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도설
목차
해제
이 페이지는 고려대 철학과 대학원 동양철학전공 원전 강독 세미나(의적단)의 일환으로 작성되었다. 이 페이지 원문의 저본은 중화서국本 『周敦頤集』(1990)이다. 추가로 통서 페이지를 참조할 수 있다.
원문
1. 太極圖 - 朱熹解附
1. 無極而太極
○, 此所謂無極而太極也, 所以動而陽、靜而隂之本體也. 然非有以離乎隂陽也, 即隂陽而指其本體不雜乎隂陽而為言耳.
[<태극도> 가장 위의] ○는 이른바 ‘무극이면서 태극(無極而太極)’이니, '動하여 陽을 [낳고] 靜하여 隂을 [낳는]' 본체이다. 그러나 음양에서 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음양에 즉해있으나 음양과 섞이지 않은 본체를 가리켜 말한 것일 뿐이다.
2. 太極動而生陽, 動極而靜, 靜而生陰. 靜極復動. 一動一靜, 互爲其根; 分陰分陽, 兩儀立焉.
, 此○之動而陽、静而隂也. 中◦者其本體也. 者, 陽之動也, ○之用所以行也. 者, 隂之静也, ○之體所以立也. 者, 之根也. 者, 之根也.
, 이것이 '태극○이 動하여 양을 [낳고] 靜하여 음을 낳는' 것이다. 그 가운데 ◦는 그 본체이다. 은 양의 動함이니, 태극○의 用이 운행하는 것이고, 은 음의 靜함이니, 태극의 體가 세워진 것이다. (음 속의 양)는 (양 속의 음)의 근본이고, (양 속의 음)는 (음 속의 양)의 근본이다.
3. 陽變陰合, 而生水火木金土. 五氣順布, 四時行焉.
, 此陽變隂合而生水火木金土也. 者, 陽之變也. 者, 隂之合也. ㊌隂盛, 故居右. ㊋陽盛, 故居左. ㊍陽穉, 故次火. ㊎隂穉, 故次水. ㊏冲氣[1], 故居中. 而水火之交系乎上, 隂根陽, 陽根隂也. 水而木, 木而火, 火而土, 土而金, 金而復水, 如環無端, 五氣布, 四時行也.
은 '양이 변하고 음이 합하여 수화목금토를 낳는다'는 것이다. 는 양의 변함이고 는 음의 합함이다. ㊌는 음이 성하므로 오른쪽에 있고, ㊋는 양이 성하므로 왼쪽에 있으며, ㊍은 양이 작으므로 ㊋ 다음이고, ㊎은 음이 작으므로 ㊌ 다음이며, ㊏는 중화된 기이므로 가운데에 있다. 수·화의 가 위로 엇갈려 이어져있는 것은 음은 양에 근거하고 양은 음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수였다가 목이 되고 목이었다가 화가 되고 화였다가 토가 되고 토였다가 금이 되고 금이었다가 다시 수가 되어서 마치 고리와 같이 끝이 없는 것은 '다섯 가지 기가 펴져서 사계절이 행해지는 것'이다.
4. 五行, 一陰陽也; 陰陽, 一太極也; 太極, 本無極也. 五行之生也, 各一其性.
, 五行一隂陽, 五殊二實, 無餘欠也. 隂陽一太極, 精粗本末無彼此也. 太極本無極, 上天之載無聲臭也. 五行之生, 各一其性, 氣殊質異, 各一其◦, 無假借也.
에서 ‘오행은 하나의 음양이다(五行一隂陽)’라는 것은 다섯으로 나뉜 [오행]과 [음양] 두 가지 실제에는 남거나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고, ‘음양은 하나의 태극이다(隂陽一太極)’라는 것은 精粗와 本末에 彼此가 없는 것이며, ‘태극은 본래 무극이다(太極本無極)’라는 것은 ‘상천의 일은 소리도 냄새도 없다’[2]는 것이고, ‘오행의 생성에 각각 본성을 동일하게 갖고 있다(五行之生, 各一其性)’는 것은 다른 氣質에 각각 그 태극○을 하나씩 갖고 있어서 따로 빌릴 것이 없다는 것이다.
5
, 此無極,二五所以妙合而無間也. ○,乾男,坤女,以氣化者言也,,各一其性,而男女一太極也. ○,萬物化生,以形化者言也, 各一其性,而萬物一太極也.
는 무극과 음양오행이 현묘하게 합하여 틈이 없는 것이다. ○는 乾은 남자고 坤은 여자이니 氣가 변화하는 것으로 말한 것인데, 각각 그 性을 하나씩 가지고 있으니 남녀가 하나의 태극인 것이다. ○는 만물이 화생함이니 形이 변화하는 것으로 말한 것인데, 각각 그 性을 한결같이 하니 만물이 하나의 태극인 것이다.
6
唯人也得其秀而最靈,則所謂人○者,於是乎在矣. 然形, 之為也, 神, 之發也, 五性, 之德也. 善惡,男女之分也, 萬事,萬物之象也. 此天下之動, 所以紛綸交錯, 而吉凶悔吝所由以生也.
오직 사람이 빼어난 기를 얻어 가장 신령하니,, 이른바 ‘사람의 극’人○이라는 것은 여기에서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형은 음이 한 것이고 신은 양이 발한 것이고, 五性(인의예지신)은 五行(수화목금토)의 덕이고, 선악은 남녀의 구분이며, 萬事는 만물의 형상이다. 이는 천하의 動이니, 번잡하고 어지러운 것이고 길흉과 재앙이 말미암아 생겨나는 바이다.
7
惟聖人者,又得夫秀之精一,而有以全乎○之體用者也.是以一動一靜,各臻其極,而天下之故,常感通乎寂然不動之中. 葢中也,仁也,感也,所謂也,○之用所以行也. 正也,義也,寂也,所謂也,○之體所以立也. 中正仁義,渾然全體,而靜者常為主焉. 則人○於是乎立,而天地,日月,四時,鬼神,有所不能違矣. 君子之戒謹恐懼,所以脩此而吉也. 小人之放僻邪侈,所以悖此而凶也.
오직 성인만이 또한 저 빼어난 것 중의 순일한 정수를 얻어서 태극의 체용을 온전히 할 수 있는 자이다. 이 때문에 한번 動하고 한번 靜할 때에 각각 그 지극함에 이르러서 천하의 일이 항상 적연부동한 가운데에서 감응하여 통한다. 中과 仁과 感은 이른바 양동이니, 태극의 用이 행해진 것이고, 正과 義와 寂은 이른바 음정이니, 태극의 體가 선 것이다. 中正仁義는 혼연한 전체이나 靜은 항상 主가 되어야 한다. 그러한즉 人極人○이 여기에서 세워져서 태극, 음양, 오행, 천지, 해와 달, 사계절, 귀신이 어긋날 수 없는 바가 있을 것이다. 군자의 계근공구는 이것을 닦아서 길해지는 까닭이고, 소인의 방벽사치는 이것을 거슬러서 흉한 까닭이다.
8
天地人之道,各一○也. 陽也,剛也,仁也,所謂也,物之始也. 隂也,柔也,義也,所謂也,物之終也. 此所謂易也,而三極之道立焉,實則一○也. 故曰易有太極, 之謂也.
天地人의 도는 각각 하나의 태극이다. 陽, 剛, 仁은 이른바 양동이니 사물의 시작이고, 隂, 柔, 義는 이른바 음정이니 사물의 끝이다. 이것이 이른바 易이니, 세 가지 극의 도가 세워졌으나 실제로는 하나의 태극이다. 그러므로 ‘역에 태극이 있다’고 말한 것은 음양을 이른 것이다.
2. 太極圖說 - 朱熹解附
無極而太極.
무극(無極)이면서 태극(太極)이다.
- 上天之載, 無聲無臭, 而實造化之樞紐, 品彙之根柢也. 故曰: “無極而太極.” 非太極之外, 復有無極也.
- 상천(上天)에서 하는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지만[3] 실제로는 온갖 조화의 근원(樞紐)이며 만물의 근거(根柢)다. 그러므로 “무극이면서 태극이다.”고 하였다. [하지만] 태극 외에 다시 무극이 있다는 말은 아니다.
太極動而生陽, 動極而靜, 靜而生陰. 靜極復動. 一動一靜, 互爲其根; 分陰分陽, 兩儀立焉.
태극이 움직여서[4] 양(陽)이 생기고 움직임이 극한에 달하여 고요해지는데 고요해지면 음(陰)이 생긴다. 그리고 고요함이 극한에 다다르면 다시 움직인다. 한번 움직이고 한번 고요해져서 서로 각각의 근거가 되니, 음으로 나뉘고 양으로 나뉘어 양의(兩儀)가 세워진다.
- 太極之有動靜, 是天命之流行也, 所謂“一陰一陽之謂道”. 誠者, 聖人之本, 物之終始, 而命之道也. 其動也, 誠之通也, 繼之者善, 萬物之所資以始也; 其靜也, 誠之復也, 成之者性, 萬物各正其性命也. 動極而靜, 靜極復動, 一動一靜, 互爲其根, 命之所以流行而不已也; 動而生陽, 靜而生陰, 分陰分陽, 兩儀立焉, 分之所以一定而不移也. 蓋太極者, 本然之妙也; 動靜者, 所乘之機也. 太極, 形而上之道也; 陰陽, 形而下之器也. 是以自其著者而觀之, 則動靜不同時, 陰陽不同位, 而太極無不在焉. 自其微者而觀之, 則沖漠無朕, 而動靜陰陽之理, 已悉具於其中矣. 雖然, 推之於前, 而不見其始之合; 引之於後, 而不見其終之離也. 故程子曰: “動靜無端, 陰陽無始. 非知道者, 孰能識之?”
