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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문서번호||서기년||간지||편지 발신자||박태관나이||김수종나이||내용요약 | !순번||문서번호||서기년||간지||편지 발신자||박태관나이||김수종나이||내용요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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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39||1705||을유년 9월 28일||服弟 泰觀||26||35||과거시험에 못 보게 되어 아쉬움, 농사가 흉년이라 놀랍다, 湖伯형에 처소에서 돌아가는 편에 쓴 안부편지. /추신-船卜을 급하게 기다리니 廳奴에게 빨리 보내게 하라. | |12||139||1705||을유년 9월 28일||服弟 泰觀||26||35||과거시험에 못 보게 되어 아쉬움, 농사가 흉년이라 놀랍다, 湖伯형에 처소에서 돌아가는 편에 쓴 안부편지. /추신-船卜을 급하게 기다리니 廳奴에게 빨리 보내게 하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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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148||1706||병술년 1월 17일||服人世弟 泰觀||27||36||定之가 죽어 슬픔, 정지는 문필을 버리고 무과에 급제 편모와 어린 자식이 있음, 喪車는 兩湖의 方伯에 부탁했음, 부의를 제대로 못해 송구함, 海墨을 보냄. /별고-冑卿이 公山에서 만나자는 것은 기제 때문에 할 수 없음, 遮陽竹을 보내 달라. | + | |13||148||1706||병술년 1월 17일||服人世弟 泰觀||27||36||定之가 죽어 슬픔, 정지는 문필을 버리고 무과에 급제 편모와 어린 자식이 있음, 喪車는 兩湖의 方伯에 부탁했음, 부의를 제대로 못해 송구함, 海墨을 보냄. |
+ | /별고-冑卿이 公山에서 만나자는 것은 기제 때문에 할 수 없음, 遮陽竹을 보내 달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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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50||1706||병술년 5월 7일||服弟 泰觀||27||36||아들을 낳는 것을 축하함, 竹園에 모르는 시체를 파 갔다고 하여 축하함, 두 섬의 벼와 여섯 묶음의 생선 30개의 靑竹에 감사함, 배를 팔게 하고 곡식을 받을 것임, 定之의 가족 소식을 물음. | |14||150||1706||병술년 5월 7일||服弟 泰觀||27||36||아들을 낳는 것을 축하함, 竹園에 모르는 시체를 파 갔다고 하여 축하함, 두 섬의 벼와 여섯 묶음의 생선 30개의 靑竹에 감사함, 배를 팔게 하고 곡식을 받을 것임, 定之의 가족 소식을 물음. |
2017년 12월 10일 (일) 01:45 판
목차
김수종과 박태관
- 朴泰觀(1678~1719.2.9.)
4세에 모친을 여위고, 20살에 부친상을 당함. 족형인 징사공 박태초를 스승으로 섬김. 농암 김창협에게 가서 학문을 질정했는데 김공이 자주 칭송을 함. 강호에 오랫동안 살다가 늦게 三淸 白蓮峯 아래에 집을 사서 ‘白厓’라 이름 지음. 저서는 시고 한 권이 있음. 호는 凝齋.
증조부 朴東說 관찰사. 조부 朴濠 첨지중추부사. 부 朴世標 南平현감. 모 咸平李氏.
