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정DKU"의 두 판 사이의 차이
26번째 줄: | 26번째 줄: | ||
|} | |} | ||
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이엄은 조선 초기에는 이엄(耳掩)이 귀를 가릴 정도의 크기로 간단한 형태였으나, 전해 내려오면서 [[조선 중종|중종]] 때 귀를 가리는 형태에서 머리까지 모두 덮어쓰는 형태로 변화했고, 이 변화는 왕실에서 먼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br/> | 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이엄은 조선 초기에는 이엄(耳掩)이 귀를 가릴 정도의 크기로 간단한 형태였으나, 전해 내려오면서 [[조선 중종|중종]] 때 귀를 가리는 형태에서 머리까지 모두 덮어쓰는 형태로 변화했고, 이 변화는 왕실에서 먼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br/> | ||
− | 이엄의 사용은 점점 분수에 넘치게 되어 폐단이 나타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명종 8년 9월에는 | + | 이엄의 사용은 점점 분수에 넘치게 되어 폐단이 나타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명종|명종]] 8년 9월에는 |
{|class="wikitable" style="width:75%;" border="0" | {|class="wikitable" style="width:75%;" border="0" | ||
| | | |
2020년 10월 20일 (화) 18:51 판
조선시대 난모(暖帽, 煖帽)
목차
1. 난모(暖帽, 煖帽)란?
난모(煖帽, 暖帽)란 겨울에 쓰는 방한모의 총칭이다. 난모들은 조선 후기 이전에는 상류사회의 쓰개로 지위, 부의 상징물의 의미가 컸으나,
조선 말기 이후에는 일반화되어 남녀노소 모두 목적으로 널리 착용하게 되었다.
2. 남성용
(1) 이엄(耳掩)
조선시대 난모(暖帽, 煖帽)에 관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기록은 『태종실록』 6년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모이엄(毛耳掩)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무리 추운 때라 하더라도 모이엄(毛耳掩)과 분투혜(分套鞋)는 전정(殿庭)의 조회(朝會) 때나 행행(行幸)의 영송(迎送) 때 이외에는 착용하지 말게 하소서. |
라 기록되어 있어 태종 때 이미 이엄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후, 태종 때 조정의 신하들이 착용하는 것으로 기록된 이래, 세종 때의 논의를 거쳐 『경국대전』에서 관원의 품급에 따라 재료를 차별화한다.
“이제부터는 대소 신료들이 중국의 예에 따라 평상시는 이엄을 쓰되, 부제학(副提學) 이상은 초피와 단자(緞子)를 사용하고, 사간(司諫) 이하 9품까지는 서피와 청초(靑綃)를 사용하도록 하라"[2] |
이러한 논의는 『경국대전』에서 1품부터 정3품 당상관까지 단(段:緞)과 초피(貂皮), 종3품 당하관부터 9품까지 초(綃)와 서피(鼠皮), 종친 6품까지 초와 초피, 잡직(雜職)으로 임무가 있는 참상(參上) 이상은 초와 서피를 사용하는 제도로 확정된다.[4]
“지금 상의원(尙衣院)에서 하사하는 이엄은 그 제도가 매우 크고 비용도 많습니다. 그런데 여러 신하들이 이를 본받아서 넓고 크게 하기를 다투어 힘씁니다. |
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이엄은 조선 초기에는 이엄(耳掩)이 귀를 가릴 정도의 크기로 간단한 형태였으나, 전해 내려오면서 중종 때 귀를 가리는 형태에서 머리까지 모두 덮어쓰는 형태로 변화했고, 이 변화는 왕실에서 먼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엄의 사용은 점점 분수에 넘치게 되어 폐단이 나타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명종 8년 9월에는
“입자(笠子)를 쓸 때에 이엄을 당하관(堂下官) 및 사족(士族)은 서피·일본산 산달피[倭山獺皮]로써 만들고, 제학(諸學)의 관원과 제색(諸色)의 군사·서얼(庶孽)·이서(吏胥)들은 적호피(赤狐皮)·국산 산달피[鄕山獺皮]로써 만들고, 공상(工商)·천예(賤隷)들은 산양피(山羊皮)·구피(狗皮)·묘피(猫皮)·지달피(地獺皮)·이피(狸皮)·토피(兎皮) 등으로써 만들라."[6] |
