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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eta Data == | | == Meta Data == |
| * 타입: 사건 | | * 타입: 사건 |
− | * 한글명칭: 을사사화 | + | * 한글항목명: 을사사화 |
− | * 한자명칭: 乙巳士禍 | + | * 한자항목명: 乙巳士禍 |
− | * 시대: 조선시대
| + | * 편자: [[자운서원팀KU|자운서원팀]] [http://kadhlab102.com/wiki/index.php/201410315%EC%98%A4%EC%9C%A4%EB%AF%B8 오윤미], [[자운서원팀 KU|자운서원팀]] [http://kadhlab102.com/wiki/index.php/User:201410320_%EC%9D%B4%EC%A7%80%EB%AF%BC 이지민] |
− | * 시기: 1545년(명종 즉위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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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편자: [[심곡서원팀 KU|심곡서원팀]] [[형정유 KU|형정유]], [[필암서원 KU|필암서원]] [[201310038 임경희]]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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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내용 ''' == |
| + | 1545년(명종 즉위) 윤원형(尹元衡) 일파 소윤(小尹)이 윤임(尹任) 일파 대윤(大尹)을 숙청하면서 사림이 크게 화를 입은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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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내용''' ==
| + | 을사사화는 기본적으로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이었다. 거기에는 외척이 깊이 개입했다. 명종의 즉위(1545년) 직후 시작된 그 사화는 2년 뒤 정미사화까지 지속된 장기적인 정치 투쟁이었다. |
− | 1545년(명종 즉위) [[윤원형]](尹元衡) 일파 소윤(小尹)이 윤임(尹任) 일파 대윤(大尹)을 숙청하면서 사림이 크게 화를 입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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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을사사화]]는 기본적으로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이었다. 거기에는 외척이 깊이 개입했다. 명종의 즉위(1545년) 직후 시작된 그 사화는 2년 뒤 [[정미사화]]까지 지속된 장기적인 정치 투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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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배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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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종은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에게서 인종을 낳고, 제2계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에게서 명종을 낳았다. 이들 두 계비는 같은 파평 윤씨이며, 장경왕후의 아우에 윤임이 있었고 문정왕후의 아우에 윤원형이 있었다. 윤임과 윤원형은 같은 종씨(宗氏)이면서 서로 국구(國舅)가 되어 세력을 잡으려고 일찍부터 반목·대립하여 세간(世間)으로부터 윤임을 대윤(大尹), 윤원형을 소윤(小尹)이라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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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게 되자 윤임이 득세하여 사림(士林)의 명사를 많이 등용하여 이언적(李彦迪)·유관(柳灌)·성세창(成世昌) 등을 정부의 대관(臺官)으로 임명하는 등 일시 사림은 그 기세를 회복하였다. 당시 뜻을 얻지 못한 사림들은 윤원형의 밑에 모여서 사림과 반목하고 윤임 일파에 대한 반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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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경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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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런데 인종이 겨우 재위 8개월 만에 승하하고 12세의 명종이 즉위하여 왕대비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게 되니 형세는 역전하였다. 이번에는 소윤 윤원형이 득세하여 전일(前日)의 윤임 일파를 제거하게 되었다. 즉 예조참의로 있던 윤원형은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만회하기 위하여 평소 대윤파와 사감(私感)이 있던 지중추부사 정순명(鄭順明), 병조판서 이기, 호조판서 임백령(林百齡), 공조판서 허자(許磁) 등 심복들과 더불어 계책을 꾸몄다. 또 한편으로 그의 첩 정난정으로 하여금 문정왕후와 명종을 선동케 하여 형조판서 윤임 및 그 일파인 이조판서 유인숙(柳仁淑), 영의정 유관(柳灌) 등을 반역 음모죄로 몰아 귀양 보냈다가 죽이고, 이어서 계림군(桂林君)도 이 음모에 관련하였다는 무고로 죽이고, 전직 주서(注書) 이덕응(李德應)을 협박, 그 무고로서 수찬(修撰) 이휘(李輝), 부제학 나숙(羅淑), 참봉 나식(羅湜), 정희등(鄭希登)과 박광우(朴光佑), 사간(司諫) 곽순(郭詢), 정랑(正郞) 이중열(李中悅)·이문건(李文楗) 등 10여 명을 죽였으며, 그 뒤 이덕응 도 화를 입었다. 또 명종의 조카인 봉성군(鳳城君)에게 왕위를 옮기도록 획책하고 있다고 무고하였다. 한편 궁궐 밖으로는 인종이 승하할 당시 윤임이 경원대군의 추대를 원치 않아서 계림군(桂林君)을 옹립하려 하였다는 등의 소문을 퍼뜨렸다. 결국 봉성군과 계림군은 유배지에서 사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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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편 사회의 여파는 그 후 6년에 걸쳐 계속되었고, 윤임 등을 찬양하였다는 등의 갖가지 죄명으로 유배되거나 죽은 자의 수가 거의 100명에 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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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영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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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산군 이래의 큰 옥사는 이 사화가 마지막이 되었으나, 을사사화로 인해 모후 및 외척이 정권을 전횡하는 길을 열여 놓았으며, 사화에서 일어난 당파의 분파는 후기 당쟁의 한 소인(素因)이 되었다. 또 훈구가 전 정권을 장악하고 사림의 정치적 기반은 더욱 축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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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조선시대 4대 사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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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오사화 KU|무오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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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묘사화 KU|기묘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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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을사사화 KU|을사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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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갑자사화 KU|갑자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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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 자원''' == | | == '''웹 자원''' == |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33600&cid=40942&categoryId=31778 두산백과] |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33600&cid=40942&categoryId=31778 두산백과] |
|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44&contents_id=7322 네이버캐스트] | |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44&contents_id=7322 네이버캐스트] |
− | [http://ko.wikipedia.org/wiki/%EC%9D%84%EC%82%AC%EC%82%AC%ED%99%94 위키백과 을사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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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서원 KU]] | | [[분류:서원 KU]] |
1545년(명종 즉위) 윤원형(尹元衡) 일파 소윤(小尹)이 윤임(尹任) 일파 대윤(大尹)을 숙청하면서 사림이 크게 화를 입은 사건.
을사사화는 기본적으로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이었다. 거기에는 외척이 깊이 개입했다. 명종의 즉위(1545년) 직후 시작된 그 사화는 2년 뒤 정미사화까지 지속된 장기적인 정치 투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