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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17일 (목) 06:28 판
나의 인문학 콘텐츠
박물관에서 찾은 나의 호기심
중국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두보(712∼770)의 시(詩)를 성종 때 홍문관의 유윤겸 등이 왕의 명을 받들어 한글로 번역하여 편찬한 책이다. ‘두공부시’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두보가 공부원외랑의 벼슬을 지냈기 때문이며 ‘분류’는 중국 송나라의 분문집주두공보시(分門集注杜工甫詩)를 참고하여 따온 것이다.
초인본의 조위가 쓴 서문에 의하면 성종 12년(1481) 가을에 왕의 명을 받아 한글 번역을 착수하여 그 해 12월에 완성하였고, 본권 13의 인본을 보면 을해자, 중자 및 소자 그리고 한글 활자로 찍었는데 인쇄가 깨끗하지 못한 편이다. 성종 13년(1482)에 가뭄이 심하여 『두시』를 비롯한 『춘추』, 『이백시』, 『용학구결』 등의 발행을 멈추고 그 비용을 가뭄극복에 씀에 따라 그 인쇄발행은 다소 뒤에 이루어진 듯하다.
이 『분류두공부시언해』는 한글로 표현된 유창한 문체와, 풍부한 어휘 등으로 볼 때 국문학과 국어학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1]
호기심의 확장
<분류두공부시언해>에서 출발한 나의 호기심은 해당작품의 작가인 '두보'라는 인물 자체에 대한 호기심으로 확장되었다. '두보'는 중국 당대의 인물로,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 받고 있으며, '이백'이라는 인물과 함께 '이두'라고 불린다. 명문가 출신의 남다른 재능의 소유자 였던 그는 나라와 백성을 위해 자신의 뜻을 펼쳐보고자 하였으나, 빈곤하고 실망으로 가득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고난과 역경을 겪으며 그의 수 많은 작품이 탄생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춘망>,<북정>,<삼리>,<삼별> 의 네 가지 작품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네 작품은 두보가 안사의 난을 피해 관직을 버리고 쓰촨으로 피난을 떠났을 무렵에 쓰여진 작품으로, 당시 그의 심경과 처지가 잘 표현되어 있다. 그는 안사의 난을 피해, 쓰촨성 청두시에 풀로 집을 지어 머물렀으며 이곳에 '초당'('두보초당')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두보는 3년동안 초당에 머물며 240편의 시를 창작했고 '초당'을 소재로 한 작품을 많이 탄생시켰는데, "초당이 가을 바람에 부서진다"는 구절 등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두보'에 대해 조사하다보니, 그의 일생과 더불어 그의 작품과 시풍이 한국에 미친 영향에도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두보'의 작품과 시풍이 각각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영향을 미쳤음을 확인하였다. 고려시대의 경우 두보에게 큰 영향을 받은 이제현과 이색등의 인물이 있었음을 확인했다. 조선시대에는 두보의 작품이 가장 높이 평가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세종 무렵에는 <찬주분류두시> 가 5차례 간행되었고 '윤유겸'이라는 인물이 주석에 참여하였는데, 그는 다시 성종때에 이르러 두보의 시를 한글로 언해한 <분류두공부시언해>의 총괄을 담당했다고 한다.
<분류두공부시언해>에 대해 전반적으로 조사하는 과정에서, 해당 문화유산의 국어사적 가치가 상당히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류두공부시언해>의 초간본에는 방점, 반치음, 옛이응이 표기되어있고, 중간본에는 전에 없던 자음동화와 구개음화현상이 나타난다. 이러한 특징은 15세기 중세국어와 17세기 근대국어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어 국어사적 가치를 지닌다. 그리고 현재는 사라져 버린 순수고유어가 풍부하게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국어국문학적으로도 큰 가치가 있다. 또한, 최초의 국역 한시집이라는 점에서도 번역문학의 대표사례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지식노드
- 문화유산
- 분류두공부시언해, 분류두공부시언해-초간본, 분류두공부시언해-중간본, 찬주분류두시 , 춘망,북정,살미,삼별
- 인물
- 사건
- 개념
- 시대
- 장소
관계정보
참고자료
- 원균은 어떻게 일등공신이 됐을까?(上), Youtube.
- 원균은 어떻게 일등공신이 됐을까?(下), Youtube.
- 영웅의 길 반역자의 길 이순신 vs 원균, 한국사 맞수열전, 다음백과.
- 심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다음백과.
- 노승석, 「선무공신교서(宣武功臣敎書)」, 『이순신연구논총』 8 , 2007, 363-384쪽.
인용 오류: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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