初娶 全州李氏, 參奉讓錫의 딸
再娶 寧越辛氏, 縣令泰東의 딸
- 金守宗(1671~1736)
간찰 번역
편지 목록
순번 | 문서번호 | 서기년 | 간지 | 편지 발신자 | 박태관나이 | 김수종나이 | 내용요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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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158 | 1697 | 정축년 3월 26일 | 弟 泰觀 頓首 | 20 | 27 | 안부를 전하면서 가을이라 한번 찾아오라 함. 답장. |
2 | 164 | 1700 | 경진년 10월 2일 | 朴泰觀 | 23 | 30 | 만남 후에 보낸 편지로 僮僕이 돌아감에 부침, 부탁한 시를 지어 보냄. |
3 | 136 | 1701 | 신사년 上元日 아침 | 弟 泰觀 | 24 | 31 | 안부 편지, 監試 初試가 8월로 결정되니 그 때 올라오는지 물음. |
4 | 149 | 1701 | 신사년 2월 6일 | 弟 泰觀 | 24 | 31 | 며느리가 낙태함, 읍리 편에 편지를 부침. 추신-『遺響』을 보내 달라. |
5 | 131 | 1701 | 신사년 5월 7일 | 服弟 泰觀 | 24 | 31 | 과거를 보려는 것이 잘못됨을 들음, 춘궁을 구제해 준 두 가마니는 너무 과해 송구하다. 답장. /추신-盤松 집에 들어가고 싶은데 허락을 요구. 『遺響』은 잘 받음. |
6 | 129 | 1703 | 계미년 6월 19일 | 弟 泰觀 | 25 | 33 | 뜻을 확고히 하여 마음을 다잡아라, 子受 집에서 인편이 감에 작성함. /추신-庄奴는 엄하게 다스려 달라. |
7 | 128 | 1703 | 계미년 7월 19일 | 弟 泰觀 | 25 | 33 | 小紙에 적힌 盤松의 家舍는 형이 定之와 각자 가지는 문제는 둘이 잘 합의해라, 전복과 종이를 보내주어 감사함, 錦平에 노인이 죽었다고 통보. 답장. |
8 | 115 | 1703 | 계미년 9월 1일 | 弟 泰觀 | 25 | 33 | 定之가 돌아감에 안부를 전함. |
9 | 120 | 1703 | 계미년 9월 18일 | 弟 泰觀 | 25 | 33 | 定之가 돌아감에 쓴 안부편지. /추신-定之가 잘 돌아갔는지 물음. |
10 | 133 | 1703 | 계미년 12월 5일 | 服弟 泰觀 | 25 | 33 | 奴가 돌아감에 쓴 안부 편지. /추신-생선을 보내주어 감사. |
11 | 117 | 1704 | 갑신년 11월 30일 | 朞服情弟 泰觀 | 26 | 34 | 박태관이 부안에서 서울로 온 후 잘 왔다고 보낸 편지. 공부하라는 조언, 시를 지어 보냄, 서울 소식을 전함, 新曆 4부 大墨 1홀을 보냄, 저고리가 바뀌었다고 함. 추신 2종의 생선과 耳掩을 보냄. |
12 | 139 | 1705 | 을유년 9월 28일 | 服弟 泰觀 | 26 | 35 | 과거시험에 못 보게 되어 아쉬움, 농사가 흉년이라 놀랍다, 湖伯형에 처소에서 돌아가는 편에 쓴 안부편지. /추신-船卜을 급하게 기다리니 廳奴에게 빨리 보내게 하라. |
13 | 148 | 1706 | 병술년 1월 17일 | 服人世弟 泰觀 | 27 | 36 | 定之가 죽어 슬픔, 정지는 문필을 버리고 무과에 급제 편모와 어린 자식이 있음, 喪車는 兩湖의 方伯에 부탁했음, 부의를 제대로 못해 송구함, 海墨을 보냄.