라고 하여 계급과 귀천에 따라 모피의 재료에 차등을 두었으며, 모피가 신분의 지표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품계 | 1품~정3품, 당상관 | 종3품, 당하관~9품 | 종친1~6품 | 雜職 有任者 參上 이상(정종6품) |
---|---|---|---|---|
재료 | 段, 貂皮 | 綃, 鼠皮 | 綃, 貂皮 | 綃, 鼠皮 |
(2) 휘항(揮項)
*명칭
휘항(揮項) · 호항(護項) · 풍령(風領) · 휘향이라고도 한다. 정약용의 『아언각비(雅言覺非)』에는 “호항은 이마를 두르는 털 머릿수건 같은 방한구로서 중국의 음으로는 ‘호’를 ‘휘’라 읽는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말이 와전되어 휘항으로 불렀다. 그 연원이 이미 오래전에 잘못되었기 때문에 본래 호항이지 휘항이 아니다.”라고 하여, ‘護’와 ‘揮’가 중국 발음으로는 같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소리가 다르므로 휘항(揮項)보다는 호항(護項)이라는 용어가 적합하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하였다. 하지만 오늘까지도 호항보다는 휘항이라는 용어가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형태
목덜미까지 덮어 보호한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이엄[耳掩]에서 비롯된 것으로 겉은 검은 공단으로 하고 서피(鼠皮)나 초피(貂皮)로 안을 넣었다. 머리 위는 뚫렸고 크기는 앞이마와 귀머리 전체를 완전히 덮고 길이는 등을 넉넉히 덮을 정도이다. 앞쪽에 끈을 달아 앞가슴에서 여미도록 되어 있다. 볼끼에 끈을 달아 단단히 묶음으로써, 휘양은 찬바람이 얼굴 안으로 처음부터 들어가지 못하게 해서 방한 효과를 높였다. 휘양은 겨울에 찬바람과 추위를 이겨내려고 착용하였기 때문에, 실용성을 중시하였고 장식은 많이 하지 않았다.
*착용
정약용의 『아언각비(雅言覺非)』에는 “귀한 사람은 초피 휘양[貂皮揮揚]을, 천한 사람은 서피 휘양[鼠皮揮揚]을 착용하였다.”[7]라고 한다. 소재에 따라서 휘양은 모휘양毛揮揚·목휘양木揮揚·양휘양凉揮揚으로 구분한다. 계급과 가정 경제력에 따라서 재질을 달리해 제작하였다.
*개설
'휘항’의 명칭은 18세기 중반에 등장하며, 18세기, 19세기 전후 문헌에는 조선시대에 착용한 방한모 중에서 유독 휘항에 관한 내용만이 다수 기록되어 있다. 또한 ‘책거리’에서 보이는 방한모의 종류가 대부분 휘항이다. 휘항은 18세기, 19세기 전후에 많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3) 만선두리(滿縇頭里)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무신(武臣)은 공복에 만선두리라는 것을 착용했는데, 그 제도는 모휘항(毛揮項)의 앞과 뒤 그리고 바깥쪽 가장자리를 초미(貂尾)로 선을 둘렀기 때문에 이름을 그렇게 지은 것이다.”[8] |
라고 하여 모휘항(毛揮項)의 앞뒤와 바깥의 가장자리를 초피(貂皮)로 둘러 선(線 또는 縇)을 하였기 때문에 만선두리라 하였다. 조선시대 때 무신이 공복에 착용하였던 것이다.
3. 여성용
(1) 아얌
*착용 및 역사
아얌은 조선시대에 부녀자들이 외출시 추위를 막으려고 머리에 쓰던 이엄(耳掩)의 한 종류이다. 조선 말기에는 여성용 방한모로 변화되어 착용하면서 아얌이라고 불렀다. 이엄은 원래 귀까지 덮는 것이었으나 아얌은 귀를 내놓고 이마만 덮기 때문에 '이마를 가린다'는 뜻으로 액엄(額掩)이라고도 불렀다. 조선 후기에는 외출 시에 방한과 함께 장식적인 목적으로 일반 서민부녀자들과 젊은층에서 애용하였으며, 기녀들이 일상용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조선 말기 조바위가 등장하면서 차츰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형태 및 특징
아얌의 일반적인 형태는 위에는 터져 있고, 이마만 두르게 되어 있다. 밑에는 털이 달려 있으며, ‘아얌’의 앞쪽과 뒤쪽에는 붉은색의 수술 장식이 늘어져 있고, 특히 뒤쪽에는 넓적하고 기다란 ‘아얌드림’이 현란하게 늘어져 있다. ‘아얌드림’은 ‘아얌’ 뒤에 댕기처럼 길게 늘어뜨린 비단이다. 재료와 빛깔은 겉감의 상단 누빈 부분은 검정색이나 자색 비단을 썼고, 아랫부분은 검정색이나 짙은 밤색의 모피(毛皮)를 둘렀다. 안감은 적색 융을 사용하였는데 누비지는 않았다. 앞뒤 상부중앙에 부착되어 있는 술은 대부분 적색이며, 앞뒤에 연결된 끈은 전부 납작한 끈목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일부 기생들이 착용한 아얌에는 앞뒤 술에 화려하고 큰 보석(옥·석웅황·밀화 등)이 부착되어 있어 매우 사치스러웠다.
