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과 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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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잠(簪) | + | 잠(簪)과 채(釵)는 비녀의 한 종류로, 잠은 머리에 꽂는 부분이 한 가닥으로 된 것을 말하고, 채는 꽂는 부분이 두 가닥으로 된 것을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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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과 장순왕후의 가례 시 수파 등을 사용해 세자빈의 머리모양을 만들고, 대요, 마리사기, 체장잠, 원잠으로 장식하였을 것이다. | 예종과 장순왕후의 가례 시 수파 등을 사용해 세자빈의 머리모양을 만들고, 대요, 마리사기, 체장잠, 원잠으로 장식하였을 것이다. | ||
− | * 하연부인(1380~1465)은 『[[악학궤범]]』 권9 '[[여기복식]]'에 실린 | + | * 하연부인(1380~1465)은 『[[악학궤범]]』 권9 '[[여기복식]]'에 실린 잠과 비슷한 형태의 비녀를 머리 중심에 수직으로 꽂고, 『[[악학궤범]]』 권9 '[[여기복식]]'에 실린 채와 비슷한 형태의 비녀를 앞에서 뒤를 향해 꽂은 것으로 보인다. |
* 성종 24년(1493)에 편찬된 『[[악학궤범]]』 권9 '[[여기복식]]'에는 잠의 도설이 실려있다. “잠은 금 혹은 도금한 것을 쓰는데, 진주 및 잡색 랄주로 꾸미거나 가주를 쓴다.(箴, 用金或鍍金, 以珍珠及雜色剌珠飾之, 或用假珠.)”라고 하였고, “채는 금 혹은 도금한 것을 쓰는데, 진주로 꾸민다. 염발기의 수식이다.(釵, 用金或鍍金, 以珍珠飾之, 斂髮妓首飾.)”라고 하였다. 염발기란 머리를 올린 연장기(年壯妓)를 말한다. 머리를 올리지 않은 연소기(年少妓)도 있었는데, 연소기는 채를 꽂지 않았다. 잠은 길이가 1尺 2寸이고, 채는 길이가 2寸 6分으로 잠의 길이가 훨씬 길다. 『[[악학궤범]]』 권2 '정전예연여기악공배립'에 따르면, 곡연(曲宴)·무과전시(武科殿試)·관사(觀射)·관나(觀儺)·사신동궁연(使臣東宮宴) 등의 연향에서 여기들은 “흑장삼· 남색 저고리를 입고, 칠보잠·금채를 꽂고, 홍대를 두르고 백말군을 입고 단혜아를 신는다. 연소기는 금채, 홍대를 빼고 칠보대요, 마리사기, 남단대를 더한다.(黑長衫·藍赤古里·七寶替·金釵·紅帶·白抹裙·段鞋兒, 年少妓, 則除金釵·紅帶, 加七寶臺腰·首沙只·藍段帶.)”라고 하였다. | * 성종 24년(1493)에 편찬된 『[[악학궤범]]』 권9 '[[여기복식]]'에는 잠의 도설이 실려있다. “잠은 금 혹은 도금한 것을 쓰는데, 진주 및 잡색 랄주로 꾸미거나 가주를 쓴다.(箴, 用金或鍍金, 以珍珠及雜色剌珠飾之, 或用假珠.)”라고 하였고, “채는 금 혹은 도금한 것을 쓰는데, 진주로 꾸민다. 염발기의 수식이다.(釵, 用金或鍍金, 以珍珠飾之, 斂髮妓首飾.)”라고 하였다. 염발기란 머리를 올린 연장기(年壯妓)를 말한다. 머리를 올리지 않은 연소기(年少妓)도 있었는데, 연소기는 채를 꽂지 않았다. 잠은 길이가 1尺 2寸이고, 채는 길이가 2寸 6分으로 잠의 길이가 훨씬 길다. 『[[악학궤범]]』 권2 '정전예연여기악공배립'에 따르면, 곡연(曲宴)·무과전시(武科殿試)·관사(觀射)·관나(觀儺)·사신동궁연(使臣東宮宴) 등의 연향에서 여기들은 “흑장삼· 남색 저고리를 입고, 칠보잠·금채를 꽂고, 홍대를 두르고 백말군을 입고 단혜아를 신는다. 연소기는 금채, 홍대를 빼고 칠보대요, 마리사기, 남단대를 더한다.(黑長衫·藍赤古里·七寶替·金釵·紅帶·白抹裙·段鞋兒, 年少妓, 則除金釵·紅帶, 加七寶臺腰·首沙只·藍段帶.)”라고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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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잠과 채==== | ====조선후기 잠과 채==== | ||
