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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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운(崔致雲) | |
대표명칭 | 최치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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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崔致雲 |
출생일 | 1390년 6월 19일 |
사망일 | 1440년 12월 27일 |
본관 | 강릉(江陵) |
호 | 경호(鏡湖)·조은(釣隱) |
자 | 백경(伯卿) |
시대 | 조선 |
국적 | 조선 |
대표저서 |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 |
대표직함 | 참판 |
부 | 최안린(崔安麟) |
모 | 정선전씨 낭장(郎將) 전인구((全仁具)의 딸 |
최치운(崔致雲, 1390년 6월 19일 ~ 1440년 12월 27일)은 강릉 십이향현 중 일인인 조선의 문신이다.
생애
1408년(태종 8) 19세의 나이로 사마시 중 생원시에 합격하고, 1417년(태종 17) 27세의 나이에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 승문원에 등용된 뒤 집현전에 들어가서 학문을 연구하였다. 1433년(세종 15) 평안도도절제사 최윤덕(崔潤德)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야인 이만주(李滿住)를 토벌하는 데 공을 세우고 돌아와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가 되었다.
1439년(세종 21) 공조참판 때는 계품사(啓稟使)로서 명나라에 가서 범찰(凡察)·동창(童倉) 등의 야인들이 양민으로 경성 지역에 영주할 수 있도록 회유하기를 요청, 이를 관철시키는 등 총 5차례에 걸쳐 명나라 사신으로서 외교적 공적을 세웠다.
저술
1438년 11월 세종의 명으로 이세형(李世衡)·변효문(卞孝文)·김황(金滉) 등과 함께 법의학서인 『무원록(無寃錄)』을 주해하여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을 편찬하는 등 학문 정비에 기여하였다.
여담
술을 아주 즐겼는데 왕이 친서로써 절제할 것을 명하자, 그 글을 벽에 걸고 출입 시 항상 쳐다보았다고 한다.
참고
도서
- 박도식, 『강릉의 12향현 자료집』, 강릉문화원,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