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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정의'''==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 공산군이 남북군사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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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과정'''== | =='''사건 과정'''== | ||
당시 북한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에 군사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1949년 3월 17일 소련과 북한은 조소군사비밀협정, 그 다음 날인 3월 18일엔 중공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였다. 이후 38선에 북한군 10개 사단 13만명이 배치되었고 10만명의 예비군까지 후방에 조직되었다. | 당시 북한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에 군사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1949년 3월 17일 소련과 북한은 조소군사비밀협정, 그 다음 날인 3월 18일엔 중공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였다. 이후 38선에 북한군 10개 사단 13만명이 배치되었고 10만명의 예비군까지 후방에 조직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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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을 기해 전면 남침을 개시하였다. 그 날이 일요일이었기에 미국의 군사체계를 따르는 우리 군은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따라서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했다. 이후 전세가 밀릴 것이라 생각한 [[이승만]] 대통령은 6월 27일 새벽2시 특별 열차편으로 서울을 빠져나가 대전으로 피난하였다. 그 후 라디오 방송으로 국민들에게 안심하라는 방송을 하였고 방송을 들은 서울 시민들은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28일 0시 이미 서울 인근 미아리 전투를 소리를 듣고 후퇴를 시작하였다. 한국군도 전황이 밀리는 상황이라 일단 후퇴해서 한강이남이나 혹은 더 남쪽에 방어선을 구축하기로 결정하고 후퇴를 시작한다. 하지만 6월 28일 새벽 2시 방송이 시작된지 5시간만에 한국군이 민간인과 자신들의 후퇴로인 한강대교와 한강철교를 스스로 폭파했다([[한강 인도교 폭파사건]]). 이 사건으로 수많은 민간인과 군인이 폭사 또는 익사하였다. 이 사건은 한 국가의 대표가 홀로 도망쳐놓고 마치 서울에 있는 것처럼 거짓말을 하여 국민을 기만하였고 군사적으로나 인도적으로나 명백히 적지 않은 피해를 발생시켰던, 당시 정권의 큰 과오로 꼽힌다. | 결국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을 기해 전면 남침을 개시하였다. 그 날이 일요일이었기에 미국의 군사체계를 따르는 우리 군은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따라서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했다. 이후 전세가 밀릴 것이라 생각한 [[이승만]] 대통령은 6월 27일 새벽2시 특별 열차편으로 서울을 빠져나가 대전으로 피난하였다. 그 후 라디오 방송으로 국민들에게 안심하라는 방송을 하였고 방송을 들은 서울 시민들은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28일 0시 이미 서울 인근 미아리 전투를 소리를 듣고 후퇴를 시작하였다. 한국군도 전황이 밀리는 상황이라 일단 후퇴해서 한강이남이나 혹은 더 남쪽에 방어선을 구축하기로 결정하고 후퇴를 시작한다. 하지만 6월 28일 새벽 2시 방송이 시작된지 5시간만에 한국군이 민간인과 자신들의 후퇴로인 한강대교와 한강철교를 스스로 폭파했다([[한강 인도교 폭파사건]]). 이 사건으로 수많은 민간인과 군인이 폭사 또는 익사하였다. 이 사건은 한 국가의 대표가 홀로 도망쳐놓고 마치 서울에 있는 것처럼 거짓말을 하여 국민을 기만하였고 군사적으로나 인도적으로나 명백히 적지 않은 피해를 발생시켰던, 당시 정권의 큰 과오로 꼽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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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6월 28일 서울은 북한군에게 점령당하고 만다. 