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이 지은 김상용(金尙容) 순의비기(殉義碑記) 原文"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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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嗚呼! 此爲江華府南門 故 右議政 文忠公 仙源 金先生 殉節之地也. 先生 諱尙容, 安東人. | “嗚呼! 此爲江華府南門 故 右議政 文忠公 仙源 金先生 殉節之地也. 先生 諱尙容, 安東人. | ||
− | 萬曆 十八年 庚寅 登第 歷事累朝 位宰相 以忠厚正直爲士類所宗. | + | 萬曆 十八年 庚寅 登第 歷事累朝 位宰相 以忠厚正直爲士類所宗. '''崇'''禎丙子 此虜入寇, '''上'''( )幸江都. 先生時也 去相且老病, '''命'''從廟社主先行. 於是張紳 爲本府留守, 而檢察使 金慶徵 副使 李敏求 受命任軍事矣. 旣而 '''大'''駕迫虜先鋒 倉卒入南漢城 賊築長圍 守之內外不通 諸道勤王所至者 輒皆潰. 賊又分兵 窺江都 紳慶徵 等 恃有天()險 不以爲意 慶徵 ( )人, 有以軍事諫者 輒盛() 逆折. |
2019년 5월 3일 (금) 12:27 판
원문
○ 農巖金昌協撰殉義碑記曰 :
“嗚呼! 此爲江華府南門 故 右議政 文忠公 仙源 金先生 殉節之地也. 先生 諱尙容, 安東人.
萬曆 十八年 庚寅 登第 歷事累朝 位宰相 以忠厚正直爲士類所宗. 崇禎丙子 此虜入寇, 上( )幸江都. 先生時也 去相且老病, 命從廟社主先行. 於是張紳 爲本府留守, 而檢察使 金慶徵 副使 李敏求 受命任軍事矣. 旣而 大駕迫虜先鋒 倉卒入南漢城 賊築長圍 守之內外不通 諸道勤王所至者 輒皆潰. 賊又分兵 窺江都 紳慶徵 等 恃有天()險 不以爲意 慶徵 ( )人, 有以軍事諫者 輒盛() 逆折.
先生奮而曰 ʻ 行在受圍日久, 鄭世規敗道路, 傳言已死, 湖西無主爭者. 副使宜急往(收?)散卒糾義旅兵督湖西, 南兵在後者 以赴 君父之急 不可緩 又言南漢消息斷絶 (宣亘??)亟 (?)死士起居官, 守十往必有一達, 臣子之義 豈忍束手坐觀?ʼ, 慶徵相與詆之曰 ʻ自有權此者 非避亂大臣所得與.ʼ 一無所聽施.
或謂先生, 事去矣, 盍具舟備緩急?ʼ, 先生嘆曰 ʻ 主上在圍 安危不可知, 宗社元孫皆在此, 萬一不幸有死而已. 安所偸生.ʼ 居數日有報 賊大至, 紳慶徵等猶不信曰 ʻ唉 怯夫! 江水流()賊安能飛渡?ʼ 詰朝 賊禺( )甲串渡江 我兵望之 不戰自潰, 慶徵等一時奪舸遁去. 賊遂平行至城下.
선생께서는 집안사람들과 결별하고 성의 문루에 올라 염초를 쌓아놓고 그 위에 올라앉아서 옷을 벗어 하인에게 주고는 손을 저어 좌우를 물리치고 불을 붙여 자폭하였다. 손자 수전(壽全)은 당시 나이 13세로 곁에 있었다. 선생께서 노복을 시켜 손자를 데려가라고 하였으나, 손자는 선생의 옷을 붙들고 울면서 말하기를 ʻ할아버지를 따라 죽어야지 어디로 가겠습니까?ʼ하니, 노복도 가지 않고 함께 죽었다.
별좌 권순장(權順長)과 진사 김익겸(金益兼)은 동지들과 먼저 약속하여 부하들을 성문으로 나누어 보내, 관군을 도와 성을 사수하기로 계획을 세웠다가 이에 이르러 마침내 선생과 함께 죽으니 실로 정축년(1637, 인조 15) 정월 22일이었다. 대저 이미 선생께서 죽으니 국가에서는 충신의 문으로 정려(旌閭)하고, 또 강화부성의 남쪽 7리 되는 곳에 사우(祠宇)를 짓고 ʻ충렬사(忠烈祠)ʼ라 사액하여 권공(權公), 김공(金公) 및 이상길(李尙吉) 이하 열 한 사람을 모두 배향하게 하였으니, 숭보하는 은전이 갖추어졌다하겠다.
