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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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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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a data'''==
|사진 = 연산군묘.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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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입: 인물
|이름 =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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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항목명 : 연산군
|한자 = 燕山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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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항목명 : 燕山君
|출생 = 147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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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자: [[심곡서원팀 KU |심곡서원팀]] [송유빈 KU |송유빈]
|사망 = 15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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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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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조선 제10대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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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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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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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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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6년(성종 7) 11월 7일 [[조선]]의 9대 왕인 [[성종]]의 맏아들(적장자)로 출생하였다. 어머니는 후궁이었다가 성종의 총애를 받아 왕비에 오른 윤씨이다. 당시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는 [[성종]]의 첫번째 후궁이었으며 이후 [[연산군]]을 잉태하면서 비(妃)로 책봉되었다. 이름은 이융(李㦕)이고 7세 때 세자로 책봉되었다. 서연(書筵)을 통해 세자로서 수업을 받았으며 그의 학문적인 소양은 선대 왕들에 비해 부족하지 않았다. 1494년 [[성종]]이 사망하자 [[조선]]의 제10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12년에 걸친 길지 않은 치세 동안 두 번의 사화(士禍)를 일으키고, 극도의 폭정을 자행하다가 결국 조선 최초의 반정(反正)으로 폐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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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과 [[아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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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조선]] 명종 때 점을 잘 치는 것으로 유명한 [[홍계관]]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명종이 소문을 듣고 그를 불러 쥐가 들어 있는 궤짝으로 능력을 시험하였는데, 그가 숫자를 맞히지 못하자 사형을 명하였다. 그런데 조금 후에 암쥐의 배를 갈라보니 새끼가 들어 있어서 '아차'하고 사형 중지를 명하였으나 이미 때가 늦어 [[홍계관]]이 죽어버렸고, 이후 사형집행 장소의 위쪽 산을 [[아차산]]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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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이융(李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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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년 : 1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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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몰년 :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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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할 : 조선의 제10대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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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융(㦕). 성종의 맏아들. 즉위 3년 동안은 별탈 없이 보냈으나, 1498년 훈구파(勳舊派) 이극돈(李克墩) ·유자광(柳子光) 등의 계략에 빠져, 사초(史草)를 문제삼아 김종직(金宗直) 등 많은 신진 사류(士類)를 죽이는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키게 하였다. 1504년에는 생모인 폐비 윤씨가 성종의 후궁인 정씨(鄭氏) ·엄씨(嚴氏)의 모함으로 내쫓겨 사사(賜死)되었다고 해서 자기 손으로 두 후궁을 죽여 산야에 버리는 포악한 성정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또한 조모 인수대비(仁粹大妃)를 구타하여 죽게 하고, 윤씨의 폐비에 찬성하였다 하여 윤필상(尹弼商) ·김굉필(金宏弼) 등 수십 명을 살해하고, 이미 죽은 한명회(韓明澮) 등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하였다[甲子士禍]. 또 그의 난행을 비방한 투서가 언문으로 쓰여지자, 한글 교습을 중단시키고 언문구결(諺文口訣)을 모조리 거두어 불태웠다.  
  
=='''클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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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각도에 채홍사(採紅使) ·채청사(採靑使) 등을 파견해서 미녀와 양마(良馬)를 구해오게 하고, 성균관의 학생들을 몰아내고 그곳을 놀이터로 삼는 등 황음(荒淫)에 빠졌다. 경연(經筵)을 없애 학문을 마다하였고, 사간원(司諫院)을 폐지해서 언로(言路)를 막는 등 그 비정(秕政)은 극에 달하였다. 급기야 1506(중종 1)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 등의 중종반정에 의해 폐왕이 되어 교동(喬桐:江華)으로 쫓겨나고, 연산군으로 강봉(降封)되어 그해에 병으로 죽었다. 그의 치세는 개국 100년의 조선조에 한 시대의 획을 긋게 하여, 이후 50년은 사화(士禍)라는 유혈극이 잇따라 일어나 그것은 선조 이후 다시 붕당(朋黨) 및 붕당정치로 확대 악화되고, 한편으로는 임진 ·병자 등 국난으로 국운은 쇠퇴의 길을 밟게 되었다.
*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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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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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width:250px"|이 문서||style="width:200px"|관계||style="width:250px"|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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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A는 B시대 인물이다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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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A는 B의 후손이다||[[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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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A는 B의 후손이다||[[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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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A는 B를 죽였다||[[홍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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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A는 B의 소재이다 ||[[홍계관 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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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A는 B와 관련된다||[[아차산]]
 
|}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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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연산군가계도.jpg|연산군의 가계도<ref>그림출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26519&cid=40942&categoryId=33383 연산군, 두산백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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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references/>
 
