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산성 철제 초두"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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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16일 (목) 13:22 판
아차산성 철제 초두[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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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삼국시대 |
발견지 | 아차산성 A지구 |
주소 |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산16-46 |
개관
아차산성 철제 초두는 아차산성 A지구 기단건물지에서 출토되었는데, 세 개의 다리와 손잡이를 가지고 있는 철제 초두로서 다리 한 개와 손잡이가 결실된 상태이며, 1호 온돌 아궁이 앞에서 직립한 채로 출토되었다.
아차산성 철제 초두와 아차산성
초두는 술이나 국물 종류를 데우는 데에 사용된 용기로서 의례 등의 특수 용도에 사용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지금까지 남한에서 보고된 이런 형태의 철제초두는 반월산성의 출토품 1점에 불과한데, 이러한 형식의 고식 초두는 왕릉이나 수도 부근의 고분 등에 국한하여 출토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아차산성 철제 초두는 아차산성에 기거하던 인물의 성격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아차산성 토우와 아차산성 철제 초두, 그리고 아차산성
삼국사기 제5권 신라본기 제5에는 661년 신라 태종무열왕8년에 고구려가 술천성(述川城)을 공격하였다가 이기지 못하고 북한산성을 공격했는데, 이때 성안에 남녀 2,800명이 있었으며, 신라 17관등 중 11위에 해당하는 나마(奈麻)또는 10위에 해당하는 대나마(大奈麻)관등의 성주가 주둔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적을 물리친 공으로 성주 동타천(冬陁川)의 관등을 대나마(大奈麻)로 올려주었다고 한다.
이상의 문헌기록을 통해 볼 때 현존하는 아차산성은 7세기 중엽에 2천 8백여 명의 신라인이 거주할 정도의 규모를 가지고 있었고, 668년 고구려 정벌 당시 신라군의 중진(重鎭)[2]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차산성 A지구 기단건물지에서 출토된 관모를 착용한 아차산성 토우와 아차산성 철제 초두는 유물이 지닌 성격상 아차산성이 중요한 기능을 하였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3]
지도
클래스
- 사물
관련 문서
이 문서 | 관계 | 관련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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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성 철제 초두 | A는 B에서 발견되었다 | 아차산 |
아차산성 철제 초두 | A는 B에서 발견되었다 | 아차산성 |
아차산성 철제 초두 | A는 B에서 발견되었다 | 아차산성 온돌 건물지 |
아차산성 철제 초두 | A는 B에서 조사되었다 | 서울대학교 박물관 |
아차산성 철제 초두 |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 서울대학교 박물관 |
아차산성 철제 초두 | A는 B에 만들어졌다 | 고구려시대 |
아차산성 철제 초두 | A는 B와 관련된다 | 아차산성 토우 |
아차산성 철제 초두 | A는 B와 같은 형태이다 | 반월산성 초두 |
갤러리
아차산성 철제 초두 도면[4]
주석
- ↑ 아래 사진출처: 임효재 외, 『아차산성 시굴조사보고서』, 서울대학교박물관・광진구, 2000, 7쪽.
- ↑ 국가의 방위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군사적 요충지에 설치한 군진(軍鎭)을 뜻함.
- ↑ 최종택, 「아차산성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 성과와 과제」, 『사총』, 제 81집, 2014, 32-33쪽.
- ↑ 그림출처: 최종택, 「아차산성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 성과와 과제」, 『사총』, 제 81집, 2014, 25쪽.
기여
- 김지선: 처음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