기 중환자였다. 24시간 밤샘 노동이 노동학대라는 인식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이처럼 열악한 노동조건을 감수하던 강화도에 JOC 팀이 만들어진다. 1965년의 일이다. 강화본당 주임이던 메리놀외방전교회 선교사 브란스필드(Michael Bransfield, 1929~89) 신부는 공장 소녀들의 참상을 목격하고 JOC 서울대교구 북부연합회 송옥자(고레티) 여성회장을 초청, 여직공들 인권의식을 일깨운다. 브란스필드 신부는 당시 미국 메리놀회 본부에 보낸 서한에서 그 상황을 이렇게 술회한다.
"미국에서 노동조합이 생기기 이전보다 이곳 조건은 더 열악합니다. 10대 소녀들이 1주일에 7일 전부, 하루 12시간 노동을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한 달에 쉴 수 있는 날은 고작 이틀뿐입니다. 하루 24시간 노동도 여기선 비상식적인 게 아니고 폐결핵과 과로 또한 흔합니다.… 이곳 한 공장에선 뉴욕 시장에 100만 달러 상당 실크를 팔고 있습니다. 그 옷을 입는 이들이 이곳 상황을 본다면, 한국에서 왜 노동조합이 필요한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JOC가 강화에 진출한 지 1년 9개월 만인 1967년 5월 강화성당 구내 그리스도왕 의원에서 '전국섬유노조 심도직할분회(분회장 함덕주)'가 설립된 것. 노조가 설립되자 공장측은 단체협약 체결을 거부하고 함 분회장에게 온갖 압력을 가해 휴직하게 한 뒤 자신들이 요구하는 박부양을 분회장으로 선출했으나, 박 분회장은 곧 노조원들의 참된 대표로 일하겠다며 마음을 바꾼다. 당시 배후조종자로 지목된 송 회장은 한동안 이들의 폭력이 무서워 성당 밖으로 나설 엄두를 내지도 못했을 지경이었다. 그해 12월엔 JOC 회원들이 불법적으로 해고되고 1968년 1월엔 박 분회장도 해고를 당한다. 또 그해 1월 7일 심도직물이 무기 휴업했고, 1월 8일에는 강화도 내 21개 직물공장 대표들이 모여 JOC 회원들을 취업시키지 않을 것을 결의했다. 이와 더불어 회사 사주를 받은 노동자들은 성당으로 몰려와 시위를 벌였고, 브란스필드 신부가 강화본당을 떠날 것을 요구했다. 1967년 5월 제2대 가톨릭노동청년회(JOC) 총재로 취임한 김수환(당시 마산교구장) 주교도 당시 심도직물에 노조가 결성되자 강화도를 방문, 외국인 사제단과 리차드(성공회) 신부, 조승혁(도시산업선교회, 감리교) 목사, JOC 회원 등과 함께하며 좌담회를 갖고 대책을 강구한다. 하지만 직물공장 관계자들은 좌담회에 난입, JOC회원들에게 거리낌없이 욕설을 퍼부었다. 또 이른바 '강화도를 사랑한다는 청년들' 12명은 다음날 전등사에서 열린 야유회에까지 몰려와 행패를 부렸다.당시 심도직물측은 브란스필드 신부가 강화도에서 떠날 것을 요구했으나 인천교구장 나 굴리엘모 주교는 이를 강력히 거부하고 1968년 1월 18일자로 발표한 특별메시지를 통해 "모든 사람들이 사회문제에 대한 교회 임무를 이해할 때에, 또 그들이 노동자들의 기본적 권리를 존중할 때에 비로소 하느님의 뜻대로 나라가 번영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음 달인 2월 한국천주교회 주교단은 새로 부임하는 교황대사 환영미사를 위해 대사관에 모일 계획이었다. 김 총재주교는 이에 나 굴리엘모 주교와 함께 주교단에 임시 주교회의 개최를 건의했다. 교회가 심도직물 사태에 대한 입장을 밝힐 필요가 있다는 게 김 주교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2월 9일 임시 주교회의를 통해 주교단은 '사회 정의와 노동자 권익 옹호를 위한 주교단 공동 성명서'를 발표했고, 이후 그해 7월까지 해고자들이 전원 복직되는 것으로 사태는 마무리됐다. 다음은 성명서 전문.
"한국 주교단은 옳지 못한 일을 당하면서도 침묵을 지킨다면 큰 잘못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대 교황께서 가르치신 원리에 따라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적 사회정의를 가르칠 권리와 의무가 있으며, 특히 노동자 권리를 가르쳐야 합니다. 목자로서 신부는 이러한 정의와 권리를 가르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노동자의 기본적 존엄성과 권리를 존중하고 이 존엄성과 권리를 강화하는 데 능동적으로 관여할 때 비로소 하느님 뜻에 따라 국가가 발전할 것입니다."
관련 영상
cpbc 라디오 드라마 '바보 김수환' 47회 [심도 직물 사건]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