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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중·일 삼국에는 적벽이라 이름 붙여진 명승지나 실제로 당시에 적벽선유(赤壁船遊)를 행했던 장소가 남아있다. | 현재 한·중·일 삼국에는 적벽이라 이름 붙여진 명승지나 실제로 당시에 적벽선유(赤壁船遊)를 행했던 장소가 남아있다. | ||
*'''[충남 금산 적벽강]'''은 붉은색 바위벽을 뜻하는 적벽(赤壁)과 그 아래 적벽을 적시며 흐르는 강을 ‘적벽강’이라 이름 짓고 예로부터 그 풍광을 즐겼다고 한다. 30여 미터 높이의 기암절벽 아래 도도히 흐르는 적벽강이 수려한 경관을 자랑한다. | *'''[충남 금산 적벽강]'''은 붉은색 바위벽을 뜻하는 적벽(赤壁)과 그 아래 적벽을 적시며 흐르는 강을 ‘적벽강’이라 이름 짓고 예로부터 그 풍광을 즐겼다고 한다. 30여 미터 높이의 기암절벽 아래 도도히 흐르는 적벽강이 수려한 경관을 자랑한다. |
2022년 6월 23일 (목) 00:04 판
목차
Theme
메타버스로 만나는 소동파와 덕후들
Synopsis
19세기 들어 갑작스레 고조되는 한·중·일의 ‘모소열(慕蘇熱)’은 고려 이래로 문인들이 소식을 애호했던 양상과는 무관하게 청나라 문인 옹방강(翁方綱: 1733∼1818)에 의해 전파된 경향이 있다고 보는 것이 학계의 보편적인 시각이다. [1] 그렇다면 옹방강의 ‘모소열’은 어떻게 조선으로 전파될 수 있었는가? 우리는 당시 연행을 통한 조선 시대 문인들과 청조 문인들의 교유 상황에 대해 좀 더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Storyline
Episode 1: 소동파, 그는 누구인가?
소식(蘇軾: 1037∼1101)은 이름보다 ‘동파(東坡)’라는 별호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동파’라는 호는 소식이 45세 때, 오대시안(烏臺詩案) 사건으로 인하여 황주(黃州)에 유배되었던 4년 동안 거의 자갈밭이나 다름없었던 ‘동쪽 언덕’을 손수 개간하여 지내면서 스스로 붙였던 자호(自號)이다. 동파라는 별호는 다사다난했던 그의 인생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동시에 특유의 낙천적 성격과 유머로 마침내 고난과 역경을 극복했던 한 문인을 상징하고 있다는 점에서 후대 사람들은 동파라는 별호로서 그를 지칭하는 것에 더욱 친근함을 느껴왔다. 소식(蘇軾)은 시(詩)·사(詞)·부(賦)는 물론이고 제발(題跋) 같은 잡문, 아울러 서(書)·악(樂)의 예술영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보이며 그 재능을 남김없이 발휘하였다. 이 때문인지 소식은 북송 시대부터 그 이후까지 꾸준히 문인들의 애호를 받아왔다.
Episode 2: 중국의 소동파 덕후, 옹방강
소식에 대한 관심과 추숭은 18세기 ‘모소(慕蘇)’ 열풍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그러한 ‘모소열(慕蘇熱)’의 중심에 청나라 문인 옹방강(翁方綱: 1733∼1818)이 자리하고 있다. 옹방강은 일종의 동파벽(東坡癖)이 있던 인물이다. 후지츠카 츠카시의 연구(1936)에 따르면 옹방강의 동파벽은 그가 우연히 소식의 〈천제오운첩(天際烏雲帖)〉을 손에 넣게 된 이후라고 하는데, 기록을 살펴보면 옹방강은 소식의 시집과 초상화, 서화작품 수집에 열성을 보이는 한편, 1783∼1818년까지 해마다 소식의 생일이 되면 소식의 초상화를 내걸고 몇몇 문인들과 함께 모여 절을 하고 시를 짓는 등 배파제(拜坡祭)를 겸한 시회(詩會)를 가졌다.
