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 선평만가(船坪晩稼)"의 두 판 사이의 차이
DH 교육용 위키
(새 문서: 216. 선평만가(船坪晩稼) 東到船坪聽野謳동쪽의 선두평엔 들노래가 들리나니, 年年晩稼早登秋해마다 늦게 심지만 일찍이 추수하네. 閔堤...) |
|||
1번째 줄: | 1번째 줄: | ||
216. 선평만가(船坪晩稼) | 216. 선평만가(船坪晩稼) | ||
− | |||
− | |||
− | |||
− | |||
− | |||
− | |||
− | |||
− | + | <big>東到船坪聽野'''謳''' (<small>동도선평청야'''구'''</small>) 동쪽의 선두평엔 들노래가 들리나니, <br />年年晩稼早登'''秋''' (<small>년년만가조등'''추'''</small>) 해마다 늦게 심지만 일찍이 추수하네.<br />閔堤洪匣皆恩澤 (<small>민제홍갑개은택</small>) 민유수의 제방과 홍유수의 갑문이 모두 은택 끼쳤으니,<br />永與長江水共'''流''' (<small>영여장강수공'''류'''</small>) 영원토록 저 긴 강물과 함께 흐르리.<br /> | |
+ | |||
+ | </big> | ||
+ | |||
+ | ○ 선평(船坪)은 곧 선두포(船頭浦)이다. 늦은 벼 역시 본부 십경 중의 하나이다. 숙종 병술년(1706)에 유수 민진원(閔鎭遠)이 | ||
+ | 포구의 제방을 쌓아 들판을 만들었고, 철종 임술년(1862)에 유수 홍원섭(洪遠爕)이 또 제방 내에 큰 수문을 만들자 포구의 백성들이 | ||
+ | 신뢰하여 비를 세우고는 ʻ민공의 옛제방이고 홍공의 새로운 갑문이다ʼ라고 하였다. | ||
+ | |||
+ | |||
+ | ==인물== | ||
+ | * 민진원(1664∼1736)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성유(聖猷), 호는 단암(丹巖)·세심(洗心). 1705년과 1710년 두 차례 강화유수를 지냈다. | ||
+ | * 홍원섭(1798∼?)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이강(而剛). 1862년 강화유수를 역임하였다. | ||
+ | |||
+ | ==참고== | ||
+ | * 원문에는 숙종 병인년(1686)으로 되어 있으나, 병술년(1706)의 오류로 생각된다. 선두포에 제방을 쌓은 공사의 시말은 적어 1707년에 세운 '선두포 | ||
축언시말비(船頭浦築堰始末碑)'가 화도면 사기리 비석군에 있다. | 축언시말비(船頭浦築堰始末碑)'가 화도면 사기리 비석군에 있다. | ||
− | + | * 수문 설치공사의 시말을 적은 1863년에 세운 '중수문비(中水門碑)'가 화도면 사기리에 있다. | |
− | + | ||
− | + |
2019년 6월 3일 (월) 21:30 판
216. 선평만가(船坪晩稼)
東到船坪聽野謳 (동도선평청야구) 동쪽의 선두평엔 들노래가 들리나니,
年年晩稼早登秋 (년년만가조등추) 해마다 늦게 심지만 일찍이 추수하네.
閔堤洪匣皆恩澤 (민제홍갑개은택) 민유수의 제방과 홍유수의 갑문이 모두 은택 끼쳤으니,
永與長江水共流 (영여장강수공류) 영원토록 저 긴 강물과 함께 흐르리.
○ 선평(船坪)은 곧 선두포(船頭浦)이다. 늦은 벼 역시 본부 십경 중의 하나이다. 숙종 병술년(1706)에 유수 민진원(閔鎭遠)이 포구의 제방을 쌓아 들판을 만들었고, 철종 임술년(1862)에 유수 홍원섭(洪遠爕)이 또 제방 내에 큰 수문을 만들자 포구의 백성들이 신뢰하여 비를 세우고는 ʻ민공의 옛제방이고 홍공의 새로운 갑문이다ʼ라고 하였다.
인물
- 민진원(1664∼1736)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성유(聖猷), 호는 단암(丹巖)·세심(洗心). 1705년과 1710년 두 차례 강화유수를 지냈다.
- 홍원섭(1798∼?)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이강(而剛). 1862년 강화유수를 역임하였다.
참고
- 원문에는 숙종 병인년(1686)으로 되어 있으나, 병술년(1706)의 오류로 생각된다. 선두포에 제방을 쌓은 공사의 시말은 적어 1707년에 세운 '선두포
축언시말비(船頭浦築堰始末碑)'가 화도면 사기리 비석군에 있다.
- 수문 설치공사의 시말을 적은 1863년에 세운 '중수문비(中水門碑)'가 화도면 사기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