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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16일 (일) 03:15 판
정의
1953년~1969년 종로일대에 있었던 음악감상실.
내용
세시봉은 1953년 서울 명동에서 처음 문을 열었다. 최초 주인이 누구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 후 이흥원씨가 인수해 충무로 1가와 소공동을 거쳐 서린동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에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세시봉 시대'를 열게 된다.
세시봉이 대학생 문화공간으로 자리 잡게 된 데에는 주인 이흥원씨의 역할이 컸다. 세시봉을 운영하는 그의 철학은 확고했다. 술은 절대 반입 금지였다. 술 취한 사람도, 주먹 쓰는 사람도 출입 금지였다. 평안도 출신이었던 그는 육척 장신이었다. 장대 걸레를 팔목 힘으로 드는 사람이었다. 간혹 술 취한 이가 입장하려 하거나 난동을 피우려는 사람이 있다. 그럴 때 이흥원씨가 "메야? 술 먹었어? 나가라우"라고 말하면 상황 종료였다.
다양한 프로그램도 적극적으로 수용해 다른 음악감상실들을 압도했다. 명동엔 심지다방과 황실다방, 시보네가, 무교동엔 연다방이, 광화문 인근엔 아카데미 음악감상실과 금란다방이, 종로엔 디쉐네와 르네상스, 아폴로 등의 음악감상실이 서로 경쟁하던 시절이었다. 이중 세시봉만큼 많은 프로그램을 보유한 곳이 없었다. [1]
1953년 명동에서 문을 연 세시봉은 충무로1가와 소공동을 거쳐 서린동으로 옮겨와 전성기를 누렸다. 서린동 시절의 세시봉 입구와 간판
1968년 당시 세시봉은 대학생들의 천국이었다. 입구에서 30원을 주고 입장권을 받으면, 문 앞에서 반을 떼고 나머지 반을 음료권으로 사용했다. 음료권으로 오렌지 주스, 계란 반숙, 우유, 일본 유산균 음료 칼피스, 홍차 등을 받아 들고 자리에 앉으면 그것으로 세시봉을 즐길 준비 완료였다. 그날그날 프로그램이 달랐으니, 매일 와도 질리지 않았다. 주 손님이 대학생이어서 프로그램도 일찍 시작했다. 오후 5시부터 7시가 절정이었고 보통 오후 10시면 문을 닫았다.
당시 이름난 밴드들의 공연을 보는 즐거움도 컸다. 세시봉은 다른 음악감상실과의 차별화를 위해 자주 라이브 무대를 기획했다. 이를 위해 미 8군 무대에 섰던 밴드들을 적극 무대에 세웠다.
세시봉은 여러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도 음악감상실의 본분을 잃지 않았다. 당연히 DJ의 역할이 컸다. DBS 동아방송의 '탑튠쇼' '세 시의 다이얼'을 진행했던 최동욱, 수필가 피천득의 큰 아들 피세영,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 '쇼쇼쇼'와 '브라보 선데이'을 연출한 조용호 등이 세시봉 초기의 인기를 몰았다. 내가 드나들 무렵엔 이흥원의 외아들이자 TBC와 KBS PD를 지냈던 이선권, 현재 명동예술극장 극장장인 구자흥 등이 돌아가며 DJ를 맡았다. [2]
멀티미디어
이미지
동영상
전자지도
네트워크 그래프
참고문헌
기여
주석
- ↑ 윤형주 칼럼, 세시봉, 우리들의 이야기 #13 한국 초유 누드 퍼포먼스 하던 날… 관객들 입이 떡, 박수도 잊어 : 청년문화 집결소 세시봉
- ↑ 윤형주 칼럼, 세시봉, 우리들의 이야기 #14 밴드 싱어 서수남에 환호하고, 대한민국 첫 MC 이상벽에 배꼽 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