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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문화유산정보 |대표명칭 = 공주 공산 |지정번호 = 사 |지정일 = 1963.01.21 |지정명칭 = 공주 공산성 |한자명칭 = 公州 公山城 |영문명칭 = Go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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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명칭 = 공주 공산성

2024년 4월 1일 (월) 01:22 판

개관

공산성은 백제의 수도가 공주였을 때 공주를 지키던 백제의 산성이다.</br> 금강변 야산의 계곡을 둘러싼 산성으로, 원래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고쳤다. 쌓은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며, 백제 때에는 웅진성으로,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공산성으로,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렀다.</br> 동서로 약800m, 남북으로 400m 정도의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br> 4방에 문터가 확인되는데,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가 남아있고 동문과 서문은 터만 남아있었는데, 1993년에 동문터에는 영동루 서문터에는 금서루를 복원하였다.</br> 암문·치성·고대·장대·수구문 등의 방어시설이 남아 있으며, 성 안에는 쌍수정·영은사·연지·임류각지, 그리고 만하루지 등이 있다. 또한 연꽃무늬 와당을 비롯하여 백제 기와·토기 등의 유물들과 고려·조선시대의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다.</br> 백제 멸망 직후에 의자왕이 잠시 머물기도 하였으며,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지이기도 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김헌창의 난(822)이 일어나기도 하였으며, 조선시대 이괄의 난(1623)으로 인조가 피난했던 곳이기도 하다.</br> 백제 성왕 16년(538)에 부여로 도읍을 옮길 때까지의 백제 도성이었으며, 이후 조선시대까지 지방 행정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역사적 가치가 큰 중요한 유적이다.

사진

관련 사이트

참고문헌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