Episode 3: 한국의 소동파 덕후, 김정희
옹방강이 해마다 소동파에 대한 ‘모소(慕蘇)’의 열기를 더해가던 중 1809년 10월 28일 조선(朝鮮)에서 연행사(燕行使)로 사행을 가게 된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와 조우하면서 옹방강의 동파벽은 또한 김정희에게 전해지게 되었고, 이후 김정희에 의해 조선 문인들 사이에서 모소 열풍이 불게 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옹방강과 김정희의 만남이 없었더라면 이후 조선 문인들 사이에서 지속된 ‘배파회(拜坡會)’의 현상은 성립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후 김정희의 제자 강위(姜瑋: 1820∼1884)는 1876년(고종 13년)에 이건창(李建昌: 1852∼1898), 조택희(趙宅熙) 등과 동파생진회(東坡生辰會)를 결성하여 지속적으로 ‘모소(慕蘇)’ 풍조를 형성해간다. 앞서 추사 김정희가 연행을 다녀온 이후, 1812년 7월에는 자하(紫霞) 신위(申緯:1769∼1847)가 왕세자 책봉의 서장관 자격으로 연경을 방문한다. 김정희는 신위를 위해 〈송자하입연십수(送紫霞入燕十首)〉를 써서 전별 선물로 주었다. 신위는 김정희의 소개장을 들고 옹방강을 만날 수 있었고 귀국 후에는 옹방강의 아들 옹수곤(翁樹崐)과도 지속적인 교유를 나누었다. 이후 신위는 해마다 소식의 생일이 돌아오면 몇몇 지인들과 자신의 보소실(寶蘇室)에 함께 모여 벽에 입극도(笠屐圖)를 걸고, 향을 피우며, 죽순과 육포를 올리는 등 추모하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이러한 점은 옹방강이 행했던 배파제(拜坡祭)의 형식이 신위에게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한편 김정희와 신위를 중심으로 퍼져나간 모소열(慕蘇熱)은 궁중으로까지 유입되었는데, 헌종(憲宗)이 자신의 거처인 낙선재(樂善齋)에 추사의 글씨로 ‘보소당(寶蘇堂)’이라는 현판을 내걸고 신위로 하여금 실제 사용하던 인장과 직접 수집한 인장, 왕실에서 가지고 있던 인장 등을 집대성하도록 하여 《보소당인존(寶蘇堂印存)》을 제작한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Episode 4: 일본의 소동파 덕후, 나가오 우잔
19세기 일본에서의 ‘모소(慕蘇)’ 열풍은 각각 메이지(明治: 1868∼1912) 시대와 다이쇼(大正: 1912∼1926) 시대에 나가오 우잔(長尾雨山: 1864∼1942)과 도미오카 뎃사이(富岡鐵齋: 1836∼1924) 등에 의해 주도된 적벽회(赤壁會)와 수소회(壽蘇會) 모임의 양상으로 드러난다. 이들은 소동파와 관련된 글씨(書), 그림(畵), 문구(文具), 골동품(古董) 등을 열성적으로 수집하며 동파의 생일인 12월 19일 총 다섯 차례에 걸쳐 ‘수소회(壽蘇會)’ 모임을 개최하였다. 이 뿐만 아니라 1922년에 처음으로 ‘적벽회(赤壁會)’를 개최하였는데 ‘적벽회’는 동파의 적벽유(赤壁遊)를 흉내 낸 성대한 모임이었다. 나가오 우잔은 적벽회를 열 때마다 〈적벽부(赤壁賦)〉와 관련된 그림이나 동파와 관련된 물건들을 심혈을 기울여 진열해놓고, 일본 각 지역에서 오는 수백 명의 인사들을 정성껏 맞이하였다.