전쟁 시작 3일만에 적에게 수도를 빼앗긴 것이다. 이른 한강대교 폭파로 많은 병력과 물자를 잃은 국군은 지연전을 펴면서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였고 대한민국 정부는 대전, 대구를 거쳐 부산을 임시 수도로 정하였다. 그리고 국군과 국제 연합군은 낙동강 일대에 최후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이에 북한은 9월까지 대공세를 펼쳤으나 국군과 UN군은 방어선을 사수하는 데 성공했고 이 곳에서 전선이 고착되게 된다. 당시 인민군은 길어진 보급로와 계속되는 전투, 그리고 연합군이 미친듯이 쏟아부은 폭격으로 인해 정예부대의 전투력이 크게 고갈된 상태였다. | 결국 6월 28일 서울은 북한군에게 점령당하고 만다. 전쟁 시작 3일만에 적에게 수도를 빼앗긴 것이다. 이른 한강대교 폭파로 많은 병력과 물자를 잃은 국군은 지연전을 펴면서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였고 대한민국 정부는 대전, 대구를 거쳐 부산을 임시 수도로 정하였다. 그리고 국군과 국제 연합군은 낙동강 일대에 최후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이에 북한은 9월까지 대공세를 펼쳤으나 국군과 UN군은 방어선을 사수하는 데 성공했고 이 곳에서 전선이 고착되게 된다. 당시 인민군은 길어진 보급로와 계속되는 전투, 그리고 연합군이 미친듯이 쏟아부은 폭격으로 인해 정예부대의 전투력이 크게 고갈된 상태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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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당시 유엔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전황을 일거에 뒤집을 수 있는 적 후방으로의 상륙작전을 원했다. 여러 후보지가 물색 되었지만 결국 여러 반대를 물리치고 적군이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을 이유로 인천이 상륙지로 최종 결정되었다. 맥아더의 예상대로 인천의 적 방비태세는 엉성하기 짝이 없었고, 9월 15일 새벽부터 개시한 상륙작전에서 유엔군은 약 2,000명밖에 되지 않은 적을 쉽게 제압하고 인천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약 3일 후부터 유엔군은 김포와 영등포 두 방향으로 진출, 서울을 포위하기 시작했고, 9월 28일에는 서울을 완전히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국군은 10월 1일 3.8선을 넘어 10월 19일에는 평양을 점령하였고 이후 계속해서 북진을 하여 북한에게 남은 영토는 거의 없었다. 이 때 국군과 UN군은 크리스마스 이전에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 그러던 중 당시 유엔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전황을 일거에 뒤집을 수 있는 적 후방으로의 상륙작전을 원했다. 여러 후보지가 물색 되었지만 결국 여러 반대를 물리치고 적군이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을 이유로 인천이 상륙지로 최종 결정되었다. 맥아더의 예상대로 인천의 적 방비태세는 엉성하기 짝이 없었고, 9월 15일 새벽부터 개시한 상륙작전에서 유엔군은 약 2,000명밖에 되지 않은 적을 쉽게 제압하고 인천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약 3일 후부터 유엔군은 김포와 영등포 두 방향으로 진출, 서울을 포위하기 시작했고, 9월 28일에는 서울을 완전히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국군은 10월 1일 3.8선을 넘어 10월 19일에는 평양을 점령하였고 이후 계속해서 북진을 하여 북한에게 남은 영토는 거의 없었다. 이 때 국군과 UN군은 크리스마스 이전에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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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0월 중순 이후부터 인해전술로 알려진 중공군의 대공습이 시작되었다. 사람수만 많을 뿐 아니라 많은 병사가 중일전쟁 참전 경력을 가지고 있던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국군과 UN군은 후퇴하기 시작했고 결국 1월 4일에는 다시 서울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 때 UN군은 금강까지 빼앗길 경우 한반도를 포기하는 것까지 고려했다고 한다. 그런데 북위 37도선까지 내려왔던 중국이 한 달간 진격을 멈추는 사건이 발생했다. 