금상(숙종) 24년 무인년(1698)에 백씨(伯氏)께서 왕명을 받들어 본부의 유수가 되어 현지에 이르자, 먼저 사당에 배알하고 다시 남문에 올라 크게 한숨을 지으면서 ʻ위공자(魏公子)의 선비 후대한 일을 갖고도 대량(大梁)의 동문에다 글을 적은 사람이 있었고, 사마천은 이 일을 사기(史記)에 쓰기까지 하였는데 하물며 선생의 충절은 혁혁하여 백세토록 인륜 기강으로 신뢰하는 바이니, 이 일이 기록이 없을 수 있는가?ʼ하고는 이에 돌을 다듬어 비를 만들어 전액(篆額)으로 크게 써서 남문 가에 세우고는 나 창협(昌協)으로 하여금 그 본말을 적도록 하였다.
창협이 조용히 생각건대, 충의가 사람들에게 감동시킴이 깊다. 정축년(1637)에서 지금까지는 60여년이요, 당시의 노인들은 다 가고 없건만, 사람들은 아직도 이 남문을 기리면서 아무개가 이곳에서 죽었노라 하고는 왕왕 그 때의 일을 어제의 일처럼 이야기들을 한다. 그리고 사대부로서 오다가다 이 고을을 찾는 자도 반드시 남문이 어디있느냐고 먼저 묻고는 흐느끼면서 감탄하며 떠날 줄을 모른다. 이로 보아 말한다면 비록 비석이 없어도 역시 좋은 일이겠으나, 유적을 포지 게시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갑절이나 더 많이 살펴보도록 하여 백세 뒤에라도 선생의 충절을 잊지 않게 할 수 있다면 비석이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지난날의 정부를 돌아보면, 이런 데에 마음을 쓰지 못했음이, 어쩌면 국가 장해의 보호를 급히 여기기에 겨를이 없었던 것인가? 그러나 절의의 장사가 국가에서는 국방을 위한 성곽이나 무기보다 더함을 안다면 오늘 이 일이 급한 일이 아니라고 그 누가 말하겠는가? 백씨의 이름은 김창집(金昌集)이니 선생의 아우 문정공 청음선생 김상헌(金尙憲)의 증손이다. 그래서 후인들이 이 일이 혹 사사로운 처사였다고 의아해 한다면, 이는 대공의 도를 아는 사람이 아니다.”
번역
○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이 순의비기(殉義碑記)를 지었다. 그 기문은 다음과 같다.
“오호라! 여기는 강화부성 남문으로 고 우의정 문충공 선원 김선생께서 순의하신 곳이다. 선생의 휘는 상용(尙容)이니, 안동인이다.
만력 18년 경인년(1590, 선조 23)에 급제하여 여러 조정을 섬기면서 벼슬은 재상의 지위에 이르렀고, 충후하고 정직함으로써 사류의 떠받들음이 되었다.
숭정 병자년(1636, 인조 14)에 오랑캐가 쳐들어오니 임금께서는 강화로 납시려 하였다. 그 때에 선생은 이미 재상의 벼슬을 그만두었고 또 늙고 병든 몸이었는데도 임금께서 선생에게 종묘의 신주를 모시고 먼저 떠나라고 명하시었다. 이에 장신(張紳)을 강화부의 유수로 삼고, 검찰사 김경징(金慶徵)과 부사 이민구(李敏求)에게 군사(軍事)를 맡게 하였다. 그러자 이미 임금님의 행차(大駕)가 오랑캐의 선봉에게 공격을 받아 창졸간에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적은
두터운 포위망을 구축하고 지키면서 내외의 연락을 차단하니 제도(諸道)의 근왕병들은 오는대로 모두 궤멸 당하였다. 적은 또 군사를 나누어 강도를 엿보고 있었는데, 장신과 김경징 등은 천험(天險)만 믿고 이에 대비하지 않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김경징은 교만 방자하여 군사로써 간하는 사람이 있으면 문득 성을 내어 이를 묵살시켜버렸다.