- 태극에는 움직임과 고요함이라는 두 가지 상태가 있는데 이는 천명(天命)의 유행으로 「계사전」에서 “한번 음이 되고 한번 양이 되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5]라고 말한 것이다.
- [태극이란] 『통서』에서 “성(誠)이라는 것은 성인의 근본이다.”[6]라고 말한 것이며 『중용』에서 “만물의 시작과 끝이다.”[7]라고 말한 것으로 천명이라는 도리이다.
- 이것의 움직임은 “성(誠)의 형통함이다.”[8]라고 말한 것이고 “이를 이은 것은 선(善)이다.”라고 말한 것이고 “만물이 바탕으로 삼아 시작하는 것”[9]이라 말한 것이다.
- 이것의 고요함은 “성(誠)의 회복함이다.”[10]라고 말한 것이고, “이를 완성시킨 것이 성(性)이다.”라고 말한 것이고, “만물이 자신의 성명(性命)을 각각 바르게 한다.”[11]라고 말한 것이다.
- 움직임이 극한에 달하면 고요해지고, 고요함이 극한에 달하면 다시 움직이니, 이렇게 한번 움직이고 한번 고요해져서 서로가 서로의 근거가 되어주니, 천명은 이로써 유행하여 멈추지 않는 것이다. 움직여서 양이 생겨나고 고요해져서 음이 생겨나 양으로 나뉘고 음으로 나뉘어 양의가 세워지니, 분수가 이로써 일정해져서 바뀌지 않는 것이다. 대개 태극이라는 것은 본연의 신묘함이고, 움직임과 고요함은 [태극이] 올라타는 기틀이다.[12] 태극이란 형이상의 도리이고, 음양은 형이하의 형기이다.[13]
- 그래서 드러난 것으로부터 살펴보면 움직임과 고요함은 시간적으로 동일하지 않고 음양은 위치적으로 동일하지 않지만 태극은 그 안에 항상 존재하고 있으며, 미묘한 것으로부터 살펴보자면 아주 고요하고 아무런 조짐도 없어 보이지만 움직이고 고요해지는 음양의 이치는 이미 모두 그 안에 구비되어 있다.
- 비록 그렇지만 이를 앞으로 미루어보아도 최초의 합일된 상태를 볼 수 없고, 이를 뒤로 끌어 당겨봐야 최종적으로 떨어진 상태를 볼 수도 없다. 그러므로 정자께서는 “움직임과 고요함에는 끝이 없고, 음과 양에는 시작도 없으니 도를 깨달은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이를 알 수 있겠는가?”[14]라고 말씀하셨다.
陽變陰合, 而生水ㆍ火ㆍ木ㆍ金ㆍ土. 五氣順布, 四時行焉.
음양이 변화하거나 결합해서 수(水)·화(火)·목(木)·금(金)·토(土)라는 오행이 생겨난다. 다섯 종류의 기(五氣)는 순서에 따라 펴져서 춘(春)·하(夏)·추(秋)·동(冬)이라는 사시(四時)가 운행된다.
- 有太極, 則一動一靜而兩儀分; 有陰陽, 則一變一合而五行具. 然五行者, 質具於地, 而氣行於天者也. 以質而語其生之序, 則曰水ㆍ火ㆍ木ㆍ金ㆍ土, 而水ㆍ木, 陽也, 火ㆍ金, 陰也. 以氣而語其行之序, 則曰木ㆍ火ㆍ土ㆍ金ㆍ水, 而木ㆍ火, 陽也, 金ㆍ水, 陰也. 又統而言之, 則氣陽而質陰也; 又錯而言之, 則動陽而靜陰也. 蓋五行之變, 至於不可窮, 然無適而非陰陽之道. 至其所以爲陰陽者, 則又無適而非太極之本然也, 夫豈有所虧欠閒隔哉!
- 태극이 있으니 한번 움직이고 한번 고요해져서 양의가 나뉘고, 음양이 있으니 한번 변화하고 한번 결합해서 오행(五行)이 갖춰진다. 하지만 오행이라는 것은 그 질(質)이 땅에 갖춰져 있고 기(氣)는 하늘에서 운행한다.
- 질로 생성의 순서를 말하자면, 수 → 화 → 목 → 금 → 토인데 수와 목은 양에 속하고 화와 금은 음에 속한다.
- 기로 운행의 순서를 말하자면, 목 → 화 → 토 → 금 → 수인데 목과 화는 양에 속하고 금과 수는 음에 속한다.
- 이를 모두 통합해서 말하자면 기는 양에 속하고 질은 음에 속하지만, 또 교차해서 말하자면 동은 양에 속하고 정은 음에 속한다.
- 대개 오행의 변화는 도저히 궁구할 수 없는 것에까지 이르지만 어디를 가든 음양의 도리 아닌 것이 없고, 음양이 되는 원인에 이르면 또 어디를 가든 태극의 본연 아닌 것이 없다. 이 어찌 조그마한 흠결이나 간극이 있겠는가?
五行, 一陰陽也; 陰陽, 一太極也; 太極, 本無極也. 五行之生也, 各一其性.
오행은 하나의 음양이고, 음양은 하나의 태극이다. 태극은 본래 무극이다. 오행의 생성에 각각 본성을 동일하게 갖고 있다.[15]
- 五行具, 則造化發育之具無不備矣, 故又卽此而推本之, 以明其渾然一體, 莫非無極之妙; 而無極之妙, 亦未嘗不各具於一物之中也. 蓋五行異質, 四時異氣, 而皆不能外乎陰陽; 陰陽異位, 動靜異時, 而皆不能離乎太極. 至於所以爲太極者, 又初無聲臭之可言, 是性之本體然也. 天下豈有性外之物哉! 然五行之生, 隨其氣質而所稟不同, 所謂各一其性也. 各一其性, 則渾然太極之全體, 無不各具於一物之中, 而性之無所不在, 又可見矣.
- 오행이 구비되면 [만물이] 조화하고 발육하는 조건들이 모두 완비되므로 이에 즉하여 근원까지 밀고 올라가서 혼연한 일체에는 무극의 오묘한 작용 아닌 것이 없고, 무극의 오묘한 작용은 또한 각각 하나의 사물 안에 갖춰지지 않은 적이 없음을 밝혔다. 대개 오행과 사시의 서로 다른 질적 특성들은 모두 음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음양과 동정의 서로 다른 위상과 시기는 모두 태극으로부터 떨어질 수 없다. 태극이라고 하는 것에 또 소리나 냄새라고 말할 만한 것이 없으니 이는 성(性)의 본체가 그렇다는 말이다. 천하에 어찌 본성 밖의 어떤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오행의 생성에는 그 기질을 따라서 품부 받은 것이 동일하지 않으니, “각각 본성을 동일하게 갖고 있다.”라고 일컬은 바이다. 각각 본성을 동일하게 갖고 있다면 혼연한 태극이라는 완전한 본체가 각각 하나의 사물 안에 구비되어 있지 않은 것이 없어서 본성이 어디에나 있음을 또한 알 수 있다.
無極之眞, 二五之精, 妙合而凝. “乾道成男, 坤道成女”, 二氣交感, 化生萬物. 萬物生生, 而變化無窮焉.
무극의 신실함과 음양·오행의 순정함은 신묘하게 결합해서 응결된다. “건(乾)의 도리는 남자를 이루고, 곤(坤)의 도리는 여자를 이룬다.”[16]고 하니 음양이라는 두 기가 교감하여 만물을 화생시킨다. 만물이 발생하는 과정을 반복하니 변화는 끝이 없다.
- 夫天下無性外之物, 而性無不在, 此無極·二五所以混融而無閒者也, 所謂‘妙合’者也. ‘眞’以理言, 無妄之謂也; ‘精’以氣言, 不二之名也; ‘凝’者, 聚也, 氣聚而成形也. 蓋性爲之主, 而陰陽五行爲之經緯錯綜, 又各以類凝聚而成形焉. 陽而健者成男, 則父之道也; 陰而順者成女, 則母之道也. 是人物之始, 以氣化而生者也. 氣聚成形, 則形交氣感, 遂以形化, 而人物生生, 變化無窮矣. 自男女而觀之, 則男女各一其性, 而男女一太極也; 自萬物而觀之, 則萬物各一其性, 而萬物一太極也. 蓋合而言之, 萬物統體一太極也; 分而言之, 一物各具一太極也. 所謂天下無性外之物, 而性無不在者, 於此尤可以見其全矣. 子思子曰: “君子語大, 天下莫能載焉; 語小, 天下莫能破焉.” 此之謂也.
- 무릇 천하에는 그 어떤 사물도 성(性) 밖에 있는 것이 없으며 성(性)은 어디에나 있으니 이는 무극과 음양·오행이 섞이고 융화되어 틈이 없는 것으로 “신묘하게 결합한다.”라고 말한 바이다. ‘진(眞)’은 이치를 말한 것으로 아무런 망령됨이 없다는 말이다. ‘정(精)’은 기를 말한 것으로 둘로 나뉘지 않는 순수함의 명칭이다. ‘응(凝)’은 모인다는 말이니, 기가 모여서 형체를 이룬다.
- 일반적인 경우 성(性)은 주인이 되지만 음양·오행이 가로 세로로 교직되고 또 부류별로 모여서 형체를 이루게 된다. 양으로 강건함의 성질이 남자를 이룬 것은 아버지의 도이고, 음으로 유순함의 성질이 여자를 이룬 것은 어머니의 도이다. 이는 사람과 만물이 처음 시작할 때 기(氣)가 변화하여 생겨난 것이다. 기가 응결되어 형체를 이루면 형체와 기운이 교감하여 마침내 형체로써 변화를 하게 되어 사람과 만물이 생성되고 생성되니 변화가 끝이 없다.
