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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절을 창건한 것은 고려 충숙왕 15년(1328) 원(元)나라를 거쳐 들어온 인도 승려 지공으로 전하지만 그 이전에 이미 사찰이 있던 곳으로 추측된다. 조선 초 구은 이교가 쓴 〈천보산식암사수조기〉에 의하면 고려 우왕 2년(1376) 지공의 제자인 나옹이 스승의 삼산량수지기의 비기, 즉 이곳에 가람을 이룩하면 불법이 흥한다는 믿음에서 크게 불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그가 완성하지 못하고 입적한 후 제자 각전(覺田) 등이 262칸의 대규모 사찰의 조성공사를 마쳤다 한다. 고려 말에는 전국 사찰의 본산으로 승려의 수가 3000명에 이르렀으며. 조선 초기까지도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절이었다 조선 초 태조 이성계는 나옹의 제자이며 자신의 스승인 무학대사를 회암사에 머물게 하고 재정기반을 마련해 주었으며 불사가 있을 때마다 대신을 보내 참례하도록 하였다. 또 왕위를 물려준 뒤에는 이곳에서 수도생활을 하기도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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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종조에 들어 조정의 억불정책으로 회암사는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세종 6년(l424)의 기록에 따르면 이 절에 승려가 250명이 있었고 규모가 1만여 평에 이르렀다고 한다. 김수온(金守溫)이 쓴 〈회암사중창기〉에 의하면 성종 3년(1472)세조 비인 정희왕후가 하성부원군 정현조에게 명하여 절을 중창하였는데 승려 처안(處安)으로 하여금 공역을 담당하게 하였다고 한다. 지금 절터에 남아 있는 석단과 석벽, 기단개석들은 이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 ||
+ | 그 후 명종 때 섭정을 하던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은 보우는 이곳을 중심으로 불교중흥책을 펴 회암사는 전국제일의 수휘도장이 되었다. 그러나 왕후가 죽고 다시 억불정책으로 선회하자 명종 20년(1565)보우가 잡혀가고 절은 불태워졌다 이후 순조 21년(1821)에 경기지방 승려들이 힘을 모아 지공·나옹·무학 등 세 화상의 부도와 비를 중수하고 옛터 옆에 작은 절을 짓고 ‘회암사’라 하여 절 이름을 계승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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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사찰은 가람배치에 있어 평지가 아닌 산간에 있는 절이면서 8단의 단축을 이루면서 남쪽에 남회랑을 둔 것은 고려시대의 궁궐이나 사찰배치의 특정을 보이는 것이다. 대체로 남북 축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이 되게 주요 건물을 배치하였는데, 남측에서부터 3칸의 계단을 오르면서 제1단지에는 좌우로 당간지주가 놓이고, 다시 계단을 따라 올라서면 제2단지인데 여기에는 중앙에 천랑만이 남아 있고 좌우 평탄한 공지로 남아 있다. 건물터는 제3단지부터 노출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계단을 올라서자 바로 3칸×2칸의 문터의 토석과 이를 좌우로 연결하여 동서로 뻗은 추정 남회랑터의 초석이 노출되어 있다. 또 중앙에는 역시 남북으로 뻗은 천랑이 있고 그 서편에 종루터와 동편에는 향적전터가 크게 자리잡고 있다. 다시 제3단에도 앞에는 문터가 있고 천랑 좌우에는 큰 건물터가 남아 있다. 제5단지에는 천랑 서편에 서승당터와 동쪽에는 4단지와 같이 걸쳐놓은 동객실터가 있다. 제6단지에는 천랑을 따라올라가면 이 사찰의 가장 중심건물인 보광전터가 잘남아 있는데 정면이 7칸이나 되는 큰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위로 제7단지에는 설법전과 사리전이 있었고, 제8단 좌우에는 대웅전과 나한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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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19일 (수) 16:44 판
개요
양주 회암사지(楊州 檜巖寺址)는 사적 제128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산14-1번지이다.
