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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신앙의 역사는 고대의 무속 제전까지 소급될 수 있다. 부여의 [[영고(迎鼓)]]·고구려의 [[동맹(東盟)]]·예의 [[무천(儛天)]] 등과 같은 고대의 [[제천의식]]이나 [[단군제(檀君祭)]]·[[동명제(東明祭)]]·[[혁거세제(赫居世祭)]]와 같은 [[국조제(國祖祭)]]는 모두 고대의 무속 제전으로 볼 수 있다. <ref> [http://folkency.nfm.go.kr/kr/topic/detail/5349 [한국민속대백과사전] '무속신화']</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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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도 삼국시대 때 제정일치 사회가 지속 되었고, 조신시대에도 궁중 무녀가 존재 한 것을 보아 한국의 무속신앙은 사라진 적이 없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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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무속신앙은 한국과 뗄 수 없는 가치 중 하나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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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12일 (수) 04:58 판

제작 의도

한국 뿐 아니라 아시아 국가라면 어느정도 무속신앙은 모두 갖고 있다. 서양이라고 해도 다를 것은 없다. 영혼을 믿고 영혼이 화내면 달래주는 모든 모습이 무속신앙의 한 모습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어디에도 있으나 어디에도 없기도 한 무속신앙이 한국에서는 어떤 양상을 띄고 있는지 알아 보기 위해 제작 되었다.

의미

한국에서는 한국의 전통적인 샤머니즘무속(巫俗), 무교(巫敎),무(巫)라고 하는데, 이들은 고유의 관점이 존재하는 말들이다. 무속은 불교학자 이능화가 샤머니즘을 전통적인 관습으로 이해하여 처음 사용한 말이며, 지금은 국문학자들과 민속학자들이 즐겨 사용하고 있다. 무교는 개신교 신학자 유동식이 처음 사용한 단어이며, 샤머니즘기독교, 불교, 이슬람처럼 독립된 종교로 존중하는 중립적 입장의 종교학자들이 사용한다. 무(巫)는 인류학자 조흥윤이 사용한 말이며, 한국의 샤머니즘을 독특한 개성을 가진 전통으로 존중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1]

관련된 것

설화

처용설화

처용은 한국 민간 전승과 무속 신앙에서 신의 하나이다.

유명한 처용 설화는, 처용이 외부에 출타중인 사이 역신(疫神: 질병을 전파하는 신)이 처용인 척 처용의 처를 속여 처용의 아내와 동침하였다. 처용은 이를 발견하였으나 분노하지 않고 향가인〈처용가〉를 노래 부르며 춤을 추었다. 이에 그의 인품에 감격한 역신은 처용이 있는 곳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겠다는 약조를 하고 사라진다고 한다.

때문에 고려시대 이후 새해 초나 질병이 돌 때 문 앞에 처용의 얼굴을 한 그림을 그려서 붙이면 질병이 전파되지 않는다 믿었다.

지장본풀이

천하거부인 남산과 여산 부부는 나이 많도록 자식이 없어 절에다 많은 시주를 하고 원불수륙을 드린 후 예쁜 딸을 낳아 지장이라 이름 짓는다. 지장아기씨가 네 살 되던 때부터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등이 해마다 한 명씩 죽어 마침내는 고아가 되어 외삼촌 집에 얹혀살면서, 개가 먹던 접시를 들고 동네를 다니며 구걸하는 등 온갖 천대와 박대를 당한다. 그렇지만 하늘의 부엉새가 날개를 펼쳐 덮어 주는 등 천우신조가 있어 어려움을 이겨낸다. 이러한 학대와 가난 속에서도 착하고 아름답다는 소문이 자자하게 퍼져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시집을 간다. 곧 아들을 낳았으므로 시아버지는 온갖 재산을 다 물려준다. 그러나 이듬해부터 시할아버지, 시할머니,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해마다 연이어 죽고 드디어는 남편과 자식까지 죽는다. 혼자가 된 지장아기씨는 시누이 집에 가서 살고자 하였으나 시누이가 온갖 욕을 하며 박대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그 집을 나온다. 길에서 한 대사를 만나 사주팔자를 봐 달라고 하니, 대사는 그녀에게 초분과 말분이 좋다고 하며 서러운 가족을 위해 새남굿을 하라고 알려 준다.

지장아기씨는 나무를 베어 집을 짓고, 뽕나무 씨와 누에씨를 얻어 와 명주를 짠 뒤에 이것으로 굿에 쓸 신맞이용 다리와 무기구의 끈, 그리고 재미(齋米)를 걷으러 다닐 때 사용할 자루를 만든다. 그리고는 머리를 깎은 뒤 송낙을 쓰고 장삼 차림으로 목탁을 들고 자루를 둘러메고 사방으로 다니며 시주를 받는다. 시주받은 백미를 방아에 넣고 찧은 뒤 시루에 쪄서 떡을 만들어, 마침내 자기 때문에 죽어간 서러운 가족을 위해 새남굿을 벌인다. 굿을 끝내고 죽은 영혼이 저승에서 무엇이 되었나를 점치니 가족이 모두 새[鳥]로 환생하였다고 나온다. 지장아기씨도 좋은 일을 하였기에 죽어 새의 몸으로 환생한다.[2]

역사

무속신앙의 역사는 고대의 무속 제전까지 소급될 수 있다. 부여의 영고(迎鼓)·고구려의 동맹(東盟)·예의 무천(儛天) 등과 같은 고대의 제천의식이나 단군제(檀君祭)·동명제(東明祭)·혁거세제(赫居世祭)와 같은 국조제(國祖祭)는 모두 고대의 무속 제전으로 볼 수 있다. [3]

이후에도 삼국시대 때 제정일치 사회가 지속 되었고, 조신시대에도 궁중 무녀가 존재 한 것을 보아 한국의 무속신앙은 사라진 적이 없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무속신앙은 한국과 뗄 수 없는 가치 중 하나라 생각된다.

멀티미디어

  • '한국민속문화의 뿌리 무(巫)' [4]

주석

  1. 《프리칭아카데미》2008년 4월호, 한국 교회와 샤머니즘: 이해와 오해 사이에서, 이길용, 프리칭아카데미.
  2.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지장본풀이']
  3. [한국민속대백과사전 '무속신화']
  4. "뿌리 무(巫) / YTN 사이언스'", youtube, 게시일 15.0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