- 남녀로부터 보자면 남녀는 각각 하나의 성(性)을 갖고 있어서 남녀는 하나의 태극이고, 만물로부터 보자면 만물은 각각 하나의 성(性)을 갖고 있어서 만물은 하나의 태극이다. 이를 합쳐서 말하자면 만물의 통체는 하나의 태극이고, 나눠서 말하자면 하나의 사물은 각각 하나의 태극을 갖추고 있으니, “천하에는 본성 밖에 어떠한 사물이 없으니 본성은 어디에나 있다.”라고 일컬은 바를 여기에서 더욱 그 전모를 알 수 있다. 자사가 말하기를 “군자가 큰 것을 말하면 천하라도 실을 수 없으며, 작은 것을 말하면 천하라도 깨뜨릴 수 없다.”[17]고 하였으니 이를 말한 것이다.
惟人也, 得其秀而最靈. 形旣生矣, 神發知矣, 五性感動, 而善惡分, 萬事出矣.
오직 사람만이 빼어난 것을 얻어서 가장 영명하다. 형체가 이미 생겨나면 정신이 지각을 발현시키니 [인(仁)·의(義)·예(禮)·지(知)·신(信)이라는] 다섯 가지 본성(五性)이 외물에 감응해 움직이다 선악(善惡)이 나뉘고 온갖 사태들이 출현한다.
- 此言衆人具動靜之理, 而常失之於動也. 蓋人物之生, 莫不有太極之道焉. 然陰陽五行, 氣質交運, 而人之所稟獨得其秀, 故其心爲最靈, 而有以不失其性之全, 所謂天地之心, 而人之極也. 然形生於陰, 神發於陽, 五常之性, 感物而動, 而陽善·陰惡, 又以類分, 而五性之殊, 散爲萬事. 蓋二氣五行, 化生萬物, 其在人者又如此. 自非聖人全體太極有以定之, 則欲動情勝, 利害相攻, 人極不立, 而違禽獸不遠矣.
- 이는 뭇 사람들이 동정(動靜)의 이치를 갖추고 있지만 항상 이를 동의 국면에서 잃어버림을 말한 것이다. 대개 사람과 만물이 생겨날 때에는 태극이라는 도리를 모두 가지고 있지만, 음양과 오행은 기(氣)와 질(質)이 교차하며 운행하다보니 사람이 품부 받은 것만이 유독 빼어난 것을 얻기 때문에 그 마음이 가장 영명하여 본성의 온전한 상태를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으니, 이른바 “천지지심(天地之心)”[18]이며 “사람의 표준(人之極)”이다.
- 그렇지만 형체는 음(陰)에서 생겨나고 정신은 양(陽)에서 발현되니, 오상(五常)이라는 본성이 외물과 감응해 움직이면 양(陽)은 선(善)이 되며 음(陰)은 악(惡)이 되고, 또 부류별로 나뉘면 오성(五性)의 차이는 온갖 사태들로 나뉘게 된다.
- 대개 음양·오행이 만물을 화생시키는 과정은 사람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지만, 성인처럼 완전하게 태극을 체인하여 이를 안정시키는 것이 아니라면 인욕이 움직여 감정이 [천리를] 이겨내 이해(利害)가 서로를 공격하여 인극(人極)이 세워지지 않게 되어 금수와의 차이가 크지 않게 된다.
聖人定之以中正仁義,聖人之道, 仁義中正而已矣. 而主靜, 無欲故靜. 立人極焉. 故“聖人與天地合其德, 日月合其明, 四時合其序, 鬼神合其吉凶”.
성인은 중(中)·정(正)·인(仁)·의(義)함으로 이를 안정시키고 (성인의 도는 인·의·중·정뿐이다.) 정(靜)을 위주로 (아무런 사심이 없기 때문에 고요하다.) 사람의 표준을 세우셨다. 그러므로 “성인은 천지와 그 덕이 합치되고, 일월과 그 밝음이 합치되고, 사시와 그 순서가 합치되며, 귀신과 그 길흉이 합치된다.”[19]
- 此言聖人全動靜之德, 而常本之於靜也. 蓋人稟陰陽五行之秀氣以生, 而聖人之生, 又得其秀之秀者. 是以其行之也中, 其處之也正, 其發之也仁, 其裁之也義. 蓋一動一靜, 莫不有以全夫太極之道, 而無所虧焉, 則向之所謂欲動情勝 利害相攻者, 於此乎定矣. 然靜者誠之復, 而性之眞也. 非此心寂然無欲而靜, 則又何以酬酢事物之變, 而一天下之動哉! 故聖人中正仁義, 動靜周流, 而其動也必主乎靜. 此其所以成位乎中, 而天地日月四時鬼神, 有所不能違也. 蓋必體立 而後用有以行, 若程子論乾坤動靜, 而曰: “不專一則不能直遂, 不翕聚則不能發散”, 亦此意爾.
- 이는 성인이 동정(動靜)의 덕을 온전히 하지만 항상 정(靜)에 근본하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대체로 인간은 음양·오행의 빼어난 기를 품수 받아 태어나지만, 성인의 태어남은 또 그 빼어난 기 중에서도 빼어난 것을 타고난다. 그래서 성인의 움직임은 이치에 들어맞고(中)하며, 거처함은 올바르며(正), 드러낸 것은 인하시며(仁), 재재함은 의롭다(義).[20][21]
- 대개 한번 움직이고 한번 고요할 때마다 [즉, 모든 상황에서 성인은] 저 태극이라는 도를 항상 온전히 보존하여 아무런 흠결이 없으니 앞서 ‘인욕이 움직이고 감정이 [천리를] 이겨내 이해가 서로를 공격한다.’고 말한 것이 여기에서 안정된다. [22]
- 그러나 고요함이란 “성(誠)의 복(復)”이고 “성(性)의 정(貞)”이니 만약 이 마음이 적연히(寂然) 아무런 사심 없어서 고요하지 않다면 또 어떻게 사물의 변화에 대응하여 천하의 움직임을 하나로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인의 중(中)·정(正)·인(仁)·의(義)는 동정을 모두 포괄하여 유행하지만 그 움직임은 반드시 고요함을 주로 삼으니 이것이 바로 “성인이 그 안에 자리하는” 까닭이고, 천지(天地)·일월(日月)·사시(四時)·귀신(鬼神)이 위배할 수 없는 바가 있는 것이다. 대개 반드시 체(體)가 세워진 이후에 용(用)이 유행할 수 있으니, 정자께서 건곤(乾坤)의 동정(動靜)을 논하시며 “전일하지 않으면 올곧게 완성할 수 없고, 합하여 모이지 않으면 발산할 수 없다.”[23]고 하신 것 역시 이러한 뜻일 뿐이다.
- 대개 한번 움직이고 한번 고요할 때마다 [즉, 모든 상황에서 성인은] 저 태극이라는 도를 항상 온전히 보존하여 아무런 흠결이 없으니 앞서 ‘인욕이 움직이고 감정이 [천리를] 이겨내 이해가 서로를 공격한다.’고 말한 것이 여기에서 안정된다.[24]
- 그러나 고요함이란 “성(誠)의 복(復)”이고 “성(性)의 정(貞)”이니 만약 이 마음이 적연히(寂然) 아무런 사심 없어서 고요하지 않다면 또 어떻게 사물의 변화에 대응하여 천하의 움직임을 하나로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인의 중(中)·정(正)·인(仁)·의(義)는 동정을 모두 포괄하여 유행하지만 그 움직임은 반드시 고요함을 주로 삼으니 이것이 바로 “성인이 그 안에 자리하는”[25] 까닭이고, 천지(天地)·일월(日月)·사시(四時)·귀신(鬼神)이 위배할 수 없는 바가 있는 것이다. 대개 반드시 체(體)가 세워진 이후에 용(用)이 유행할 수 있으니, 정자께서 건곤(乾坤)의 동정(動靜)을 논하시며 “전일하지 않으면 올곧게 완성할 수 없고, 합하여 모이지 않으면 발산할 수 없다.”[26]고 하신 것 역시 이러한 뜻일 뿐이다.
君子修之, 吉; 小人悖之, 凶.
군자는 수양하니 길하며, 소인은 어긋나니 흉하다.
- 聖人太極之全體, 一動一靜, 無適而非中正仁義之極, 蓋不假修爲而自然也. 未至此而修之, 君子之所以吉也; 不知此而悖之, 小人之所以凶也. 修之悖之, 亦在乎敬肆之閒而已矣. 敬則欲寡而理明, 寡之又寡, 以至於無, 則靜虛動直, 而聖可學矣.
- 성인은 태극을 완전히 체현한 자이니 한번 움직이고 한번 고요해지는 변화의 과정에서 어디서든 중(中)·정(正)·인(仁)·의(義)의 극치 아님이 없지만, 대개 수양을 거치지 않고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다. 아직 여기에 미치지 못하여 수양을 한다면 군자가 길한 까닭이고, 이를 모르고 어긋난다면 소인이 흉한 까닭이다.
- 수양함과 어긋남은 또한 공경함(敬)과 방사함(肆) 사이에 달려있을 뿐이니, 공경하면 사욕이 적어져 천리가 밝혀질 것이다. 적어지고 적어져서 어떠한 사욕도 없어지게 된다면 고요할 때에는 [아무런 사욕이 없이] 텅 비워질 것이고 움직일 때에는 [모든 행동들이] 올곧을 것이니 성인의 경지는 배워서 도달할 수 있다.[27]
故曰: “立天之道, 曰陰與陽; 立地之道, 曰柔與剛; 立人之道, 曰仁與義.” 又曰: “原始反終, 故知死生之說.”
