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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약소(The Hugh O'Neil Dispensary)와 피난처(The Frederick Underwood Shelter)를 운영해서 1895년 콜레라가 유행할 때 많은 환자들의 목숨을 건지는 등 의료사역을 했지만 결혼 후 주된 사역은 복음전도사업과 문서사업이었다. | 시약소(The Hugh O'Neil Dispensary)와 피난처(The Frederick Underwood Shelter)를 운영해서 1895년 콜레라가 유행할 때 많은 환자들의 목숨을 건지는 등 의료사역을 했지만 결혼 후 주된 사역은 복음전도사업과 문서사업이었다. | ||
현재의 독립문 근처에 있던 모화관 건너편에 벽돌집을 마련하고 여성들을 위한 시약소와 성경반을 운영했다.<br/> | 현재의 독립문 근처에 있던 모화관 건너편에 벽돌집을 마련하고 여성들을 위한 시약소와 성경반을 운영했다.<br/> | ||
− | + | 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1904년), With Tommy Tomkins in Korea(1905년)와 Underwood of Korea(1918) 등의 주요저서가 있고, The Korea Mission Field의 편집인으로 1906-1914년까지 일하는 동안 여러 편의 논설과 한국의 민담을 영어로 채록한 기사들을 썼다. | |
− | 남편과 함께 한국에 대학을 설립하기 위해 애썼고, 언더우드의 사후에 이 일을 마무리하는 데 거의 전력을 쏟았다. 교육선교사로 한국에서 일하는 외아들 원한경 가족과 말년을 보내다 영면하고 양화진외국인묘지에 묻혔다. | + | 남편과 함께 한국에 대학을 설립하기 위해 애썼고, 언더우드의 사후에 이 일을 마무리하는 데 거의 전력을 쏟았다. 교육선교사로 한국에서 일하는 외아들 원한경 가족과 말년을 보내다 영면하고 양화진외국인묘지에 묻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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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12일 (금) 01:18 판
Lillias H. Underwood | |
한글명 | 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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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 | Lillias Horton Underwood |
한자명 | 元杜尤 夫人 |
이칭 | Lillias Sterling Horton |
성별 | 여자 |
생년 | 1851 |
몰년 | 1921 |
소속 | 장로교 |
직업 | 선교사, 의사 |
내한 연도 | 1888년 3월 |
출신지 | 미국 뉴욕 주 올바니 |
출신학교 | 시카고여자의과대학(Chicago Women's Medical School, later merged in Northwestern University Medical School) |
아버지 | James Manderville Horton |
어머니 | Matilda McPherson Horton |
배우자 | H. G. 언더우드 |
자녀 | H. H. 언더우드(원한경) |
손자 | Underwood, Horace Grant II(원일한), John Underwood(원요한), James Horton Underwood(원재한), Richard F. Underwood(원득한), Grace Underwood Harkness(원은혜) |
기본정보
릴리어스 호튼은 미국 동부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내고, 아버지의 사업이 시카고로 옮겨가게 되어 온 가족이 중부로 이주한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선교사가 되기를 꿈꾸지만 건강상의 문제와, 대학진학을 포기하게 한 어머니에 대한 반항심으로 20대를 보내고 뒤늦게 선교사가 되었다. 원래는 인도에 의료선교사로 나가기 위해 자신의 성격을 극복하고 3년만에 의학과정을 마쳤다. 그런데 선교부의 엘린우드 총무가 직접 찾아와 한국 왕실에서 여의사를 요청한다고 설득해서 한국으로 선교지를 바꾸었다.
의료선교사로 내한하여 애니 엘러스의 뒤를 이어 제중원의 부인과를 맡아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1889년 3월, 함께 일하는 동료 언더우드 선교사와 결혼하고 두 달 동안 한국의 북쪽 지방을 순회하는 신혼여행을 감행하여 한국내륙을 여행한 최초의 서양여성으로 기록된다. 명성왕후의 시의로 일하면서 왕후의 총애를 받을 뿐 아니라 왕후의 친구가 되었다.
1890년 아들 원한경을 출산하고 건강이 악화되어 한동안 선교활동을 하지 못하고 미국에 나가있다가 1893년에 다시 한국에 돌아온다.
시약소(The Hugh O'Neil Dispensary)와 피난처(The Frederick Underwood Shelter)를 운영해서 1895년 콜레라가 유행할 때 많은 환자들의 목숨을 건지는 등 의료사역을 했지만 결혼 후 주된 사역은 복음전도사업과 문서사업이었다.
현재의 독립문 근처에 있던 모화관 건너편에 벽돌집을 마련하고 여성들을 위한 시약소와 성경반을 운영했다.
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1904년), With Tommy Tomkins in Korea(1905년)와 Underwood of Korea(1918) 등의 주요저서가 있고, The Korea Mission Field의 편집인으로 1906-1914년까지 일하는 동안 여러 편의 논설과 한국의 민담을 영어로 채록한 기사들을 썼다.
남편과 함께 한국에 대학을 설립하기 위해 애썼고, 언더우드의 사후에 이 일을 마무리하는 데 거의 전력을 쏟았다. 교육선교사로 한국에서 일하는 외아들 원한경 가족과 말년을 보내다 영면하고 양화진외국인묘지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