이 절을 창건한 것은 고려 충숙왕 15년(1328) 원(元)나라를 거쳐 들어온 인도 승려 지공으로 전하지만 그 이전에 이미 사찰이 있던 곳으로 추측된다. 조선 초 구은 이교가 쓴 〈천보산식암사수조기〉에 의하면 고려 우왕 2년(1376) 지공의 제자인 나옹이 스승의 삼산량수지기의 비기, 즉 이곳에 가람을 이룩하면 불법이 흥한다는 믿음에서 크게 불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그가 완성하지 못하고 입적한 후 제자 각전(覺田) 등이 262칸의 대규모 사찰의 조성공사를 마쳤다 한다. 고려 말에는 전국 사찰의 본산으로 승려의 수가 3000명에 이르렀으며. 조선 초기까지도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절이었다 조선 초 태조 이성계는 나옹의 제자이며 자신의 스승인 무학대사를 회암사에 머물게 하고 재정기반을 마련해 주었으며 불사가 있을 때마다 대신을 보내 참례하도록 하였다. 또 왕위를 물려준 뒤에는 이곳에서 수도생활을 하기도 했다.
세종조에 들어 조정의 억불정책으로 회암사는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세종 6년(l424)의 기록에 따르면 이 절에 승려가 250명이 있었고 규모가 1만여 평에 이르렀다고 한다. 김수온(金守溫)이 쓴 〈회암사중창기〉에 의하면 성종 3년(1472)세조 비인 정희왕후가 하성부원군 정현조에게 명하여 절을 중창하였는데 승려 처안(處安)으로 하여금 공역을 담당하게 하였다고 한다. 지금 절터에 남아 있는 석단과 석벽, 기단개석들은 이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 후 명종 때 섭정을 하던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은 보우는 이곳을 중심으로 불교중흥책을 펴 회암사는 전국제일의 수휘도장이 되었다. 그러나 왕후가 죽고 다시 억불정책으로 선회하자 명종 20년(1565)보우가 잡혀가고 절은 불태워졌다 이후 순조 21년(1821)에 경기지방 승려들이 힘을 모아 지공·나옹·무학 등 세 화상의 부도와 비를 중수하고 옛터 옆에 작은 절을 짓고 ‘회암사’라 하여 절 이름을 계승하였다.
이 사찰은 가람배치에 있어 평지가 아닌 산간에 있는 절이면서 8단의 단축을 이루면서 남쪽에 남회랑을 둔 것은 고려시대의 궁궐이나 사찰배치의 특정을 보이는 것이다. 대체로 남북 축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이 되게 주요 건물을 배치하였는데, 남측에서부터 3칸의 계단을 오르면서 제1단지에는 좌우로 당간지주가 놓이고, 다시 계단을 따라 올라서면 제2단지인데 여기에는 중앙에 천랑만이 남아 있고 좌우 평탄한 공지로 남아 있다. 건물터는 제3단지부터 노출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계단을 올라서자 바로 3칸×2칸의 문터의 토석과 이를 좌우로 연결하여 동서로 뻗은 추정 남회랑터의 초석이 노출되어 있다. 또 중앙에는 역시 남북으로 뻗은 천랑이 있고 그 서편에 종루터와 동편에는 향적전터가 크게 자리잡고 있다. 다시 제3단에도 앞에는 문터가 있고 천랑 좌우에는 큰 건물터가 남아 있다. 제5단지에는 천랑 서편에 서승당터와 동쪽에는 4단지와 같이 걸쳐놓은 동객실터가 있다. 제6단지에는 천랑을 따라올라가면 이 사찰의 가장 중심건물인 보광전터가 잘남아 있는데 정면이 7칸이나 되는 큰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위로 제7단지에는 설법전과 사리전이 있었고, 제8단 좌우에는 대웅전과 나한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절터에서 500m쯤 올라가면 현재의 회암사가 있는데 주요 건물은 1977년에 세운 대웅전과 삼성각·영성각 등이 있다. 그 부근에 거리를 두어 남아있는 중요문화재들을 들면 무학대사를 모신 묘탑이며 1407년에 세워진 보물 제388호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과 조선 초기에 건립된 보물 제389호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앞 쌍사자 석등, 경기도유형문화재 제50호 나옹선사부도 및 석등, 경기도유형문화재 제51호 무학대사비, 연고가 확실치 않으나 보우의 부도라고 전하고 있는 경기도유형문화재 제52호 회암사지부도탑, 경기도유형문화재 제82호 어사대비, 경기도민속자료 제1호 회암사지맷돌 등이 있다. 1377년(우왕3)에 세워진 보물 제387호인 회암사지 선각왕사비는 나옹선사의 행적을 기록한 비석이나 1997년 화재로 파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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