그러므로 “천도(天道)를 세우며 음(陰)과 양(陽)을 말하였고, 지도(地道)를 세우며 유(柔)와 강(剛)을 말하였고, 인도(人道)를 세우며 인(仁)과 의(義)를 말하였다.”[28]고 하였으며, 또 “시작을 궁구하고 끝으로 돌아가니 그러므로 죽음과 삶의 설을 알겠다.”[29]고 한 것이다.
- 陰陽成象, 天道之所以立也; 剛柔成質, 地道之所以立也; 仁義成德, 人道之所以立也. 道一而已, 隨事著見, 故有三才之別, 而於其中又各有體用之分焉, 其實則一太極也. 陽也ㆍ剛也ㆍ仁也, 物之始也; 陰也ㆍ柔也ㆍ義也, 物之終也. 能原其始, 而知所以生, 則反其終而知所以死矣. 此天地之閒, 綱紀造化, 流行古今, 不言之妙. 聖人作易, 其大意蓋不出此, 故引之以證其說.
- 음양은 상(象)을 이루니 천도가 세워지는 까닭이고, 강유는 질(質)을 이루니 지도가 세워지는 까닭이고, 인의는 덕(德)을 이루니 인도가 세워지는 까닭이다. 도는 하나일 뿐이나 사태에 따라서 드러나기 때문에 천·지·인이라는 삼재(三才)의 구별이 있고 그 안에 또 각각 체용(體用)이라는 구별이 있지만 그 실질은 결국 하나의 태극뿐이다.
- 양(陽)·강(剛)·인(仁)은 만물의 시작이고 음(陰)·유(柔)·의(義)는 만물의 끝이니, 그 시원을 궁구하여 생성의 이유를 안다면 그 끝을 반추하여 죽음의 이유를 알게 된다.
- 이는 [공간적으로] 천지의 사이에서 조화를 이루는 강기(綱紀)이고, [시간적으로] 고금에 걸쳐 유행하는 것으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묘함이다. 성인께서 『주역』을 지으실 때 그 대의(大意)는 대체로 여기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이를 인용하셔서 그 설을 증명하셨다.
大哉易也, 斯其至矣!
위대하다 역(易)이여! 이렇게도 지극하도다.
- 易之爲書, 廣大悉備, 然語其至極, 則此圖盡之. 其指豈不深哉! 抑嘗聞之, 程子昆弟之學於周子也, 周子手是圖以授之. 程子之言性與天道, 多出於此. 然卒未嘗明以此圖示人, 是則必有微意焉. 學者亦不可以不知也.
- 『주역』이라는 책은 광대하여 모든 것을 갖추고 있지만,[30] 지극한 경지를 말한 것으론 이 도설이 완벽하다. 그 요지가 어찌 심원하지 않겠는가? 일찍이 듣기론, 정자 형제가 주자(周子)에게 배웠을 때 주자가 손수 이 도설지어서 주었다고 한다. 정자가 성(性)과 천도(天道)를 말씀하신 것은 대체로 이로부터 나왔다. 그러나 끝내 한 번도 이 도설을 드러내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으셨으니, 이는 필시 우리들이 알 수 없는 숨겨진 의도가 있었을 것이지만 학자들은 그래도 모를 수 없다.[31]
3. 附辯
愚既爲此說, 讀者病其分裂已甚, 辨詰紛然, 苦於酬應之不給也. 故總而論之.
내가 이 해설을 쓰고 나자, 독자들이 내 해설의 분석이 매우 심함을 문제 삼아 분분하게 따졌는데, [나는 이에 대해] 충분히 대답해주지 못함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여기서] 총괄하여 설명하겠다.
大抵難者⓵或謂不當以繼善成性分陰陽, ⓶或謂不當以太極陰陽分道器, ⓷或謂不當以仁義中正分體用, ⓸或謂不當言一物各具一太極. 又⓹有謂體用一源, 不可言體立而後用行者, 又⑥有謂仁爲統體, 不可偏指爲陽動者, 又⑦有謂仁義中正之分, 不當反其類者. 是數者之說, 亦皆有理. 然惜其於聖賢之意, 皆得其一而遺其二也.
대개 질문자들은 ⓵혹 繼善·成性을 陰陽으로 나눠선 안 된다고도 하고, ⓶혹 太極·陰陽을 道器로 나눠선 안 된다고도 하며, ⓷혹 仁義中正을 體用으로 나눠선 안 된다고도 하고, ⓸혹 ‘각 사물이 하나의 태극을 갖추고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도 한다. 또 ⓹體用은 근원을 한 가지로 하니 ‘體를 세운 뒤에 用이 행해진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자도 있고, 또 ⑥仁은 統體이므로 陽動만 가리켜서는 안 된다고 하는 자도 있으며, ⑦仁義中正의 구별에 대해 그 부류(體用)를 반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자도 있다. 이 여러 가지 설에도 모두 나름의 논리가 있지만, 안타깝게도 그들 모두 성현의 뜻에 대해 하나만 얻고 둘을 빠뜨렸다.
夫道體之全, 渾然一致, 而精粗本末, 内外賓主之分, 粲然於其中, 有不可以毫釐差者. 此聖賢之言, 所以或離或合, 或異或同, 而乃所以爲道體之全也. 今徒知所謂渾然者之爲大而樂言之, 而不知夫所謂粲然者之未始相離也, 是以信同疑異, 喜合惡離, 其論每䧟於一偏, 卒爲無星之稱、無寸之尺而已, 豈不誤哉!
저 온전한 도체는 혼연히 일치되어있지만, 精粗·本末·内外·賓主의 구분이 찬란히 그 안에서 조금도 어긋나서는 안 되는 점이 있다. 이것이 성현의 말씀들이 혹 괴리되거나 혹 합치되고, 혹 다르거나 혹 같은 까닭이니, [이것들이] 바로 온전한 도체를 이루는 것이다. 지금 그저 이른바 ‘혼연한 것’이 위대함만 알고 즐겨 떠들면서 이른바 ‘찬란한 것’과 애당초 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생각과 같은 것은 믿고 다른 것은 의심하며, 부합하는 것은 좋아하고 괴리되는 것을 미워해, 그 주장이 매번 한 편에 빠져 끝내 ‘눈금 없는 저울’·‘눈금 없는 자’가 될 뿐이니, 어찌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⓵ ‘繼善·成性을 陰陽으로 나눠선 안 된다’는 비판에 대한 해명
夫善之與性, 不可謂有二物, 明矣. 然繼之者善, 自其陰陽變化而言也; 成之者性, 自夫人物禀受而言也. 陰陽變化流行而未始有窮, 陽之動也; 人物禀受一定而不可復易, 陰之靜也. 以此辨之, 則亦安得無二者之分哉! 然性善, 形而上者也; 陰陽, 形而下者也. 周子之意, 亦豈直指善爲陽而性爲陰哉? 但語其分, 則以爲當属之此耳.
善은 性과 두 가지로 말해선 안 됨이 분명하다. 그러나 ‘繼之者善’은 陰陽變化로 말한 것이고, ‘成之者性’은 人物이 품수받는 것으로 말한 것이다.[32] 음양이 변화하며 유행함에 애당초 끝이 없는 것은 陽之動이요, 人物이 품수받은 것이 일정하여 다시 바꿀 수 없는 것이 陰之靜이다. 이렇게 변별한다면, 또 어찌 둘로 구분하는 것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性善은 형이상자이고, 陰陽은 형이하자다. 周子의 뜻이 또 어찌 善은 陽이고, 性은 陰이라고만 하셨겠는가? 다만 그 차이를 말한다면 응당 여기에 속해야한다고 생각하셨을 뿐이다.
⓶ ‘太極·陰陽을 道器로 나눠선 안 된다’는 비판에 대한 해명
陰陽太極, 不可謂有二理, 必矣. 然太極無象, 而陰陽有氣, 則亦安得而無上下之殊哉? 此其所以爲道器之別也. 故程子曰: “形而上爲道, 形而下爲器, 須著如此說. 然器亦道也, 道亦器也.” 得此意而推之, 則庶乎其不偏矣.
陰陽과 太極에 두 가지 이치가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태극에는 형상이 없고 음양에는 [느껴지는] 기운이 있으니, 또 어찌 형이상하의 차이가 없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道器로 구별할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정자께서는 “형이상자를 道라고 하고, 형이하자를 器라고 하니, 모름지기 이렇게 말해야 한다. 그러나 器 역시 道고, 道 역시 器다.”[33][34]라고 하셨다. 이 뜻을 얻어 미루어본다면 아마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⓷ ‘仁義中正을 體用으로 나눠선 안 된다’는 비판에 대한 해명
仁義中正, 同乎一理者也, 而析爲體用, 誠若有未安者. 然仁者, 善之長也; 中者, 嘉之會也; 義者, 利之宜也; 正者, 貞之體也. 而元亨者, 誠之通也; 利貞者, 誠之復也. 是則安得爲無體用之分哉?
仁義中正은 하나의 이치라는 점에서 동일하기에 體用으로 나누는 것은 실로 온당치 못한 점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仁이라는 것은 [뭇] 善의 으뜸이요, 中이라는 것은 아름다움의 집합체이며, 義라는 것은 이로움 가운데 마땅함이요, 正이라는 것은 올곧음의 본체이다.[35] [또] ‘元亨이라는 것은 誠之通이며, 利貞이라는 것은 誠之復이다.’[36] 그렇다면 어찌 體用의 구분이 없을 수 있겠는가?