/별고-冑卿이 公山에서 만나자는 것은 기제 때문에 할 수 없음, 遮陽竹을 보내 달라. |
14 | 150 | 1706 | 병술년 5월 7일 | 服弟 泰觀 | 27 | 36 | 아들을 낳는 것을 축하함, 竹園에 모르는 시체를 파 갔다고 하여 축하함, 두 섬의 벼와 여섯 묶음의 생선 30개의 靑竹에 감사함, 배를 팔게 하고 곡식을 받을 것임, 定之의 가족 소식을 물음. |
15 | 175 | 1707 | 정해년 5월 30일 | 弟 泰觀 | 28 | 37 | 홍역이 경향에 만연한데 안부를 물음, 아들딸 중 무엇을 낳았는지 물음, 과거시험 공부를 열심히 하고 웬만하면 올라와라, 조카의 婚處가 古阜人을 택하는데 적합처를 알려 달라, 寒泉의 金友 일은 禮判이 거부하여 부탁을 들어줄 수 없다. |
16 | 134 | 1708 | 무자년 8월 2일 | 眷弟 泰觀 | 29 | 38 | 전염병이 없어지고 공부는 잘하는지 물음, 婚處에 대해서는 沈友에게 들었는데 집안이 좋다고 함, 비가 많이 내려 걱정됨, 京畿의 밭에는 수확물이 없어 부안만 믿음, 廳奴를 타일러 빨리 곡식을 보내 달라, 白紙는 품질이 안 좋음, 전복은 감사함, 조카의 혼례는 10월로 미룸, 筆墨을 보냄. |
17 | 172 | 1708 | 무자년 8월 3일 | 服弟 泰觀 | 29 | 38 | 200냥을 보내주어 감사, 方伯과는 추후에 인사를 하겠다. /추신-金鏡의 친우들에게 안부를 전해 달라. |
18 | 145 | 1709 | 기축년 1월 3일 밤 | 服弟 泰觀 | 30 | 39 | 부안에서 돌아온 후 안부편지, 김수종의 상사에 대해 위로, 자신은 조카가 요절함, 蘆橋에 대한 原情을 보내니 올려 달라. |
19 | 162 | 1709 | 기축년 1월 28일 | 服弟 泰觀 | 30 | 39 | 만난 지가 10개월이 됨, 김수종 계씨의 죽음을 위로함, 박태관은 요절한 조카를 묻을 것임, 蘆橋에 대한 송사가 정지되면 남쪽에 못 내려감, 領相이 沈浚과 崔壽慶을 붙여주기 위해 복과를 시행할 것이니 올라와라. /추신-東湘의 노형과 李忠義 부자와 石橋의 郎君 안부를 물음. |
20 | 151 | 1709 | 기축년 踏靑日(3월 3일) | 服制 泰觀 | 30 | 39 | 김수종 계씨의 장례에 부안군수가 도와줬는지 물음, 蘆橋 일은 내려가지 않음, 조카아이는 내려감, 網巾은 감사함. /추신-領相이 『禮記類編』을 찬술함, 이로서 성균관 유생과 갈등함, 노론과 소론들이 혈전을 벌임. |
21 | 174 | 1709 | 기축년 9월 26일 | 服弟 泰觀 | 30 | 39 | 김수종이 간 후 10개월 지남, 박태관은 두 장례식의 返虞를 마침, 조카는 멀리 떠나 감, 完山의 백일장은 잘 볼 수 있는지 물음, 人馬는 가까운 고을에서 빌리기로 함. |
22 | 168 | 1709 | 기축년 11월 5일 | 服弟 泰觀 | 30 | 39 | 조카가 모두 남쪽에 내려감, 인마를 빌려주어 감사함, 굶주림에 곡식을 도와 달라. /추신-李鉽의 鞫廳을 설치하고 사형시킴, 영상 李濡가 쫓겨나고 崔相이 다시 배수 받음, 전복과 생선은 감사함, 먹을 보냄. |
23 | 169 | 1710 | 경인년 1월 5일 | 服弟 泰觀 | 31 | 40 | 편지를 한지 60일이 됨, 남쪽에 간 조카의 소식을 못 들음, 임금의 병이 심하다가 회복함, 봄에 慶科를 설치한다 함, 조카를 잘 봐 달라, 族姪 朴弼揆가 完山 判官이 되어 가는데 만나 봐라, 상사에 의함 병으로 봄에 도성으로 이사하려 함, 靑竹 3~40통을 보내 달라, 三曆을 보냄. |
