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 고씨동굴
영월 고씨동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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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 번호 | 천연기념물 제219호 |
지정일 | 1969년 06월 04일 |
지정 명칭 | 영월고씨굴 |
한자 명칭 | 寧越 高氏洞窟 |
영문 명칭 | Gossigul Cave, Yeongwol |
분류 | 지질 |
건립·제작 | |
주소 |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영월동로 1121-9 |
위도 | 37.131102 |
경도 | 128.536310 |
웹사이트 | http://www.ywtour.com/Enjoy?num=53133&g=7&b=125&m=20&s=1# |
정의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진별리에 있는 석회동굴. 규모(면적, 높이, 길이) 면적 28만 3,472㎡(지정구역), 총길이 3㎞. [1]
위치
역사
월정사는 643년(선덕여왕 12) 당나라 유학을 마친 자장율사가 오대산에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당시 자장은 절을 세운 것은 아니었고, 문수보살을 만나기 위해 허름한 움막을 지었던 것이다. 고려말 민지가 지은 《봉암사리개건사암제일조사전기》라는 문헌에는 자장을 월정사의 최초 창건자로 보는 인식이 뚜렷히 나타나있고, 오늘날에도 월정사의 시초는 자장율사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2]
자장의 영향으로 인해 오대산은 문수보살을 모시는 문수신앙의 성지로 시작했다. 하지만 이후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면 오대산은 문수보살 뿐만아니라 다양한 불보살이 상주한다는 5만보살신앙으로 발전한다. 오대산의 다섯 봉우리는 중앙의 문수보살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는 각각 관음보살(동), 지장보살(서), 대세지보살(남), 미륵보살(북) 1만 분씩 상주하는 성지로 거듭난 것이다. [3] 하지만 이때까지도 움막으로 기록되고 있던 월정사가 어엿한 사찰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신의가 이곳에 법당을 세우면서부터다. 이 시기를 전후로 월정사는 오대산 신앙의 새로운 중심지로 떠오르게 된다.
고려전기, 월정사는 창건 이래 최대 흥성기를 맞이했다. 사실 그 이전까지도 사찰로서 월정사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고려 초, 선종의 아홉 갈래 승려집단을 일컫는 구산선문 중 강릉의 사굴산문이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월정사 또한 그 세력권에 포함되어 함께 발전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흥한 것도 잠시, 몽고의 침입 이후 다시 사세가 심하게 기울었다.[4] 이후 1377년(충렬왕 33)에는 절이 화재로 전소되었고, 다시 이일 스님이 중창하여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정책 때문에 불교가 전반적으로 쇠퇴했지만, 오대산 불교는 몇 가지 계기를 통해 어려움을 극복해나갔다. 첫번째는 조선 초기에 활약한 나옹의 문도들이 대거 오대산에 머무르면서 상원사와 월정사를 비롯한 오대산 불교권 전체가 주목을 받았던 것이다. 두번째는 조선의 6대왕 세조가 이곳에서 기도하던 중 불치의 병을 고치고, 이후 상원사를 중창하는데 적극적인 후원을 했기 때문이다.[5] 세번째는 16세기 말 쇠락했던 사찰을 사명대사가 중창하고,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왕실의 외사고(外史庫)가 이곳에 건립된 것이다. 이러한 여러 사건들은 억불정책 속에서도 월정사가 오히려 사세를 더욱 키워나갈 수 있도록 했다.
해방 전후로는 당시 조계종의 최고 지도자를 4번이나 역임했던 한암이 오대산에 머무르면서, 상원사와 월정사는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사찰로서 위상을 확립하게 된다. [6] 하지만 곧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1951년 1.4후퇴 때 사찰 대부분이 불타버렸지만, 이후에 탄허, 만화, 현해 등에 의해 다시 중건되어 월정사의 명맥은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2017년 현재 월정사의 주지는 정념스님이다.
특징
영월 고씨굴은 남한강 상류에 위치해 있으며, 지금으로부터 약 4∼5억년 전에 만들어졌다. 동굴은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있고, 동굴안의 온도는 연중 15℃ 안팎이며 수온은 5.3℃이다. 고씨굴 안에는 고드름처럼 생긴 종유석과 땅에서 돌출되어 올라온 석순이 널리 분포해 있으며, 화석으로만 존재한다 믿어왔던 갈로아 곤충이 서식하고 있다. 영월 고씨굴은 종유석과 석순 등이 잘 발달되어 있고, 다른 동굴에 비하여 동굴 속에서만 살아가는 희귀한 생물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다.[7]
명칭 유래
-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왜병과 싸운 고씨(高氏) 가족들이 한때 그곳에 피신하였기 때문에 그것이 굴 이름으로 되었다고 한다.[8]
- 고씨동굴이 위치한 자리가 고구려(高句麗) 땅 끝이었고, 여기 고구려(高句麗) 고씨(高氏)들이 모여 살다가 군대가 물러간 다음에도 머물러 살았다고 한다.[9]
경내 문화재
- 국보 48호 평창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 보물 제139호 평창 월정사 석조보살좌상
- 월정사 성보박물관 소장 불교문화재 640여점
가상현실
참고문헌
주석
- ↑ "영월고씨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17년 04월 05일.
- ↑ "월정사 역사와문화-1" 『원행스님』,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 문수성지 오대산 월정사, 2014년 2월 3일 작성
- ↑ "월정사소개" 『오대산 월정사 홈페이지』
- ↑ "월정사 역사와문화-5" 『원행스님』,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 문수성지 오대산 월정사, 2014년 2월 5일 작성
- ↑ "오대산의 월정사" 신정일,『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9: 우리산하』, 다음생각, 2012,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인용.
- ↑ "월정사소개" 『오대산 월정사 홈페이지』
- ↑ "영월 고씨굴", 『문화재청』. 2017년 04월 05일.
- ↑ "영월고씨굴", 『두산백과』, doopedia. 2017년 04월 05일.
- ↑ "고씨동굴이란 이름의 비밀", 『제마법선도』. 2017년 04월 0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