중공측의 보급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이후에는 UN군이 전력을 수습하고 반격을 시작하여 3월경 다시 서울을 재탈환하였고 전선은 처음 전쟁을 시작한 38선 부근까지 올라가게 된다. 이후 1951년 7월부터 휴전 회담이 시작되면서 양측은 38선을 사이에 두고 고지전만을 벌이게 된다. 그리고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이루어졌고 10시를 기해 모든 전투가 중지되며 한국전쟁은 끝이났다. | 하지만 10월 중순 이후부터 인해전술로 알려진 중공군의 대공습이 시작되었다. 사람수만 많을 뿐 아니라 많은 병사가 중일전쟁 참전 경력을 가지고 있던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국군과 UN군은 후퇴하기 시작했고 결국 1월 4일에는 다시 서울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 때 UN군은 금강까지 빼앗길 경우 한반도를 포기하는 것까지 고려했다고 한다. 그런데 북위 37도선까지 내려왔던 중국이 한 달간 진격을 멈추는 사건이 발생했다. 중공측의 보급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이후에는 UN군이 전력을 수습하고 반격을 시작하여 3월경 다시 서울을 재탈환하였고 전선은 처음 전쟁을 시작한 38선 부근까지 올라가게 된다. 이후 1951년 7월부터 휴전 회담이 시작되면서 양측은 38선을 사이에 두고 고지전만을 벌이게 된다. 그리고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이루어졌고 10시를 기해 모든 전투가 중지되며 한국전쟁은 끝이났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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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결과'''== | ||
+ | 전쟁 기간 동안 국군의 피해자는 전사, 부상, 실종을 합해 약 62만명이며 UN군 역시 약 15만명의 피해를 입었다.<br/> | ||
+ | 민간인 피해 또한 엄청났다. 남한 측 민간인 사망자는 24만 5천여명, 학살된 민간인은 약 13만명, 납치 약 8만 5천명, 실종 30만명으로 총 약 100만명의 민간인이 피해를 입었다.<br/> | ||
+ | 또한 전쟁으로 인해 남과 북으로 헤어진 이산가족 수가 1000만명으로 추정된다. 이는 당시 인구의 절반 정도이다.<br/> | ||
+ | 전쟁은 사회적, 경제적 피해도 가져왔다. 남한의 제조업은 1949년 대비 49%가 파괴되었고 북한 역시 공업의 60%가 파괴되었다. 이 뿐만 아니라 개인 가옥을 포함해 도로, 철도, 항만, 교량 등 여러 공공시설도 파괴되어 사회, 경제 체제의 기반과 국민의 생활터전이 황폐화되었다. |
2019년 6월 25일 (화) 22:46 판
정의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 공산군이 남북군사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한반도에서의 전쟁이다.
사건 과정
당시 북한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에 군사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1949년 3월 17일 소련과 북한은 조소군사비밀협정, 그 다음 날인 3월 18일엔 중공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였다. 이후 38선에 북한군 10개 사단 13만명이 배치되었고 10만명의 예비군까지 후방에 조직되었다.
결국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을 기해 전면 남침을 개시하였다. 그 날이 일요일이었기에 미국의 군사체계를 따르는 우리 군은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따라서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했다. 이후 전세가 밀릴 것이라 생각한 이승만 대통령은 6월 27일 새벽2시 특별 열차편으로 서울을 빠져나가 대전으로 피난하였다. 그 후 라디오 방송으로 국민들에게 안심하라는 방송을 하였고 방송을 들은 서울 시민들은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28일 0시 이미 서울 인근 미아리 전투를 소리를 듣고 후퇴를 시작하였다. 한국군도 전황이 밀리는 상황이라 일단 후퇴해서 한강이남이나 혹은 더 남쪽에 방어선을 구축하기로 결정하고 후퇴를 시작한다. 하지만 6월 28일 새벽 2시 방송이 시작된지 5시간만에 한국군이 민간인과 자신들의 후퇴로인 한강대교와 한강철교를 스스로 폭파했다(한강 인도교 폭파사건). 이 사건으로 수많은 민간인과 군인이 폭사 또는 익사하였다. 이 사건은 한 국가의 대표가 홀로 도망쳐놓고 마치 서울에 있는 것처럼 거짓말을 하여 국민을 기만하였고 군사적으로나 인도적으로나 명백히 적지 않은 피해를 발생시켰던, 당시 정권의 큰 과오로 꼽힌다.