24 | 126 | 1710 | 경인년 12월 16일 | 弟 泰觀 | 31 | 40 | 김수종 딸의 혼처를 물음, 李兄의 旬撫하는 행차가 바뀐 것을 전함, 달력을 보냄. /추신-黃口筆 2개를 보냄. |
25 | 116 | 1711 | 신묘년 4월 17일 | 服弟 泰觀 | 32 | 41 | 營中에 있는 李柏年에게 편지를 보내라 함. 답장. |
26 | 154 | 1711 | 신묘년 12월 17일 | 弟 泰觀 | 32 | 41 | 박태관은 賢兒와 모든 아이들이 마마 걸림, 6일에 젖먹이 애가 죽음, 일찍 고아가 된 후 부인과 형을 잃었다고 함, 김수종이 아들 얻은 것을 축하함, 坤殿에 창질이 회복됨, 大庭試를 2월 30일 설행한다 함, 과거공부를 하라, 柳婚이 틀어짐. /추신-새 수령이 재목을 베어 배를 만든 것을 단속한다는 데 잘 처리해 달라, 台甫가 扶安수령과 다투어 안 내려감, 청나라 황제가 歲幣를 없앰, 新曆은 금처럼 귀하여 3부만 보냄. |
27 | 170 | 1712 | 임진년 8월 26일 | 弟 泰觀 頓 | 33 | 42 | 박태관은 동쪽 여행 후 학질에 걸림, 남행은 다음 달 10일 갈 것임, 根壽의 죽음이 안타까움, 科獄의 곡절이 심하여 鞫獄이 일어남. |
28 | 152 | 1713 | 계사년 4월 11일 | 弟 泰觀 | 34 | 43 | 박태관이 반년 동안 있다가 서울로 잘 올라왔다고 전함, 진송해 준 것이 감사, 關伯형의 龍山 江亭에서 1~2년 보낼 것임, 金昌翕에게 그 풍경을 들음, 김수종에게 이곳에 집을 지어 달라 함, 붓 2개 먹 하나를 보냄. /추신-東湘에 안부를 전해 달라. |
29 | 167 | 1713 | 계사년 11월 7일 | 弟 泰觀 頓 | 34 | 43 | 東村의 伯兄이 1일에 죽음, 박태관의 막내 조카가 죽었다고 전해서 놀람, 柳庄은 풍토가 좋지 않아 조심하고 산 사람을 돌봐 달라, 임금의 감기가 차도를 보임, 御史로 尹鳳朝·呂光周·李秉常이 나감, 鵞峴의 季兄이 廣州府尹으로 부임할 것임. 추신-新曆 2건을 보냄. |
30 | 147 | 1714 | 갑오년 1월 26일 | 服弟 泰觀 | 35 | 44 | 希甫가 죽었다하여 놀람, 김수종의 동생인 根壽가 작년에 希甫가 이번에 죽음이 한탄스러움, 庶弟 하나만 남음, 박태관은 부인과 형과 아이를 잃고 작년에 조카가 요절함, 17일 東村형을 장사지냄, 돈을 보내주어 감사함. /추신-임금의 건강이 회복함, 主材와 먹 하나를 보냄. |
31 | 161 | 1714 | 갑오년 2월 28일 | 服弟 泰觀 | 35 | 44 | 김수종에게 동생을 잃은 후 안부를 물음, 大庭試를 치룰 것이니 공부하라, 李慶叔이 부인을 묻기도 전에 새 부인을 얻은 것을 만류시켜라. /추신-붓 1자루 보냄. |
32 | 146 | 1714 | 갑오년 4월 1일 | 服弟 泰觀 | 35 | 44 | 龍湖의 하류로 이사가려 함, 식량을 보내주어 감사함, 곡식을 보내 달라, 李慶叔의 자식이 죽음은 슬픔. /추신-임금의 건강이 안 좋음, 청나라 사정을 전함, 三日製에 李匡輔가 장원함. |
33 | 119 | 1715 | 을미년 3월 23일 | 弟 泰觀 | 36 | 45 | 과거에 낙방, 김수종이 소첩을 데린 것에 대한 훈계, 김수종 조카도 낙방하고 돌아감. 답장. /추신-국왕이 나으면 庭試가 있을 것임, 먹을 보냄, 大蝦를 보내 달라 요구. |