− | *『인조장렬왕후가례도감의궤』 '가례의대식포진질'에는 임인년(1602) 인목왕후 가례 시 감한 물목이 기록되어 있는데, 옥바탕칠보장금장잠, 가칠보장금장잠, 가칠보장은도금장잠, 진주장금채, 진주장은도금채 | + | *『인조장렬왕후가례도감의궤』 '가례의대식포진질'에는 임인년(1602) 인목왕후 가례 시 감한 물목이 기록되어 있는데, 옥바탕칠보장금장잠, 가칠보장금장잠, 가칠보장은도금장잠, 진주장금채, 진주장은도금채 등을 통해 조선전기 왕실 가례 시 사용했던 수식의 종류를 짐작할 수 있다.<ref>오선희, 『조선시대 궁중 대례용(大禮用) 수식(首飾) 제도의 성립과 변천』,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9, 78쪽.</ref> |
− | *『국혼정례』 편찬 이전 세자빈 『가례도감의궤』에는 ‘옥바탕칠보장금장잠’과 | + | *『국혼정례』 편찬 이전 세자빈 『가례도감의궤』에는 ‘옥바탕칠보장금장잠’과 ‘진주장금채’가 기록되어있다. ‘옥바탕칠보장금장잠’에 사용된 재료는 영친왕비의 진주장잠에 사용된 재료와 같다. ‘진주장금채’에는 대진주 5개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악학궤범]]』 권9 ‘[[여기복식]]’의 채와 유사한 모양으로 생각된다. |
*『국혼정례』 편찬 이전 왕녀 『가례등록』에는 ‘가칠보장금장잠’과 ‘진주장금채’라는 명칭이 기록되어있다. | *『국혼정례』 편찬 이전 왕녀 『가례등록』에는 ‘가칠보장금장잠’과 ‘진주장금채’라는 명칭이 기록되어있다. | ||
− | *혼례의 풍속이 사치로 흐르는 것을 우려하여 영조 대에 『국혼정례』를 편찬한 이후 왕비, 세자빈, 세손빈 가례 시 | + | *혼례의 풍속이 사치로 흐르는 것을 우려하여 영조 대에 『국혼정례』를 편찬한 이후 왕비, 세자빈, 세손빈 가례 시 흑각잠만 사용하게 된다. |
− | *정미년(1847), 임오년(1882), 병오년(1906) | + | *정미년(1847), 임오년(1882), 병오년(1906) 가례를 기록한 『궁중발기』에 수식칠보의 구성품으로 ‘옥장잠’과 ‘진주동곳’이 등장한다. |
− | *수식칠보 구성품은 영친왕비 수식까지 동일하게 이어진다. 영친왕비의 진주장잠과 진주동곳 유물을 통해 수식칠보의 | + | *수식칠보 구성품은 영친왕비 수식까지 동일하게 이어진다. 영친왕비의 진주장잠과 진주동곳 유물을 통해 수식칠보의 실제를 확인할 수 있다. |
− | *조선전기부터 사용되어 온 잠과 채는 조선후기 세자빈과 왕녀의 가례에서 사용되다가 『국혼정례』의 규례로 축소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궁중발기』에 기록된 | + | *조선전기부터 사용되어 온 잠과 채는 조선후기 세자빈과 왕녀의 가례에서 사용되다가 『국혼정례』의 규례로 축소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궁중발기』에 기록된 수식칠보로 재탄생하여 영친왕비 수식의 형태로 완성된다.<ref>오선희, 『조선시대 궁중 대례용(大禮用) 수식(首飾) 제도의 성립과 변천』,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9, 173쪽.</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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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영친왕비 진주장잠과 진주동곳 || [[잠과 채]] || A와 B는 서로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 | | 영친왕비 진주장잠과 진주동곳 || 『[[악학궤범]]』 [[잠과 채]] || A와 B는 서로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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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연부인 초상 || 무주 백산서원 || A는 B에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 하연부인 초상 || 무주 백산서원 || A는 B에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2020년 12월 23일 (수) 00:30 기준 최신판
잠과 채 (簪과 釵) |
|
대표명칭 | 잠과 채 |
---|---|
한자표기 | 簪과 釵 |
이칭별칭 | 비녀 |
구분 | 수식 |
착용신분 | 명부, 여기 |
착용성별 | 여자 |
목차
정의
잠(簪)과 채(釵)는 비녀의 한 종류로, 잠은 머리에 꽂는 부분이 한 가닥으로 된 것을 말하고, 채는 꽂는 부분이 두 가닥으로 된 것을 말한다.
