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주
인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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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명 | 윤형주 |
성별 | 남 |
출생일 | 1947년 11월 19일 |
출생지 | 서울특별시 |
사망일 | |
사망지 | |
국적 | 대한민국 |
학력 | 경기고등학교
경희대 의과대학 중퇴 |
직업 | 가수, 싱어송라이터 |
활동기간 | 1967년 데뷔 (트윈폴리오) |
소속 | |
종교 | 개신교 |
가족사항 | 배우자, 자녀 1남 2녀
윤영춘(아버지), 윤정주(아우) 6촌 형: 윤동주(시인) |
목차
정의
대한민국의 포크, CCM 가수
내용
인물정보
- 마성의 포크 뮤지션.[1]
- 세시봉의 초기멤버, 1967년 송창식과 트윈폴리오를 결성하여 활동한다
- 시인 윤동주와 6촌지간이다. 윤동주의 시를 노랫말로 하여 노래를 붙이려고 하였으나, 윤형주의 아버지가 "시도 이미 그 자체로 노래"라며 말렸다고한다.[2]
- 경기고등학교 출신으로 김민기와 선후배관계이다.
- 남녀노소에게 사랑받는 대중적인 음악을 작곡하는 능력이 있다. [3] 대표적으로 "조개 껍질묶어"[4]라는 곡이 있는데, 이는 경포대에서 지나가는 여학생들을 꼬시기(?) 위해 몇분만에 즉석으로 만든 곡이라고.
- 대한민국의 국민 CM송은 다 윤형주를 거쳤대도 과언이 아니다.
- 윤형주의 CM송에 대해 더 알아보려면 클릭
- 공부도 곧잘 했고 글재주도 좋았고[5], 음악은 물론 사업수완도 좋아 세시봉 활동을 끝내고 사업을 계속해서 했다.
- 유복한 집안환경, 미성, 잘생긴 외모, 좋은 학벌 등으로 세시봉에서 여자팬이 가장 많았다고.[6]
음반
- M.net 윤형주 음반 검색 결과 중 '정규'앨범 기준
생애 및 활동
서울에서 시인 아버지와 성악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학교수이자 유학생. 유복한 고학력자 가정이었다. 부모님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글을 쓰고 음악을 듣는 것에 익숙했다. 공부에도 소질이 있었고, 시와 운율에도 조예가 깊어,학창 시절부터 다수의 글짓기 대회에서 수상을 하였다. 윤동주 시인의 뜻을 이어 집안에서는 연세대학교에 입학하길 바랐으나, 본인은 아버지의 뜻과는 반대로 서울대학교에 입학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부모님의 설득 끝에 연세대학교 의예과에 지원,1966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1968년 경희대학교 의과대학으로 전학하였으나 1971년 중퇴하였다.
1968년 송창식과 함께 남성 듀엣 트윈폴리오를 결성하여 가요계에 데뷔했다. 〈하얀 손수건〉, 〈축제의 노래〉, 〈웨딩 케익〉, 〈슬픈 운명〉등을 발표했다. 1970년부터는 솔로로 전향, "비와 나", "라라라(조개껍질 묶어)", "비의 나그네", "두개의 작은 별", "우리들의 이야기", "바보(짦다란 사연 하나)", "고백", "사랑스런 그대", "어제 내린 비" 등을 불렀으며 1971년에는 동아방송 라디오 심야 프로인 '0시의 다이얼'과 '톱 툰 쇼'에서 MC를 맡기도 하였다. 다시 1973년엔 동아방송 '팝스 투나잇' MC를 맡았으며 1976년과 1978년엔 광고회사 '서울 오디오'와 '샘 기획'을 설립하여 운영하기도 했다. 1981년부터 그는 MBC-FM에서 '윤형주의 한밤의 데이트'의 MC를 맡았으며 기독교 방송의 환자와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프로인 '찬양의 꽃다발'과 극동방송에서 '윤형주와 함께'의 MC를 지냈다. [7]
에피소드
- 윤형주는 고등학교 시절 성가대였는데, 같은 교회 베이스 파트의 선배 조영남이 부르는 cotton fields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 후로 통기타를 한번 만져보겠다며 조영남을 졸졸 따라다녔고, 대학 입학과 동시에 아버지를 졸라 기타를 샀다. 이것이 그의 음악 생활의 시작이었다. [8]
- 잘 다니던 연대 의대를 정리하고 경희대로 전입하게 된 것은 아버지가 당시 경희대 교수로 재직중이었기 때문.[9]
- 아버지의 반대에 의해 트윈폴리오를 은퇴하고 다시 의대로 가 공부를 했으나, 결국엔 그만두고 다시 음악의 길로 돌아왔다. 다만 가수가 아닌 작곡가로[10]
- CM송의 귀재였던 윤형주, 당시 경쟁사였던 해태껌과 롯데껌 두 회사에게 모두 CM송을 만들어 주었다. 결국엔 롯데껌이 매출 우위에 섰다.[11]
- 술자리에서 줄곧 부르는 "OO를 못하면 시집을 못가요~ 아~ 미운사람~"은 윤형주의 노래 '미운사람'에서 따온 것 (^^)[12]
- 1971년 윤형주는 '0시의 다이얼'이라는 이름의 라디오방송을 진행했는데[13], 그 방송에 긴급회의가 벌어지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유는 한 엽서 때문. 엽서의 내용은 단 한문장이었다. '아버님 당선을 축하 드립니다.' 그 무렵 치러진 선거는 대통령 선거뿐이었다.보낸 이는 '세종로 1번지 박지만',신청곡은 바비 셔먼의 '리틀 우먼(little woman)'이었다.틀어도, 틀지 않아도 문제였던 상황. 결국 동아방송 측은 청와대 출입기자에게 진위 여부 파악을 부탁했다.실제로 14세의 박지만이 보낸 사연이었고, 결국 방송국에서는 아무런 첨언도 하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 사연만 읽어 보낸다. 얼마 후 청와대 관계자들과 박지만이 방송국으로 찾아와 감사를 표했다고.[14] 이후로 박지만과 윤형주는 종종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고 한다.
- 이외의 에피소드는 여기를 참조
멀티미디어
이미지
동영상
네트워크 그래프
참고문헌
이미지 출처
인물정보사진
1집 윤형주
네가 하라면 뭐든지 다 할거야/고백
I'll be home for christmas
The best of 윤형주/둘 다섯
윤형주 스테레오 앨범 제 2집
기여
주석
- ↑ 엠넷 레전드 아티스트 100 소개문구
- ↑ 토크쇼 놀러와에서 언급한 내용
- ↑ 이러한 음악적인 견해가 송창식과는 달라 종종 부딪히기도
- ↑ 내 6살, 4살 먹은 조카도 이 노래를 알고 정말 좋아한다. 킬링파트는 "라라라라라라~"
- ↑ 조선일보에 세시봉이야기를 칼럼으로 연재하기도 했다.
- ↑ 윤형주 나무위키
- ↑ 윤형주 위키백과
- ↑ rainysunshine tistory 블로그
- ↑ 윤형주 나무위키
- ↑ 인물 소개에 언급한 조개껍질묶어, CM송 등
- ↑ 윤형주 나무위키
- ↑ 윤형주 나무위키
- ↑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가수가 DJ를 맡은 것은 윤형주가 최초였다
-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7/11/2011071100114.html 윤형주 칼럼, 세시봉, 우리들의 이야기 #1 '아버님 당선 축하'―세종로 1번지 박지만 … 1971년, 신청곡 엽서에 방송국이 뒤집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