34 | 130 | 1715 | 을미년 5월 10일 | 弟 泰觀 | 36 | 45 | 보리를 몇 가마 보내 달라. /추신-임금이 병환이 심해짐, 도정은 8월에 할 것임. |
35 | 122 | 1715 | 을미년 7월 18일 | 弟 泰觀 | 36 | 45 | 더위가 심함, 첩을 두는 것에 훈계, 숙부 盤松察訪이 돌아가심. 답장. |
36 | 138 | 1715 | 을미년 8월 24일 | 服弟 泰觀 | 63 | 45 | 아들을 낳음, 察訪 숙부가 굶어 죽음은 친구들이 슬퍼할 것임, 관 값을 박태관 자신에게 보내 달라, 吏判은 趙泰采가 되고 申銋은 체직됨. /추신-東湘의 안부를 물음. |
37 | 157 | 1716 | 병신년 정월 아침 | 弟 泰觀 | 37 | 46 | |
38 | 118 | 1716 | 병신년 단오일 | 弟 泰觀 | 37 | 46 | 새로 얻어 아이의 마마를 걱정해 줌, 곡식을 보내주어 감사함, 집을 짓는데 돈을 보태 달라, 여러 사람들의 안부를 물음. 추신 大蝦를 보내 달라, 아이 약과 붓 하나를 보냄. 답장. |
39 | 140 | 1716 | 병신년 11월 23일 저녁 | 弟 泰觀 | 37 | 46 | |
40 | 141 | 1717 | 정유년 5월 14일 | 弟 泰觀 | 38 | 47 | |
41 | 166 | 1717 | 정유년 7월 5일 | 服弟 泰觀 | 38 | 47 | |
42 | 121○ | 미상(계미년 9) | 典農에서 보낸 물건과 편지의 행방을 물음, 龍奴 조카인 有秋에 대해 걱정 말라, 耳掩의 가격을 보내라, 집 짓는 목재는 준비해 두라. | ||||
43 | 123 | 미상(을미년 7) | 김수종이 목이 쉬는 병에 걸림, 딸아이 얻음을 축하함, 박태관의 서제와 조카가 부안으로 이사 감에 인마를 빌려 달라. 답장. | ||||
44 | 124 | 신○년 11월 1일 | 弟 泰觀 | 큰 아이가 마마를 앓음, 귀마개는 품질이 좋은 것임, 서울 소식을 전함. | |||
45 | 127○ | (경인년 12) | 眷弟 | 상대가 행차하는 관계로 어제 이별한 후에 보낸 편지, 臘藥을 보냄. | |||
46 | 132 | 병○년 6월 27일 | 眷弟 泰觀 | ||||
47 | 135 | 갑○년 10월 9일 | 弟 泰觀 | ||||
48 | 137 | 무○년 1월 23일 | 朞服弟 泰觀 | ||||
49 | 142 | 병○년 9월 4일 | 眷弟 泰觀 | ||||
50 | 143○ | (병?년 9) | 眷弟 | ||||
51 | 144 | 을○년 30일 밤 | 服弟 泰觀 | ||||
52 | 153 | 무○년 윤월 21일 | 弟 泰觀 | ||||
53 | 155 | 병○년 12월 20일 | 服制 泰觀 | ||||
54 | 156 | 무○년 11월 17일 | 弟朞服人 泰觀 | ||||
55 | 159○ | 26일 저녁(정축년 3) | 眷弟 | ||||
56 | 160○ | 小紙(정축년 3) | |||||
57 | 163 | 병○년 10월 10일 밤 | 眷弟 泰觀 | ||||
58 | 165 | 경○년 10월 1일 | 弟 泰觀 | ||||
59 | 171 | 12월 15일 | 服弟 泰觀 | ||||
60 | 173 | 편지 받은 아침 | 損弟 泰觀 | ||||
61 | 176 | 정○년 7월 11일 저녁 | 眷弟 泰觀 |
부안김씨 간찰 관련 지리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