내용
조선전기 잠과 채
- 세조 6년(1460) 세자빈(장순왕후)에게 보낸 납징예물 중 수식(首飾) 목록은 다음과 같다.
“수식은 독대요마리사기[禿臺腰首紗只] 1개, 【수식(首飾)은 채단(彩段)으로써 이를 만드는데, 수질(首絰)과 같이 만들고 주옥(珠玉)으로써 꾸미며 뒤로 긴 영자(纓子) 8줄을 드리운다. 주옥(珠玉)이 없이 꾸미는 것을 시속(時俗)에서 독대요(禿臺腰)라 이른다.】 수파(首帕)·체장잠(髢長箴)·원잠(圓箴)이고,…….”[1] 예종과 장순왕후의 가례 시 수파 등을 사용해 세자빈의 머리모양을 만들고, 대요, 마리사기, 체장잠, 원잠으로 장식하였을 것이다.
- 하연부인(1380~1465)은 『악학궤범』 권9 '여기복식'에 실린 잠과 비슷한 형태의 비녀를 머리 중심에 수직으로 꽂고, 『악학궤범』 권9 '여기복식'에 실린 채와 비슷한 형태의 비녀를 앞에서 뒤를 향해 꽂은 것으로 보인다.
- 성종 24년(1493)에 편찬된 『악학궤범』 권9 '여기복식'에는 잠의 도설이 실려있다. “잠은 금 혹은 도금한 것을 쓰는데, 진주 및 잡색 랄주로 꾸미거나 가주를 쓴다.(箴, 用金或鍍金, 以珍珠及雜色剌珠飾之, 或用假珠.)”라고 하였고, “채는 금 혹은 도금한 것을 쓰는데, 진주로 꾸민다. 염발기의 수식이다.(釵, 用金或鍍金, 以珍珠飾之, 斂髮妓首飾.)”라고 하였다. 염발기란 머리를 올린 연장기(年壯妓)를 말한다. 머리를 올리지 않은 연소기(年少妓)도 있었는데, 연소기는 채를 꽂지 않았다. 잠은 길이가 1尺 2寸이고, 채는 길이가 2寸 6分으로 잠의 길이가 훨씬 길다. 『악학궤범』 권2 '정전예연여기악공배립'에 따르면, 곡연(曲宴)·무과전시(武科殿試)·관사(觀射)·관나(觀儺)·사신동궁연(使臣東宮宴) 등의 연향에서 여기들은 “흑장삼· 남색 저고리를 입고, 칠보잠·금채를 꽂고, 홍대를 두르고 백말군을 입고 단혜아를 신는다. 연소기는 금채, 홍대를 빼고 칠보대요, 마리사기, 남단대를 더한다.(黑長衫·藍赤古里·七寶替·金釵·紅帶·白抹裙·段鞋兒, 年少妓, 則除金釵·紅帶, 加七寶臺腰·首沙只·藍段帶.)”라고 하였다.
- 명부와 염발기(斂髮妓)의 수식으로 잠과 채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 잠과 채
- 『인조장렬왕후가례도감의궤』 '가례의대식포진질'에는 임인년(1602) 인목왕후 가례 시 감한 물목이 기록되어 있는데, 옥바탕칠보장금장잠, 가칠보장금장잠, 가칠보장은도금장잠, 진주장금채, 진주장은도금채 등을 통해 조선전기 왕실 가례 시 사용했던 수식의 종류를 짐작할 수 있다.[2]
- 『국혼정례』 편찬 이전 세자빈 『가례도감의궤』에는 ‘옥바탕칠보장금장잠’과 ‘진주장금채’가 기록되어있다. ‘옥바탕칠보장금장잠’에 사용된 재료는 영친왕비의 진주장잠에 사용된 재료와 같다. ‘진주장금채’에는 대진주 5개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악학궤범』 권9 ‘여기복식’의 채와 유사한 모양으로 생각된다.
- 『국혼정례』 편찬 이전 왕녀 『가례등록』에는 ‘가칠보장금장잠’과 ‘진주장금채’라는 명칭이 기록되어있다.