  
=='''기여'''==
 
*[[김지선]]: 처음 작성
 
  
  
[[분류:아차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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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김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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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문화유산 디지털 콘텐츠 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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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분류: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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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0대의 왕(재위 1494∼1506). 많은 신진 사류를 죽이는 무오사화를 일으키고 생모 윤씨의 폐비에 찬성했던 윤필상 등 수십명을 살해하였다. 또한 경연을 없애고 사간원을 폐지하는 등 비정(秕政)이 극에 달하여 결국 중종반정에 의해 폐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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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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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서원 KU]]

2014년 6월 10일 (화) 11:39 판

Meta data

  • 타입: 인물
  • 한글항목명 : 연산군
  • 한자항목명 : 燕山君
  • 편자: 심곡서원팀 [송유빈 KU |송유빈]

내용

  • 이름 : 이융(李㦕)
  • 생년 : 1476
  • 몰년 : 1506
  • 역할 : 조선의 제10대 왕.

휘융(㦕). 성종의 맏아들. 즉위 3년 동안은 별탈 없이 보냈으나, 1498년 훈구파(勳舊派) 이극돈(李克墩) ·유자광(柳子光) 등의 계략에 빠져, 사초(史草)를 문제삼아 김종직(金宗直) 등 많은 신진 사류(士類)를 죽이는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키게 하였다. 1504년에는 생모인 폐비 윤씨가 성종의 후궁인 정씨(鄭氏) ·엄씨(嚴氏)의 모함으로 내쫓겨 사사(賜死)되었다고 해서 자기 손으로 두 후궁을 죽여 산야에 버리는 포악한 성정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또한 조모 인수대비(仁粹大妃)를 구타하여 죽게 하고, 윤씨의 폐비에 찬성하였다 하여 윤필상(尹弼商) ·김굉필(金宏弼) 등 수십 명을 살해하고, 이미 죽은 한명회(韓明澮) 등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하였다[甲子士禍]. 또 그의 난행을 비방한 투서가 언문으로 쓰여지자, 한글 교습을 중단시키고 언문구결(諺文口訣)을 모조리 거두어 불태웠다.

한편, 각도에 채홍사(採紅使) ·채청사(採靑使) 등을 파견해서 미녀와 양마(良馬)를 구해오게 하고, 성균관의 학생들을 몰아내고 그곳을 놀이터로 삼는 등 황음(荒淫)에 빠졌다. 경연(經筵)을 없애 학문을 마다하였고, 사간원(司諫院)을 폐지해서 언로(言路)를 막는 등 그 비정(秕政)은 극에 달하였다. 급기야 1506(중종 1)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 등의 중종반정에 의해 폐왕이 되어 교동(喬桐:江華)으로 쫓겨나고, 연산군으로 강봉(降封)되어 그해에 병으로 죽었다. 그의 치세는 개국 100년의 조선조에 한 시대의 획을 긋게 하여, 이후 50년은 사화(士禍)라는 유혈극이 잇따라 일어나 그것은 선조 이후 다시 붕당(朋黨) 및 붕당정치로 확대 악화되고, 한편으로는 임진 ·병자 등 국난으로 국운은 쇠퇴의 길을 밟게 되었다.





요약

조선 제10대의 왕(재위 1494∼1506). 많은 신진 사류를 죽이는 무오사화를 일으키고 생모 윤씨의 폐비에 찬성했던 윤필상 등 수십명을 살해하였다. 또한 경연을 없애고 사간원을 폐지하는 등 비정(秕政)이 극에 달하여 결국 중종반정에 의해 폐왕이 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