⓸ ‘「각 사물이 하나의 태극을 갖추고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비판에 대한 해명
萬物之生, 同一太極者也; 而謂其各具, 則亦有可疑者. 然一物之中, 天理完具, 不相假借, 不相陵奪, 此統之所以有宗, 會之所以有元也. 是則安得不曰: ‘各具一理’哉!
만물이 태어남에 하나의 태극이라는 것을 공유하는데, ‘각각 갖추고 있다’고 한다면 역시 의심할 만한 점이 있다. 그러나 하나의 사물 가운데 천리가 완전히 구비되어 [밖에서] 빌려올 필요도 빼앗아올 필요도 없으니, 이것이 ‘천하를 통치함에 천자가 있고, 회맹에 패자가 있는’[37] 까닭이다. 그렇다면 어찌 ‘각각 하나의 이치를 갖추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⓹ ‘「體를 세운 뒤에 用이 행해진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비판에 대한 해명
若夫所謂體用一源者, 程子之言蓋已密矣. 其曰: ‘體用一源’者, 以至微之理言之, 則沖漠無朕, 而萬象昭然已具也. 其曰: ‘顯微無間’者, 以至著之象言之, 則即事即物而此理無乎不在也. 言理則先體而後用, 蓋舉體而用之理已具, 是所以爲一源也. 言事則先顯而後微, 蓋即事而理之體可見, 是所以爲無間也. 然則所謂一源者, 是豈漫[38]無精粗先後之可言哉? 况既曰: ‘體立而後用行’, 則亦不嫌於先有此而後有彼矣.
이른바 體用一源이라는 것은 정자의 말씀이 대체로 매우 엄밀하다. 정자께서 ‘體用一源’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지극히 은미한 이치로 말한 것이니,[39] 텅 비고 흔적이 없지만 萬象이 환히 이미 갖춰져 있는 것이다.[40] [또] 정자께서 ‘顯微無間’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지극히 드러난 형상으로 말한 것이니, 사물에 즉함에 이 이치가 있지 않은 곳이 없는 것이다. 이치를 말하면 體가 먼저고 用이 나중이니, 體를 거론함에 用의 이치가 이미 갖춰져 있는 것이니, 이것이 一源이 되는 까닭이다. 일을 말하면 顯이 먼저고 微가 나중이니, 일에 즉함에 이치라는 본체를 알 수 있으니, 이것이 無間이 되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이른바 一源이라는 것이 어찌 그저 말할 만한 精粗先後이 없는 것이겠는가? 게다가 이미 ‘體가 선 이후에 用이 행해진다’고 말한 이상, ‘먼저 이것이 있고 나중에 저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문제되지 않는다.
⑥ ‘仁은 統體이므로 陽動만 가리켜서는 안 된다’는 비판에 대한 해명
所謂仁爲統體者, 則程子所謂專言之而包四者是也. 然其言蓋曰: ‘四德之元, 猶五常之仁, 偏言則一事, 專言則包四者.’則是仁之所以包夫四者, 固未嘗離夫偏言之一事, 亦未有不識夫偏言之一事, 而可以驟語夫專言之統體者也. 况此圖以仁配義, 而復以中正參焉, 又與陰陽剛柔爲類, 則亦不得爲專言之矣, 安得遽以夫統體者言之, 而昧夫陰陽動靜之別哉!
이른바 ‘仁이 統體가 된다’는 것은 정자께서 말씀하신 ‘專言之’와 ‘包四者’가 이것이다. 그러나 그 말씀은 대개 ‘[元亨利貞] 네 가지 덕 가운데의 元은 [仁義禮智信] 五常 가운데의 仁과 같으니, 부분으로서 말하면(偏言) 한 가지 일이요, 단독으로 말하면(專言) 넷을 포함한다.’[41]는 것이니, 그렇다면 仁이 저 네 가지를 포함하는 것은 진실로 부분으로서 말한(偏言) 한 가지 일과 떨어진 적이 없고, 또 부분으로서 말한(偏言) 한 가지 일을 모르면서 저 단독으로 말한(專言) 統體를 바로 말할 수 있는 경우도 없다. 하물며 이 《태극도》는 仁으로 義에 짝하고 다시 中正을 더했고, 또 陰陽剛柔와 부류를 이뤘으니, 역시 단독으로 말한(專言) 것이 될 수 없는데, 어찌 바로 저 統體로 말하여 저 陰陽動靜의 차이를 가려서야 되겠는가!
⑦ ‘仁義中正의 구별에 대해 그 부류를 반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비판에 대한 해명
至於中之爲用, 則以無過不及者言之而, 非指所謂未發之中也. 仁不爲體, 則亦以偏言一事者言之, 而非指所謂專言之仁也. 對此而言, 則正者所以爲中之幹, 而義者所以爲仁之質, 又可知矣. 其爲體用, 亦豈爲無說哉?
中이 用이 되는 것의 경우는 過不及이 없는 것으로 말한 것이지 이른바 未發之中을 가리킨 것이 아니다. 仁이 體가 되지 않는 것 역시 한 가지 일을 ‘부분으로서 말한(偏言) 것’으로 말하는 것이지 이른바 ‘단독으로 말한(專言) 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것에 비춰 말한다면, 正이라는 것은 中이 되는 줄기이고, 義라는 것은 仁이 되는 바탕임을 또한 알 수 있다. 仁義中正이 體用이 되는 것에 또 어찌 근거가 없겠는가?
大抵周子之爲是書, 語意峻潔[42]而混成[43], 條理精密而疎暢. 讀者誠能虛心一意, 反復潜玩, 而毋以先入之說亂焉, 則庶幾其有得乎周子之心, 而無疑於紛紛之說矣.
周子께서 이 책을 쓰심에, 말뜻이 준엄·정결하면서도 포괄적이며, 조리가 정밀하면서도 막힘이 없다. 독자가 진실로 마음을 비우고 뜻을 모아 반복하여 潛心玩味하고 이전에 들은 설로 어지럽히지 않는다면, 아마도 周子의 마음을 이해하여 분분한 설에 의해 의심을 품게 되지 않을 것이다.
4. 注後記
熹既爲此說, 嘗錄以寄廣漢張敬夫. 敬夫以書來曰: “二先生所與門人講論問答之言, 見於書者詳矣. 其於《西銘》, 蓋屢言之; 至此圖則未嘗一言及也. 謂其必有微意, 是則固然. 然所謂微意者, 果何謂耶?”
내가 이 해설을 쓰고서 일찍이 이를 적어 광한 장경부에게 보냈는데, 경부가 편지를 보내왔다: “[명도·이천] 두 선생께서 문인들과 강론하고 문답을 주고받으신 말씀들은 책에 보이는 것이 상세합니다. 두 선생께서 《서명》에 대해서는 누차 말씀하셨는데, 이 《태극도》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대는] ‘거기에 필시 숨겨진 의도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진실로 그렇겠지만, 이른바 ‘숨겨진 의도’라는 게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熹竊謂以爲此圖立象盡意, 剖析幽微, 周子蓋不得已而作也. 觀其手授之意, 蓋以爲惟程子爲能當之. 至程子而不言, 則疑其未有能受之者爾. 夫既未能黙識於言意之表, 則馳心空妙, 入耳出口, 其弊必有不勝言者. 近年已覺頗有此弊矣. 觀其答張閎中論『易傳』成書, 深患無受之者, 及『東見錄』中論横渠清虛一大之說, 使人向別處走, 不若且只道敬, 則其意亦可見矣. 若《西銘》則推人以之天, 即近以明遠, 於學者日用, 最爲親切, 非若此書詳於性命之原, 而略於進爲之目, 有不可以驟而語者也. 孔子雅言『詩』·『書』, 執禮, 而於『易』則鮮及焉, 其意亦猶此爾. 韓子曰: “堯舜之利民也大, 禹之慮民也深.” 熹於周子、程子亦云.
내가 삼가 생각건대, 이 《태극도》가 도상을 세워 의미를 모두 설명하여 깊이 감춰진 것을 분석한 것은, 周子께서 아마 부득이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周子께서 손수 주신 뜻을 보건대, 아마도 오직 정자만이 감당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이지만, 정자께서 《태극도》에 대해 말씀하시지 않은 것의 경우는 아마도 전수받을 수 있는 자가 없다고 의심하신 듯하다. 겉으로 드러난 言意를 黙識할 수 없으면 마음을 空妙한 곳으로 내달리게 하여 귀에 들어온 것을 [바로] 입으로 뱉게 되니, 그 폐단에 반드시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점이 있다. (근년에 이런 병폐가 상당히 있음을 매우 깨달았다.) 정자께서 장굉중이 『역전』의 완성에 대해 논함에 전수받을 자가 없음을 깊이 걱정하셨고,[44] 또 『동견록』에서 횡거 선생의 清虛一大의 설에 대해 논하심에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곳을 향해 달려가게 하니, 우선 敬을 말하는 것만 못하다’[45]고 하신 것을 보면 정자의 뜻을 또한 알 수 있다.
《서명》의 경우는 사람에서 미루어 하늘에 이르고, 가까운 것에 즉하여 먼 것을 밝히니, 배우는 자의 일상에 가장 친절하니, 이 책이 성명의 근원에 상세하고 실천하는 조목에 소략하여 바로 말해서는 안 되는 점이 있는 것과 같지 않다. 공자께서는 『시』·『서』와 예를 지키는 것을 늘 말씀하셨는데,[46] 『역』에 대해선 드물게 언급하셨으니, 그 뜻 또한 이와 같을 것이다.
한유가 말하길: “요순이 백성을 이롭게 한 것이 크고, 우가 백성을 염려한 것이 깊다.”[47]고 했는데, 나는 주자·정자에 대해 그렇게 생각한다.