- 혼례의 풍속이 사치로 흐르는 것을 우려하여 영조 대에 『국혼정례』를 편찬한 이후 왕비, 세자빈, 세손빈 가례 시 흑각잠만 사용하게 된다.
- 정미년(1847), 임오년(1882), 병오년(1906) 가례를 기록한 『궁중발기』에 수식칠보의 구성품으로 ‘옥장잠’과 ‘진주동곳’이 등장한다.
- 수식칠보 구성품은 영친왕비 수식까지 동일하게 이어진다. 영친왕비의 진주장잠과 진주동곳 유물을 통해 수식칠보의 실제를 확인할 수 있다.
- 조선전기부터 사용되어 온 잠과 채는 조선후기 세자빈과 왕녀의 가례에서 사용되다가 『국혼정례』의 규례로 축소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궁중발기』에 기록된 수식칠보로 재탄생하여 영친왕비 수식의 형태로 완성된다.[3]
지식관계망
클래스
- Actor-인물 : 하연
- Actor-인물 : 하연부인
- Actor-인물 : 이조년
- Actor-인물 : 세종
- Actor-인물 : 예종
- Actor-인물 : 장순왕후
- Clothing-복식 : 잠과 채
- Record-문헌 : 『조선왕조실록』
- Record-문헌 : 『악학궤범』
- Record-문헌 : 『가례도감의궤』
- Record-문헌 : 『가례등록』
- Record-문헌 : 『국혼정례』
- Record-문헌 : 『궁중발기』
- Record-그림 : 하연부인 초상
- Object-유물 : 영친왕비 진주장잠
- Object-유물 : 영친왕비 진주동곳
- Place-소장처 : 무주 백산서원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예종 | 장순왕후 | A의 아내는 B이다 | A ekc:hasWife B |
장순왕후 | 체장잠 | A는 B를 착용하였다 | A ekc:wears B |
『조선왕조실록』 | 잠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하연부인 초상 | 잠과 채 | A는 B를 묘사하였다 | A ekc:depicts B |
『악학궤범』 | 잠과 채 | A는 B를 묘사하였다 | A ekc:depicts B |
성종 | 『악학궤범』 | A와 B는 서로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세자빈 『가례도감의궤』 | 옥바탕칠보장금장잠과 진주장금채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왕녀 『가례등록』 | 가칠보장금장잠과 진주장금채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궁중발기』 | 수식칠보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수식칠보 | 옥장잠과 진주동곳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옥장잠과 진주동곳 | 『악학궤범』 잠과 채 | A와 B는 서로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영친왕비 진주장잠과 진주동곳 | 『악학궤범』 잠과 채 | A와 B는 서로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하연부인 초상 | 무주 백산서원 | A는 B에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네트워크 그래프
└☞ 본 네트워크 그래프에서 사용된 아이콘 이미지는 '한국 문화 엔사이브'의 아이콘 모음 자료를 활용하였다.
시각자료
갤러리
『악학궤범』 권9 「女妓服飾」 '잠(箴)'.[4]
『악학궤범』 권9 「女妓服飾」 '채(釵)'.[5]
영친왕비 진주장잠.[6]
영친왕비 진주동곳.[7]
주석
- ↑ 『세조실록』 20권, 세조 6년 4월 9일 을묘 1번째기사 1460년 명 천순(天順) 4년.
- ↑ 오선희, 『조선시대 궁중 대례용(大禮用) 수식(首飾) 제도의 성립과 변천』,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9, 78쪽.
- ↑ 오선희, 『조선시대 궁중 대례용(大禮用) 수식(首飾) 제도의 성립과 변천』,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9, 173쪽.
- ↑ 국립국악원, 『樂學軌範』, 호사문고 소장본, 2011, 441쪽.
- ↑ 국립국악원, 『樂學軌範』, 호사문고 소장본, 2011, 442쪽.
- ↑ 국립고궁박물관, 『영친왕 일가 복식』, 2010, 256쪽.
- ↑ 국립고궁박물관, 『영친왕 일가 복식』, 2010, 286쪽.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 『악학궤범』
- 『가례도감의궤』
- 『가례등록』
- 『궁중발기』
- 국립고궁박물관, 『영친왕 일가 복식』, 2010.
- 국립국악원, 『樂學軌範』, 호사문고 소장본, 2011.
- 오선희, 『조선시대 궁중 대례용(大禮用) 수식(首飾) 제도의 성립과 변천』,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