한·중·일 삼국의 '모소(慕蘇)' 풍조와 적벽선유(赤壁船遊)]]
현재 한·중·일 삼국에는 적벽이라 이름 붙여진 명승지나 실제로 당시에 적벽선유(赤壁船遊)를 행했던 장소가 남아있다.
- [충남 금산 적벽강]은 붉은색 바위벽을 뜻하는 적벽(赤壁)과 그 아래 적벽을 적시며 흐르는 강을 ‘적벽강’이라 이름 짓고 예로부터 그 풍광을 즐겼다고 한다. 30여 미터 높이의 기암절벽 아래 도도히 흐르는 적벽강이 수려한 경관을 자랑한다.
- [전북 부안 적벽강]은 퇴적암인 셰일과 화산암인 유문암의 직접적인 경계 부분으로 성질이 다른 두 종류의 암석의 상호작용에 의해 형성된 독특한 암석인 페퍼라이트를 관찰할 수 있는 장소이다. 주상절리와 해식 절벽으로 인하여 그 형상이 ‘적벽’을 상기시키게 하므로 이러한 명칭을 붙여 명소화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 [전남 화순 적벽]은 동복호가 철옹산성을 감싸고 돌면서 천혜의 장관을 연출하는 곳이다. 1519년 기묘사화 이후 동복에 유배되었던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 1483∼1536)가 이곳의 절경을 보고, 소동파가 읊었던 중국의 적벽에 버금간다 하여 ‘적벽’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그 뒤에도 석천 임억령, 하서 김인후, 제봉 고경명, 학봉 김성일, 농암 김창협, 다산 정약용, 방랑시인 김삿갓 등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명소이다. 현재 지자체에서 ‘적벽 투어’를 운영하고 있어 소동파의 적벽선유(赤壁船遊)를 이 시대에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해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 [중국 황강시(黃岡市) 적벽공원(赤壁公園)]은 ‘오대시안(烏臺詩案)’ 사건으로 장강(長江) 아래 호북성(湖北省) 황주(黃州, 현 黃岡)로 유배되었던 소동파의 행적과 적벽선유를 기리기 위해 중국 정부에서 지정한 역사·문화 관광지이다. 소동파는 1082년 7월 16일(旣望)과 10월 15일(望)에 객(客)과 함께 장강에 배를 띄우고 뱃놀이한 감상과 정황을 글로 남겼는데 이를 〈전적벽부(前赤壁賦)〉와 〈후적벽부(後赤壁賦)〉라 한다. 이후 송대(宋代), 원대(元代), 명대(明代), 청대(淸代)에 적벽부를 소재로 한 그림들이 그려졌을 만큼 소동파의 적벽부는 인기가 있었다. 현재 황강 적벽공원에 가면 소동파가 즐겨 먹었다는 동파육(東坡肉)과 동파병(東坡餠)을 판다고 한다.
- [일본의 적벽과 관련된 장소는 교토 우지시(宇治市)의 흥성사(興聖寺)]이다. 1922년 9월 7일, 일본 교토 우지(宇治)의 집회장에서 도미오카 뎃사이(富岡鐵齋, 1836∼1924)와 나이토 고난(內藤湖南, 1866∼1934), 나가오 우잔(長尾雨山, 1864∼1942)이 심혈을 기울여 준비를 마치고 일본 전역에서 오는 수백 명의 인사들을 맞이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우지의 만벽루(萬碧樓) 2층에 마련된 진열대 위에 동파상(東坡像)을 진열해놓고 소동파에게 제사를 지냈다. 본 연회를 마친 뒤에는 강변의 놀잇배〔畵舫〕로 자리를 옮겨 연회를 진행하였고 다시 흥성사(興聖寺) 가장자리 동쪽에 있는 선정사(禪精舍)에서 차 연회〔茗筵〕를 가지는 등 소동파 추모제를 겸하여 다채로운 연회를 펼쳤던 것이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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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 전가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