이에 선생께서 분연히 이르기를 ʻ행재소가 포위당한 지 벌써 오래 되었고, 정세규(鄭世規)도 도로에서 패하여, 풍문에는 이미 그가 죽었다고들 하니, 일을 주관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부사는 호서로 달려가 흩어진 병사들을 수습하고 의병을 규합하여 호남의 병졸로 뒤쳐진 자들을 독려하여 임금의 위급함에 내달아 회를 늦추어서는 안 되는 법이다.ʼ라 하고, 또 이르기를 ʻ남한성의 소식이 끊겼으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사를 모집하고 벼슬이 있는 자들을 일으켜 열 번을 시도하면 한 번쯤은 뚫고 들어갈 수 있을 터인데 신하된 도리에 어떻게 팔짱만 끼고 보고 있단 말인가?ʼ하니, 경징 등이 빈정거리면서 말하기를 ʻ스스로 여기를 관장할 사람이 있는데 피난 온 대신이 참여할 일이 아닐 줄 아오.ʼ 하고는, 하나도 듣지 않고 시행하지않았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ʻ일은 끝났습니다. 어찌하여 배를 준비하여 급한 일에 대비하지 않으십니까?ʼ하니, 선생께서 탄식하여 말하기를 ʻ주상께서는 포위 중에 계시며 종묘사직과 왕손인 원손이 모두 여기에 있으니, 만일 불행한 일이 닥친다면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어찌 살기를 바라리오.ʼ하였다. 며칠이 지나자 적이 크게 몰려온다는 보고가 있었으나, 장신과 김경징은 이를 믿지 않고 오히려 큰 소리로 말하기를 ʻ첫 겁쟁이들이로다. 강물이 넘실거려 흐르는데 적이 어떻게 날아 건너올 것이냐?ʼ 고 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적이 과연 갑곶으로 건너오니 우리 병졸들은 바라만 보다 싸워보지도 못하고 저절로 무너지고 김경징 등은 일시에 배를 빼앗아 타고 도망하였다. 이에 적은 평시에 행군하듯 성 밑에 이르렀다.
선생께서는 집안사람들과 결별하고 성의 문루에 올라 염초를 쌓아놓고 그 위에 올라앉아서 옷을 벗어 하인에게 주고는 손을 저어 좌우를 물리치고 불을 붙여 자폭하였다. 손자 수전(壽全)은 당시 나이 13세로 곁에 있었다. 선생께서 노복을 시켜 손자를 데려가라고 하였으나, 손자는 선생의 옷을 붙들고 울면서 말하기를 ʻ할아버지를 따라 죽어야지 어디로 가겠습니까?ʼ하니, 노복도 가지 않고 함께 죽었다.
별좌 권순장(權順長)과 진사 김익겸(金益兼)은 동지들과 먼저 약속하여 부하들을 성문으로 나누어 보내, 관군을 도와 성을 사수하기로 계획을 세웠다가 이에 이르러 마침내 선생과 함께 죽으니 실로 정축년(1637, 인조 15) 정월 22일이었다. 대저 이미 선생께서 죽으니 국가에서는 충신의 문으로 정려(旌閭)하고, 또 강화부성의 남쪽 7리 되는 곳에 사우(祠宇)를 짓고 ʻ충렬사(忠烈祠)ʼ라 사액하여 권공(權公), 김공(金公) 및 이상길(李尙吉) 이하 열 한 사람을 모두 배향하게 하였으니, 숭보하는 은전이 갖추어졌다하겠다.
금상(숙종) 24년 무인년(1698)에 백씨(伯氏)께서 왕명을 받들어 본부의 유수가 되어 현지에 이르자, 먼저 사당에 배알하고 다시 남문에 올라 크게 한숨을 지으면서 ʻ위공자(魏公子)의 선비 후대한 일을 갖고도 대량(大梁)의 동문에다 글을 적은 사람이 있었고, 사마천은 이 일을 사기(史記)에 쓰기까지 하였는데 하물며 선생의 충절은 혁혁하여 백세토록 인륜 기강으로 신뢰하는 바이니, 이 일이 기록이 없을 수 있는가?ʼ하고는 이에 돌을 다듬어 비를 만들어 전액(篆額)으로 크게 써서 남문 가에 세우고는 나 창협(昌協)으로 하여금 그 본말을 적도록 하였다.
창협이 조용히 생각건대, 충의가 사람들에게 감동시킴이 깊다. 정축년(1637)에서 지금까지는 60여년이요, 당시의 노인들은 다 가고 없건만, 사람들은 아직도 이 남문을 기리면서 아무개가 이곳에서 죽었노라 하고는 왕왕 그 때의 일을 어제의 일처럼 이야기들을 한다. 그리고 사대부로서 오다가다 이 고을을 찾는 자도 반드시 남문이 어디있느냐고 먼저 묻고는 흐느끼면서 감탄하며 떠날 줄을 모른다. 이로 보아 말한다면 비록 비석이 없어도 역시 좋은 일이겠으나, 유적을
포지 게시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갑절이나 더 많이 살펴보도록 하여 백세 뒤에라도 선생의 충절을 잊지 않게 할 수 있다면 비석이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지난날의 정부를 돌아보면, 이런 데에 마음을 쓰지 못했음이, 어쩌면 국가 장해의 보호를 급히 여기기에 겨를이 없었던 것인가? 그러나 절의의 장사가 국가에서는 국방을 위한 성곽이나 무기보다 더함을 안다면 오늘 이 일이 급한 일이 아니라고 그 누가 말하겠는가? 백씨의 이름은 김창집(金昌集)이니 선생의 아우 문정공 청음선생 김상헌(金尙憲)의 증손이다. 그래서 후인들이 이 일이 혹 사사로운 처사였다고 의아해 한다면, 이는 대공의 도를 아는 사람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