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 고씨동굴"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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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원래는 '노리곡석굴(魯里谷石窟)'이라 했으나 의병장 고종원(高宗遠) 일가가 임진왜란 때 피난을 했으므로 '고씨동굴'이라 하였다. 굴 안에는 고종원 일가가 피난을 하면서 밥을 지었던 흔적과 솥을 걸었던 자리가 남아 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27368&cid=40942&categoryId=33557 영씨굴]", 『한국지명유래집』, 국토정보지리원. 2017년 04월 05일.</ref> | |
− | + | 고씨동굴이 위치한 자리가 고구려(高句麗) 땅 끝이었고, 여기 고구려(高句麗) 고씨(高氏)들이 모여 살다가 군대가 물러간 다음에도 머물러 살았다고 한다.<ref>"[http://www.xemasanka.com/xe/index.php?mid=dream&page=8&sort_index=readed_count&order_type=desc&document_srl=8921 고씨동굴이란 이름의 비밀]", 『제마법선도』. 2017년 04월 05일. </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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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5일 (수) 17:29 판
영월 고씨동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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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380px]] | |
지정 번호 | 천연기념물 제219호 |
지정일 | 1969년 06월 04일 |
지정 명칭 | 영월고씨굴 |
한자 명칭 | 寧越 高氏洞窟 |
영문 명칭 | Gossigul Cave, Yeongwol |
분류 | 지질 |
건립·제작 | |
주소 |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영월동로 1121-9 |
위도 | 37.131102 |
경도 | 128.536310 |
웹사이트 | http://www.ywtour.com/Home/Index |
정의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영월동로에 있는 석회동굴. 규모(면적, 높이, 길이) 면적 28만 3,472㎡(지정구역), 총길이 3㎞이다. [1]
위치
내용
- 영월 고씨굴은 남한강 상류에 위치해 있으며, 지금으로부터 약 4∼5억년 전에 만들어졌다. 동굴은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있고, 동굴안의 온도는 연중 15℃ 안팎이며 수온은 5.3℃이다. 고씨굴 안에는 고드름처럼 생긴 종유석과 땅에서 돌출되어 올라온 석순이 널리 분포해 있으며, 화석으로만 존재한다 믿어왔던 갈로아 곤충이 서식하고 있다. 영월 고씨굴은 종유석과 석순 등이 잘 발달되어 있고, 다른 동굴에 비하여 동굴 속에서만 살아가는 희귀한 생물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다.[2]
- 동굴의 발달방향은 북동에서 남서방향이며, 1966년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1974년 5월 15일에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다.[3]
특징
석회암
- 고씨동굴은 전형적인 석회동굴이며,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다층구조를 보인다. 고씨동굴 내에는 종유관, 종유석, 석순, 석주, 동굴산호, 유석, 커튼과 동굴진주, 피솔라이트, 동굴방패, 곡석, 월유 등 다양한 동굴생성물이 분포하고 있으며, 기형종유석도 여러 지점에서 성장한다. 특히 고씨동굴의 특징적인 동굴생성물은 흑색의 동굴산호호서 동굴산호는 동굴수의 공급이 멈춘 석순과 유석 위에서 많이 발견된다. 이러한 흑색의 동굴생성물은 비공개 구간에 특히 많이 나타난다. 동굴생성물이 흑색을 띠는 이유는 동굴수 내에 토양으로부터 공급된 유기물의 영향이다..[4]
서식생물
- 고씨굴에는 총 68종의 다양한 동굴생물이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고씨동굴에서 서식하고 있는 동굴생물은 진동굴 생물 13종, 호동굴 생물 14종, 외래성동굴 생물 41종이 발견되고 있다. 특히 고씨동굴 천장에는 현재 관박쥐, 관코박쥐, 물윗수염박쥐, 황금박쥐 등이 서식하고 있다.[5]
명칭 유래
원래는 '노리곡석굴(魯里谷石窟)'이라 했으나 의병장 고종원(高宗遠) 일가가 임진왜란 때 피난을 했으므로 '고씨동굴'이라 하였다. 굴 안에는 고종원 일가가 피난을 하면서 밥을 지었던 흔적과 솥을 걸었던 자리가 남아 있다.[6]
고씨동굴이 위치한 자리가 고구려(高句麗) 땅 끝이었고, 여기 고구려(高句麗) 고씨(高氏)들이 모여 살다가 군대가 물러간 다음에도 머물러 살았다고 한다.[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