既以復於敬夫, 因記其說於此.
이미 경부에게 답장 보냈으나,[48] 그 김에 여기에 그 설명을 기록해둔다.
乾道癸巳四月既望, 熹謹書.
건도 계사년(1173) 4월 16일, 주희가 삼가 쓰노라.
각주
- ↑ <한어대사전> 2. 指陰陽二氣互相沖擊而產生的中和之氣。
- ↑ 『詩經』 「大雅」 《文王》 命之不易, 無遏爾躬. 宣昭義問, 有虞殷自天. 上天之載, 無聲無臭. 儀刑文王, 萬邦作孚.
- ↑ 『詩經·文王之什』 「文王」, 命之不易, 無遏爾躬. 宣昭義問, 有虞殷自天. 上天之載, 無聲無臭. 儀刑文王, 萬邦作孚.
- ↑ 진래, 『주희의 철학』, 67쪽, “유행은 여기에서 천명의 유행을 가리키며 천명의 유행은 理氣를 겸해 말한 것으로 기가 리의 지배 아래에서 動靜·闔闢·往來하는 과정을 가리킨다. 『주역』「계사전」에서 ‘一陰一陽之謂道’고 한 것은 주희가 二程의 견해를 이어 한번 陰이되고 한번 陽이되는 것은 기의 유행이라 하고 도를 그 유행의 所以然이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一陰一陽之謂道’는 주희에게 있어 기가 리의 지배 아래 운동하는 과정을 가리킨다. 이렇게 볼 때, ‘태극에 동정이 있다.’는 것 역시 태극 자체의 운동을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라 태극이 (음양)이기가 동정·교차하는 운동 과정에서 체현된 것임을 의미한다. 태극이 동정을 포함한다는 것은 본체의 은미한 데서 말한 것이고, 태극에 동정이 있다는 것은 유행의 드러남 즉 작용에서 말한 것이다.”
- ↑ 『周易』 「繫辭上」5章, 一陰一陽之謂道, 繼之者善也, 成之者性也.
- ↑ 『通書』 「誠上第一」, 誠者, 聖人之本. 【註】 誠者, 至實而無妄之謂, 天所賦·物所受之正理也. 人皆有之, 而聖人之所以聖者無他焉, 以其獨能全此而已. 此書與太極圖相表. 誠即所謂太極也.
- ↑ 『中庸章句』25章, 誠者自成也, 而道自道也. 誠者物之終始, 不誠無物. 是故君子誠之為貴.
- ↑ 『通書』 「誠上第一」, 元·亨, 誠之通.
- ↑ 『周易』 「乾卦·彖傳」, 大哉乾元, 萬物資始, 乃統天.
- ↑ 『通書』 「誠上第一」, 利·貞, 誠之複.
- ↑ 『周易』 「乾卦·彖傳」, 乾道變化, 各正性命, 保合大和, 乃利貞.
- ↑ 『朱子語類』94권, 問「動靜者,所乘之機。」 曰:「理撘於氣而行。」 ; 『朱子語類』94권, 問「動靜者,所乘之機」。曰:「太極理也,動靜氣也。氣行則理亦行,二者常相依而未嘗相離也。太極猶人,動靜猶馬;馬所以載人,人所以乘馬。馬之一出一入,人亦與之一出一入。蓋一動一靜,而太極之妙未嘗不在焉。此所謂『所乘之機』,無極、二五所以『妙合而凝』也。」“동정은 [태극이] 타는 기틀이다.”를 물었다. 답했다. “태극은 理이고, 동정은 氣이다. 기가 운행하면 리 역시 운행되니, 둘은 항상 의존하면서 서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 태극은 사람에 비유할 수 있고 동정은 말에 비유할 수 있으니, 말은 사람을 싣고 사람은 말에 올라타는 것이다. 말이 한번 왔다 갔갈 때 사람 역시 이와 함께 왔다 갔다 한다. 대개 한번 동이 되고 한번 정이 될 때 태극의 오묘함은 그 안에 없던 적이 없었으니, 이것이 바로 ‘타는 바의 기틀이다.’라는 말이다. 無極과 陰陽·五行은 ‘신묘하게 결합하여 응결’된 것이다.”
- ↑ 『文集』41卷 「答楊子直一」, “蓋天地之間, 只有動靜兩端, 循環不已, 更無餘事, 此之謂易. 而其動其靜, 則必有所以動靜之理焉, 是則所謂太極者也. 聖人旣指其實而名之, 周子又爲之圖以象之, 其所以發明表著, 可謂無餘蘊矣. 原極之所以得名, 蓋取樞極之義, 聖人謂之太極者, 所以指夫天地萬物之根也. 周子因之, 而又謂之無極者, 所以著夫無聲無臭之妙也. 然曰‘無極而太極’·‘太極本無極’, 則非無極之後, 別生太極, 而太極之上, 先有無極也. 又曰‘五行陰陽’·‘陰陽太極’, 則非太極之後, 別生二五, 而二五之上, 先有太極也. 以至於成男成女化生萬物, 而無極之妙, 蓋未始不在是焉. 此一圖之綱領, 大易之遺意, 與老子所謂‘物生於有, 有生於無’, 而以造化爲眞有始終者, 正南北矣. 來喩乃欲一之, 所以於此圖之說多所乖礙而不得其理也. 熹向以太極爲體, 動靜爲用, 其言固有病, 後已改之, 曰: ‘太極者本然之妙也, 動靜者所乘之機也’, 此則庶幾近之. 來喩疑於體用之云甚當, 但所以疑之之說, 則與熹之所以改之之意, 又若不相似然. 蓋謂太極含動靜則可(以本體而言也), 謂太極有動靜則可(以流行而言也), 若謂太極便是動靜, 則是形而上下者不可分, 而易有太極之言亦贅矣.”천지의 사이엔 단지 動靜이라는 두 가지 단서가 끝없이 순환함만 있을 뿐 다른 일은 없으니 이것을 ‘易’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動靜에은 반드시 動靜하는 이치가 있기 마련이니 이를 ‘太極’이라고 합니다. 성인께서는 이미 그 실질을 지칭하여 이름 하셨고, 주돈이는 또 이로 인해 도를 그려서 형상화 시켰으니 그가 발명하여 드러낸 것에 더 이상 감춰진 것이 없다고 말할 만합니다. ‘極’이라는 명칭을 궁구해보자면 대개 ‘樞極’이라는 뜻에서 취해졌으니 성인께서 이를 太極이라고 말한 것은 이것이 천지만물의 근본임을 지칭한 것입니다. 주돈이가 이에 기인하여 또 ‘無極’이라 한 것은 ‘아무런 소리도 냄새도 없이 작용하는 오묘한 작용’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러나 ‘無極而太極’이라 한 것은 無極의 뒤에 별도로 太極이 생겨난다는 말이 아니고, 太極의 위에 먼저 無極이 있다는 말도 아닙니다. 또 ‘五行陰陽’ ‘陰陽太極’을 말한 것은 太極의 뒤에 별도로 陰陽과 五行이 생겨난다는 말이 아니고, 陰陽과 五行 위에 먼저 太極이 있다는 말도 아닙니다. ‘남자를 이루고 여자를 이루어서 만물을 화생시킨다.’라는 말에 이르러서는 無極의 신묘함이 대개 일찍이 여기에 있지 않은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는 태극도설의 강령이고, 주역의 남겨진 뜻이니 노자가 ‘만물은 有에서 생겨나고, 有는 無에서 생겨난다.’라고 말하여 조화의 과정에 시작과 끝을 상정한 것과는 천양지차입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는 이를 하나로 보려고 하셨으니, 도설의 설에 막히는 부분이 많아 그 이치를 얻지 못한 까닭입니다. 저는 일전에 太極은 體라 여기고, 動靜은 用이라고 여겼는데 이 말에는 진실로 병폐가 있어서 훗날 개정하며 ‘太極이란 본연의 신묘함이고, 動靜이란 타는 것의 기틀이다.’고 하였으니 이 말이 거의 이치에 가까운 듯합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는 體用이라는 말이 의심스럽다고 하셨는데 매우 지당하십니다. 하지만 이를 의심하신 말과 제가 이를 개정한 의도에는 또 비슷하지 않은 것도 같습니다. 대개 太極이 動靜을 함축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가하고(이는 본체로 말한 것이다.), 太極에 動靜이 있다고 말해도 가하지만(이는 유행으로 말한 것이다.) 만약 太極이 곧 動靜이라고 말한다면 형이상과 형이하를 구분할 수 없게 되니 ‘易有太極’이라는 말이 또한 군더더기가 되고 맙니다.
- ↑ 『二程粹言』1-112, 子曰: 動靜無端, 陰陽無始, 非知道者, 孰能識之?
- ↑ 『朱子語類』94卷, 問:「『五行之生,各一其性』,理同否?」曰:「同而氣質異。」曰:「既說氣質異,則理不相通。」曰:「固然。仁作義不得,義作仁不得。」 ; 『朱子語類』94卷, 或問圖解云:「五行之生,隨其氣質而所稟不同,所謂『各一其性』也。」曰:「氣質是陰陽五行所為,性則太極之全體。但論氣質之性,則此全體在氣質之中耳,非別有一性也。」
- ↑ 『周易』 「繫辭上」1章, 是故, 剛柔相摩, 八卦相盪. 鼓之以雷霆, 潤之以風雨, 日月運行, 一寒一暑, 乾道成男, 坤道成女. 乾知大始, 坤作成物. 乾以易知, 坤以簡能.