결국 6월 28일 서울은 북한군에게 점령당하고 만다. 전쟁 시작 3일만에 적에게 수도를 빼앗긴 것이다. 이른 한강대교 폭파로 많은 병력과 물자를 잃은 국군은 지연전을 펴면서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였고 대한민국 정부는 대전, 대구를 거쳐 부산을 임시 수도로 정하였다. 그리고 국군과 국제 연합군은 낙동강 일대에 최후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이에 북한은 9월까지 대공세를 펼쳤으나 국군과 UN군은 방어선을 사수하는 데 성공했고 이 곳에서 전선이 고착되게 된다. 당시 인민군은 길어진 보급로와 계속되는 전투, 그리고 연합군이 미친듯이 쏟아부은 폭격으로 인해 정예부대의 전투력이 크게 고갈된 상태였다.
그러던 중 당시 유엔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전황을 일거에 뒤집을 수 있는 적 후방으로의 상륙작전을 원했다. 여러 후보지가 물색 되었지만 결국 여러 반대를 물리치고 적군이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을 이유로 인천이 상륙지로 최종 결정되었다. 맥아더의 예상대로 인천의 적 방비태세는 엉성하기 짝이 없었고, 9월 15일 새벽부터 개시한 상륙작전에서 유엔군은 약 2,000명밖에 되지 않은 적을 쉽게 제압하고 인천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약 3일 후부터 유엔군은 김포와 영등포 두 방향으로 진출, 서울을 포위하기 시작했고, 9월 28일에는 서울을 완전히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국군은 10월 1일 3.8선을 넘어 10월 19일에는 평양을 점령하였고 이후 계속해서 북진을 하여 북한에게 남은 영토는 거의 없었다. 이 때 국군과 UN군은 크리스마스 이전에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하지만 10월 중순 이후부터 인해전술로 알려진 중공군의 대공습이 시작되었다. 사람수만 많을 뿐 아니라 많은 병사가 중일전쟁 참전 경력을 가지고 있던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국군과 UN군은 후퇴하기 시작했고 결국 1월 4일에는 다시 서울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 때 UN군은 금강까지 빼앗길 경우 한반도를 포기하는 것까지 고려했다고 한다. 그런데 북위 37도선까지 내려왔던 중국이 한 달간 진격을 멈추는 사건이 발생했다. 중공측의 보급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이후에는 UN군이 전력을 수습하고 반격을 시작하여 3월경 다시 서울을 재탈환하였고 전선은 처음 전쟁을 시작한 38선 부근까지 올라가게 된다. 이후 1951년 7월부터 휴전 회담이 시작되면서 양측은 38선을 사이에 두고 고지전만을 벌이게 된다. 그리고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이루어졌고 10시를 기해 모든 전투가 중지되며 한국전쟁은 끝이났다.
결과
전쟁 기간 동안 국군의 피해자는 전사, 부상, 실종을 합해 약 62만명이며 UN군 역시 약 15만명의 피해를 입었다.
민간인 피해 또한 엄청났다. 남한 측 민간인 사망자는 24만 5천여명, 학살된 민간인은 약 13만명, 납치 약 8만 5천명, 실종 30만명으로 총 약 100만명의 민간인이 피해를 입었다.
또한 전쟁으로 인해 남과 북으로 헤어진 이산가족 수가 1000만명으로 추정된다. 이는 당시 인구의 절반 정도이다.
전쟁은 사회적, 경제적 피해도 가져왔다. 남한의 제조업은 1949년 대비 49%가 파괴되었고 북한 역시 공업의 60%가 파괴되었다. 이 뿐만 아니라 개인 가옥을 포함해 도로, 철도, 항만, 교량 등 여러 공공시설도 파괴되어 사회, 경제 체제의 기반과 국민의 생활터전이 황폐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