"아양 떨다" '아양'이란 말은 옛날에 부녀자들이 머리에 쓰던 옷차림 '아얌'이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이 '아얌'을 쓰고 나들이하면 걸음을 걸을 때마다 앞의 붉은 술과 뒤에 비단 댕기가 흔들리면서 떨게 되고, 자연히 주변사람들의 시선을 끌게 되었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남의 시선을 끌거나 남에게 돋보이려고 하는 말이나 행동'을 '아양을 떨다'고 말하게 되었다. 남에게 특별히 잘 보이려고 간사스럽게 애교를 부리며 알랑거리는 것을 '아양을 부린다', '아양을 떤다'는 말이 생긴 것이다.(정말 궁금한 우리말 100가지, 2009. 9. 25., 조항범) |
아얌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2) 조바위
조선 말기에 아얌이 사라지면서 가장 널리 사용된 것으로 서양의 목도리가 등장할 때까지 부녀자들이 사용한 방한모로 그 역사가 가장 짧다. 상류계급에서 일반평민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착용하였으나, 주로 반인(班人) 부녀자들의 장식을 겸한 외출모로 쓰였다. 예복을 갖추지 못하였을 때에는 의례적인 용도로 쓰이기도 하였다.
일반적인 형태는 빰에 닿는 부분을 동그랗게 하여 귀를 완전히 덮게 하고, 바람이 들어가지 않도록 가장자리가 오그라져 있어 방한의 구실을 한다. 두 뺨은 가려지지만 뒤쪽 아랫부분이 곡선을 이루며 약간 들어가 있어 쪽진 머리를 하면 쪽이 조바위 밖으로 자연스럽게 나와 편안했다. 19세기말 여자들의 쪽진머리가 일반화되면서 쓰이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민씨가의 규수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각주>
- ↑ 『太宗實錄』 6年 11月 23日 (己卯) : 又啓, “當極寒日, 毛耳掩分套鞋, 除殿庭朝會行幸迎送時, 不許穿著外, 闕門外待朝時, 行幸路次侍衛時, 各衙門坐起時, 年老有疾, 自願穿著者, 勿許禁止. ” 皆從之.
- ↑ 『世宗實錄』 14年 11月 10日 을축 :“自今大小臣僚, 依中朝例常著耳掩, 副提學以上, 用貂皮段子; 司諫以下至九品, 用鼠皮靑綃.”
- ↑ 『世宗實錄』 22年 1月 25日 : “自古有等, 況本朝士大夫衣冠, 已有等差 貂皮, 稀貴之物. 今貂裘與貂皮耳掩, 人人皆得穿着, 未便. 自今貂裘及土豹裘, 自集賢殿副提學以上穿着, 三品以下, 只許狸狐鼠皮. 耳掩則三品以上用貂皮, 四品以下用狸狐鼠皮. 工商賤隷衣及耳掩, 只用狐狸皮雜毛皮.”
- ↑ 『經國大典』「禮典」‘儀章’.
- ↑ 『中宗實錄』 9年 10月 25日: “而今尙衣院所賜耳掩, 其制甚闊、其費亦鉅, 群下化之, 爭務寬大. 昔也只掩其耳, 今也全蒙其首, 甚可怪也."
- ↑ 『明宗實錄』 8年 9月 18日 (辛酉) : “著笠時耳掩, 堂下官及士族則用鼠皮, 倭山獺皮; 諸學官員, 諸色軍士, 庶孽, 吏胥, 則用赤狐皮, 鄕山獺皮; 工商, 賤隷則用山羊皮, 狗皮, 猫皮, 地獺皮, 狸皮, 兔皮等”
- ↑ 『雅言覺非』 2卷 : “貴人貂皮揮項, 賤人鼠皮揮項”
- ↑ 『五洲衍文長箋散稿』 卷45. 暖耳袹袷護項暖帽辨證說.“武臣,則公服用滿縇頭里,其制毛揮項之前後外沿,周以貂尾爲縇,故名.”