- ↑ 『中庸章句』12章, 君子之道費而隱。夫婦之愚,可以與知焉,及其至也,雖聖人亦有所不知焉;夫婦之不肖,可以能行焉,及其至也,雖聖人亦有所不能焉。天地之大也,人猶有所憾,故君子語大,天下莫能載焉;語小,天下莫能破焉。《詩》云:『鳶飛戾天,魚躍于淵。』言其上下察也。君子之道,造端乎夫婦,及其至也,察乎天地。」
- ↑ 『周易』 「復卦·彖傳」, 復亨: 剛反, 動而以順行, 是以出入无疾, 朋來无咎. 反復其道, 七日來復, 天行也. 利有攸往, 剛長也. 復其見天地之心乎?
- ↑ 『周易』 「乾卦·文言」, 夫大人者, 與天地合其德; 與日月合其明; 與四時合其序; 與鬼神合其吉凶. 先天而天弗違, 後天而奉天時. 天且弗違, 而況於人乎? 況於鬼神乎?
- ↑ 『周易』 「乾卦·文言」, 夫大人者, 與天地合其德; 與日月合其明; 與四時合其序; 與鬼神合其吉凶. 先天而天弗違, 後天而奉天時. 天且弗違, 而況於人乎? 況於鬼神乎?
- ↑ 『周易』 「乾卦·文言」, 夫大人者, 與天地合其德; 與日月合其明; 與四時合其序; 與鬼神合其吉凶. 先天而天弗違, 後天而奉天時. 天且弗違, 而況於人乎? 況於鬼神乎? ; 『朱子語類』94卷, 問:「『聖人定之以中正仁義而主靜』,是聖人自定?是定天下之人?」曰:「此承上章『惟人也得其秀而最靈』言之,形生神發,五性感動而善惡分,故『定之以中正仁義而主靜』,以立人極。」又問:「此恐非中人以下所可承當。」曰:「二程教學者,所以只說一箇『敬』字,正是欲無智愚賢不肖皆得力耳。」문: ‘성인은 中正仁義로 안정시킨다.’는 이 말은 성인이 스스로 안정된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천하의 사람들을 안정시킨다는 말입니까?답: 이는 윗 문장의 ‘오직 사람만이 빼어난 것을 얻어서 가장 영명하다.’를 이어서 말한 것이니 형체가 생겨나고 신이 발현되고 오성이 외물에 감하여 움직이면 선악이 나뉘게 된다. 그러므로 ‘中正仁義로 안정시키되 靜을 위주로 해서 인극을 세운다.’고 하였다. 문: 이는 아마도 중인이하의 사람들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 답: 정자께서 사람을 가르칠 때 단지 하나의 ‘경(敬)’을 말씀 하셨으니 바로 지혜로운 사람이나 우매한 사람이나 현명한 사람이나 불초한 사람을 가릴 것 없이 모두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 ↑ 『朱子語類』94卷, 問:「『聖人定之以中正仁義』,何不曰仁義中正?」曰:「此亦是且恁地說。當初某看時,也疑此。只要去強說,又說不得。後來子細看,乃知中正即是禮智,無可疑者。」문: ‘성인은 中正仁義로 안정시킨다.’에서 왜 仁義中正이라고 말하지 않은 것입니까?답: 이 역시 우선 이렇게 말해야 한다. 당초에 내가 봤을 때도 이렇게 의심했었다. 억지로 말하려 해도 말을 할 수 없었는데, 나중에 자세하게 살펴보니 中正이란 바로 禮智임을 알게 되니 의심할 것이 없다. ; 『朱子語類』94卷, 問「聖人定之以中正仁義」。曰:「本無先後。此四字配金木水火而言,中有禮底道理,正有智底道理。如乾之元亨利貞,元即仁,亨即中,利即義,貞即正,皆是此理。至於主靜,是以正與義為體,中與仁為用。聖人只是主靜,自有動底道理。譬如人說話,也須是先沉默,然後可以說話。蓋沉默中便有箇言語底意思。」‘성인은 中正仁義로 안정시킨다.’를 물었다.답: 본래는 선후가 없다. 이 네 가지를 金木水火와 짝지어 말한 것이니 中에는 禮의 도리가 있고, 正에는 智의 도리가 있다. 이는 乾의 元亨利貞에서 元은 仁, 亨은 中, 利는 義, 貞은 正인 것과 같아 모두 이 이치이다. 主靜에 대해선 正과 義는 체가 되고 中과 仁은 용이 된다. 성인께서는 단지 靜을 주로 하시지만 자연히 그 안에 動의 도리가 있으니, 예를 들어 사람이 말을 할 때에도 먼저 조용히 침묵한 연후에 말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침묵하는 중에 言語의 意思가 있는 것이다.
- ↑ 『二程遺書』11-135, 陽也, 不動則不剛, “其靜也專,(專一) 其動也直.(直遂)”, 不專一則不能直遂. 坤, 陰也, 不靜則不柔, “其靜也翕,(翕聚) 其動也闢.(發散)”, 不翕聚則不能發散.
- ↑ 『朱子語類』94卷, 濂溪言‘主靜’, ‘靜’字只好作‘敬’字看, 故又言‘無欲故靜’. 若以爲虛靜, 則恐入釋老去.염계가 ‘주정(主靜)’을 말한 것에 대하여 ‘정(靜)’이란 말은 다만 ‘경(敬)’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래서 또 “아무런 사욕이 없기 때문에 고요하다.”고 말했다. 만약에 [염계의 말을] 허정(虛靜)으로 여긴다면 아마도 불교나 도가에 빠져버리고 말 것이다.
- ↑ 『周易』 「繫辭上」1章, 易簡, 而天下之理得矣, 天下之理得, 而成位乎其中矣. 【朱註】成位, 謂成人之位. 其中, 謂天地之中. 至此則體道之極功, 聖人之能事, 可以與天地參矣.
- ↑ 『二程遺書』11-135, 陽也, 不動則不剛, “其靜也專,(專一) 其動也直.(直遂)”, 不專一則不能直遂. 坤, 陰也, 不靜則不柔, “其靜也翕,(翕聚) 其動也闢.(發散)”, 不翕聚則不能發散.
- ↑ 『通書』 「聖學第二十」, 聖可學乎? 曰: 可. 有要乎? 曰: 有. 請聞焉. 曰: 一爲要. 一者無欲也. 無欲則靜虛動直. 靜虛則明, 明則通; 動直則公, 公則溥. 明通公溥庶矣乎!
- ↑ 『周易』 「說卦」, 昔者聖人之作《易》也, 將以順性命之理, 是以立天之道曰陰與陽, 立地之道曰柔與剛, 立人之道曰仁與義. 兼三才而兩之, 故《易》六畫而成卦. 分陰分陽, 迭用柔剛, 故《易》六位而成章.
- ↑ 『周易』 「繫辭上」4章, 仰以觀於天文, 俯以察於地理, 是故知幽明之故. 原始反終, 故知死生之說. 精氣為物, 游魂為變, 是故知鬼神之情狀. 【朱註】此窮理之事. 以者, 聖人以易之書也. 易者, 陰陽而已. 幽明·死生·鬼神, 皆陰陽之變, 天地之道也. 天文, 則有晝夜上下. 地理, 則有南北高深. 原者, 推之於前. 反者, 要之於後. 陰精陽氣, 聚而成物, 神之伸也. 魂游魄降, 散而為變, 鬼之歸也.
- ↑ 『周易』 「繫辭下」10章, 易之為書也, 廣大悉備. 有天道焉, 有人道焉, 有地道焉. 兼三才而兩之, 故六. 六者, 非它也, 三才之道也.
- ↑ 진래, 『주희의 철학』, 79-80쪽, “리 혹은 태극의 동정 문제가 복잡하게 된 이유는 첫째, 주희와 주돈이의 태극에 대한 규정이 달랐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로 말미암아 『태극도설』의 사상 자료를 인용할 때도 부득이하게 복잡한 설명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둘째는 주희가 광의의 개념으로 ‘동’과 ‘정’을 사용했기 때문에 동정 형식에 있어서의 범주 사용이 주돈이에 비해 훨씬 확대되어 버렸다는 점이다.이 외에도, 동일한 형식의 명제 하에서 항상 다른 문제를 토론하였던 주희 철학의 문제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형식상 상반되는 명제는 토론한 문제가 내용상 다른 데서 나온 것일 뿐 모순을 유발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이러하다. 먼저 ‘사람과 말’의 비유에 근거하여 말하자면, 기가 움직이면 리가 움직이고 리가 기 위에 올라타고 있어서 동하고 정함이 있는 것이니 ‘기에 동정이 있기 때문에 리에 동정이 있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기의 동정에 근거하여 말하자면, 동의 리가 있어 움직여 양을 낳을 수 있고 정의 리가 있어 고요해 음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이 되니 이 경우에는 반드시 ‘리에 동정이 있기 때문에 기에 동정이 있는 것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두 문장에서 ‘리에 동정이 있다.’고 말한 의미는 같지 않다. 그러므로 ‘기에 동정이 있기 때문에 리에 동정이 있는 것이다.’라는 것과 ‘리에 동정이 있기 때문에 기에 동정이 있는 것이다.’라는 것이 서로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 미발 이발의 측면에서 보면 태극에 동정이 있다고 말할 수 있고, 인의중정(仁義中正)으로 나누어 보면 또한 리에 동정이 있다고 할 수 있으며, 타고 싣는 움직임의 측면에서 보아도 역시 리에 동정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도 ‘리는 동정으로 말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리 혹은 태극은 형이상의 것으로서 그 스스로는 운동하지 못하므로 ‘태극은 단지 리일 뿐이며 리는 동정을 가지고 말할 수 없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각각 특정한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두 가지 표현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니, 구체적인 의미에서 보면 ‘리는 동정을 가지고 말할 수 없다.’는 것과 ‘리는 동정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 ↑ 『朱子語類』 권5 「性理二」 曰: “‘繼之者善, 成之者性’這箇理在天地間時, 只是善, 無有不善者. 生物得來, 方始名曰性. ” (말씀하셨다: “‘繼之者善, 成之者性’에서, 이 理가 천지간에 있을 때에는 그저 선할 뿐 선하지 않은 것이 없고, 物을 낳고 나서야 비로소 性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책, 권74 「易十」 ‘一陰一陽之謂道’, 太極也. ‘繼之者善’, 生生不已之意, 屬陽; ‘ 成之者性’, ‘各正性命’之意, 屬陰. ; 같은 책, 권94 「周子之書」 問「誠上」篇舉『易』‘一陰一陽之謂道’三句. 曰: “繼成二字, 皆節那氣底意思說; 性善二字, 皆只說理. 但‘繼之者善’方是天理流行處, ‘成之者性’便是已成形, 有分段了.” (『통서』 「誠上」편에서 『易』의 ‘一陰一陽之謂道’ 세 구절을 거론한 것에 대해 물었다. 말씀하셨다: “繼·成 두 글자는 모두 저 氣의 의미를 잘라내 말한 것이고, 性·善 두 글자는 모두 그저 理만 말한 것이다. 그러나 ‘繼之者善’은 막 天理가 流行하는 바이고, ‘成之者性’은 이미 형체를 이뤄 구분이 있는 것이다.)
- ↑ 혹은 ‘器에는 道가 없을 수 없고, 道에도 역시 器가 없을 수 없다.’
- ↑ 『二程全書』 권1 「遺書·二先生語一」 形而上爲道, 形而下爲器, 須著如此說. 器亦道, 道亦器.
- ↑ 『周易』 「文言·乾」 元者, 善之長也; 亨者, 嘉之會也; 利者, 義之和也; 貞者, 事之幹也.
- ↑ 『朱子語類』 권94 「周子之書」 ‘中正仁義’一節, 仁義自分體用, 是一般說; 仁義中正分體用, 又是一般說. 偏言專言者, 只說仁, 便是體; 才說義, 便是就仁中分出一箇道理. 如人家有兄弟, 只說戶頭上, 言兄足矣; 才說弟, 便更別有一人. 仁義中正只屬五行, 為其配元亨利貞也. 元是亨之始, 亨是元之盡; 利是貞之始, 貞是利之盡. 故曰: ‘元亨, 誠之通; 利貞, 誠之復.’ (‘中正仁義’ 한 단락에서 仁義가 체용으로 나뉘는 것이 한 가지 이야기이고, 仁義中正이 체용으로 나뉘는 것이 또 한 가지 이야기이다. ‘부분으로서 말하고(偏言)’ ‘단독으로 말하는(專言)’ 것의 경우, 仁만 말하면 곧 體지만, 義를 말하자마자 仁 속에서 한 도리가 나뉘어 나온다. 예를 들어, 가정에 형제가 있을 때 호주에 대해서만 말한다면 형만 말해도 충분하지만, 아우를 말하자마자 다른 한 명이 있는 것이다. 仁義中正은 다만 五行에 속하니, 그것이 元亨利貞에 대응되기 때문이다. 元은 亨의 시작이요, 亨은 元의 완성이며, 利는 貞의 시작이요, 貞은 利의 완성이다. 그러므로 [濂溪 선생께서] ‘元亨은 誠之通이요, 利貞은 誠之復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 ↑ 『周易略例』 「明彖」 統之有宗, 會之有元. 故繁而不亂,眾而不惑。【注】 統領之以宗主, 會合之以元首.統之有宗主, 雖繁而不亂; 會之以元首, 雖衆而不惑.
- ↑ 【漢語大詞典】 23. 副詞. 空, 徒然.
- ↑ 『程氏易傳』 「序」 至微者, 理也; 至著者, 象也. 體用一源, 顯微无間. 觀會通, 以行其典禮, 則辭无所不備.
- ↑ 『二程全書』 권16 「遺書·伊川先生語第一」 沖漠無朕, 萬象森然已具.
- ↑ 『程氏易傳』 「彖傳·乾」 四德之元, 猶五常之仁, 偏言則一事, 專言則包四者.
- ↑ 【漢語大詞典】 2. 指詩文剛勁凝練.
- ↑ 【漢語大詞典】 2. 混合而成.
- ↑ 『二程全書』 권22 「遺書·伊川先生語第七上」 張閎中以書問『易傳』不傳, 及曰: ‘『易』之義本起於數.’ 程子答曰: “『易傳』未傳, 自量精力未衰, 尙冀有少進爾. 然亦不必直待身後, 覺老耄則傳矣. 書雖未出, 學未嘗不傳也. 第患無受之者爾.” (장굉중이 편지를 보내 [이천 선생이] 『역전』을 전하지 않는 것에 대해 묻다가, ‘『역』의 뜻은 본래 數에서 나온다’고 주장했다. 정자께서 답하셨다: “『역전』을 아직 전하지 않는 건 스스로 생각해보건대 정력이 아직 쇠하지 않았기에 조금이라도 더 발전시키기를 바라기 때문이지만, 역시 꼭 죽을 때까지 기다리려는 것은 아니고, 늙었다고 생각되면 전해줄 것이네. 책은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가르침은 전해주지 않은 적이 없네. 다만 전수받을 수 있는 자가 없음만 근심할 뿐이네.”)
- ↑ 『二程全書』 권2 「遺書·二先生語第二上」 横渠敎人, 本只是謂世學膠固, 故說一箇淸虛一大, 只圖得人稍(消)損得沒去就道理來. 然而人又更別處走. 今日且只道敬. (횡거가 사람들을 가르침에, 본래 그저 세상의 학문이 膠固하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淸虛一大를 말하여 다만 사람들이 조금 덜어 도리로 나아가도록 도모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다시 엉뚱한 곳으로 달려갔다. 이제 그저 경을 말하면 된다.) ; 【漢語大詞典】 沒 [me] 同“麼”. 2. 指示代詞. 相當於這麼、那麼.
- ↑ 『論語』 「述而」 子所雅言, 『詩』、『書』、執禮, 皆雅言也. 【集注】 雅, 常也; 執, 守也.
- ↑ 韓愈, 『昌黎先生集』 권11. 《對禹問》 或問曰: “堯舜傳諸賢, 禹傳諸子, 信乎?” 曰: “然.” “然則禹之賢, 不及於堯與舜也歟?” 曰: “不然. 堯舜之傳賢也, 欲天下之得其所也; 禹之傳子也, 憂後世爭之之亂也. 堯舜之利民也大, 禹之慮民也深.”
- ↑ 『朱子大全』 권31 《答張敬夫(壬辰冬)》 《太極圖》立象盡意, 剖析幽微, 周子蓋不得已而作也. 觀其手授之意, 蓋以爲唯程子爲能受之; 程子之祕而不示, 疑亦未有能受之者爾. 夫旣未能黙識於言意之表, 則道聽塗說, 其弊必有甚焉. (近年已覺頗有此弊矣.) 觀其答張閎中書云: ‘書雖未出, 學未嘗不傳, 第患無受之’者, 及『東見錄』中論‘橫渠淸虛一大之說, 使人向別處走, 不若且只道敬.’則其微意亦可見矣. 若《西銘》則推人以知天, 卽近以明遠, 於學者之用爲尤切, 非若此書詳於天而略於人, 有不可以驟而語者也. 孔子雅言『詩』、『書』執禮 而於『易』則鮮及焉, 其意亦猶此耳. 韓子曰: ‘堯舜之利民也大, 禹之慮民也深.’ 其周子、程子之謂乎! 熹向所謂微意者如此. 不識高明以爲如何? (《태극도》에서 도상을 세워 만들어 의미를 모두 표현하여 깊이 감춰진 것을 파헤쳐 밝힌 것은 周子께서 부득이하여 하신 것입니다. 周子께서 몸소 전수해주신 뜻을 살펴보면, 아마 오직 정자만이 그것을 전수받을 수 있다고 여기신 것 같고, 정자께서 그것을 감춰두고 남에게 보이지 않은 것은 아마도 또한 그것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인 것 같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말과 뜻을 묵묵히 알아차리지 못하면, 道聽塗說하여 반드시 심한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근래에 이미 이러한 폐단이 많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천 선생께서] 장굉중에게 답한 편지에서, “비록 『역전』을 출판하지는 않았지만, [제자들에게 『역』의] 가르침을 전하지 않은 적이 없다. 다만 그것을 전수받을만한 사람이 없음을 근심할 뿐”이라고 하신 것과, 또 『동견록』에서 “장횡거의 淸虛一大설은 사람들을 엉뚱한 방향으로 내달리게 하니, 일단 敬을 말하는 것만 못하다”고 하신 것을 보면, 그 숨겨진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서명》의 경우 사람에서 미루어 하늘을 알고, 가까운 것에 나아가 먼 것을 밝히니 학자의 실천에 매우 절실하니, 이 글이 하늘에 대해서는 상세하지만 사람에 대해서는 간략해 갑자기 말해선 안 되는 점이 있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공자께서는 『시』·『서』와 예를 지키는 것을 항상 말씀하셨지만 『역』에 대해서는 드물게 언급하셨으니, 그 뜻 또한 이와 같을 뿐입니다. 한유는 “요임금과 순임금은 백성을 크게 이롭게 하셨고, 우임금은 백성을 깊이 걱정하셨다”고 하였는데, 바로 周子와 程子를 가리킨 것일 것입니다! 제가 앞서 말한 ‘숨겨진 의도’라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